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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의 새사람 (엡 04: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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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네 병을 고쳤다 하지 않고 네 죄사함 받 았다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중풍병자 사건입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을 생각해 봅니다. 왜 먼저 병을 고치지 않았는지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일보다는 육적인 생각을 앞세운다면 능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서기관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 칠 수 없다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죄에 대하여 말하는 것 이 참람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감히 그럴 권세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에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나 터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 들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죄사함 받았다는 말을 남발 합니다. 병 고침 받았다는 말은 별로 하지 않습니다. 병고침 보다는 죄사함 받았 다는 말이 쉽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죄의식이 있든지 없든지, 병고침 보다는 죄사함 받는 것 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는 죄에 대한 관심은 없고, 병이 고쳐지기만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일보다 육적인 일에 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기 쉬운 말로 죄사함 받았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병고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영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해 보셔야 할것은 나 자신은 몸에 대하여서만 관심이 있는 가, 아니면 영적인 문제를 더 중히 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영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속에 욕심이라는 용어가 두번 나옵니다. 그 원어의 뜻이 한번은 욕심의 의미로, 그리고 탐심이나 탐욕의 의미로 쓰입니다.

이것은 몸의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탐심과 탐욕으로 가득찬 옛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가 그 탐심과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육신의 축복을 비는 푸닥거 리로 소일한다면 한심한 일입니다.

구습을 벗어 버리지 않으면 새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회 안에 이방인들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전체적인 뜻을 생각 하시면서 각 구절을 살펴 보시겠습 니다.

 첫째. 4장 17절에서 18절입니다.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 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모두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기도 가운데 떠오르는 영감이 의로운 생각만은 아닙니다. 믿는 마음 속에도 허망한 일을 생각하면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허망한 생각을 가 지면 총명이 어두워 지기 때문입니다.

열왕기 상 21장 25절은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합은 본래 악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악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악한 왕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22년의 치세는 독재와 횡포로 점철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를 같은 구절은 그의 아내 이세벧에게 충동 되었음이니라 하고 말합니다.

이세벧은 시돈 왕의 딸입니다. 정략적인 결혼으로 왕비가 되었습니 다. 이세벧은 시집 오면서 왕가마다 섬기는 바알우상을 가져 왔습니 다.

그녀는 아름다웠습니다. 총명과 재치도 있었습니다. 왕의 마음을 호 렸습니다. 왕이 바알을 섬기게 됩니다. 백성의 마음을 호립니다. 백성 들이 바알을 믿고 우상에게 나아가 절을 합니다.

바울사도는 골로새서 3장 5절에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니라 했습 니다. 왕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그 마음 속에 탐심이 들어 갔기 때 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3년 6개월동안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한재 로 인하여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제사들과의 갈멜산 대결은 너무도 유 명한 이야기입니다.

850명 바알의 사제들이 기룐 시냇가에서 백성들에 의하여 목베임을 당하여도 왕은 회개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왕이 이세벧 과 함께 살고 있는 한은 회개할 수 없습니다.

이방이 교회안에 들어와 있으면 교회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 면 이방이 끊임없이 충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세벧은 아합 왕을 충동 했습니다. 그의 탐욕을 부추깁니다. 아합 의 탐심은 나봇의 포도원 사건으로 극치를 이룹니다.

나봇의 포도원은 왕궁 가까이에 있습니다. 왕은 그것을 가지고 싶습 니다. 포도원 따위가 욕심 날리 없습니다. 포도원을 헐어서 나물 밭 을 삼으려는 것입니다. 사돈이 전답을 사면 배가 아파하는 시기심입니 다.

나봇은 포도원을 내어 놓지 않습니다. 돈을 주어도 팔고자 하지 않 습니다. 왕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보고 이세벧은 더욱 충동질 합니다.

이세벧은 백성의 장로들을 사서 나봇에게 누명을 씌웁니다. 나봇은 사형 당하고 포도원은 몰수 됩니다. 이것이 이방여인의 한짓입니다.

과연 탐심의 극치입니다.

이 사건으로 아합은 전쟁에서 패망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나 봇의 피를 흘린 그 포도원에서 들개의 밥이 되고 맙니다.

교회 안에도 이방의 생각이 들어오면 탐심이 가득차고 맙니다. 어떤 교회가 예배당 증축을 위하여 이웃집의 땅을 구입하려고 해도 팔지 않 습니다.

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저 땅을 팔고 이사가게 해주시옵소 서. 어서 이 땅을 사서 예배당을 증축하게 해주시옵소서. 땅을 팔지 않으려 하면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라도 땅을 팔게 해달라고 기도 합니다.

옳은 기도입니까. 잘못된 기도입니까. 교회가 땅을 사서 건물을 증 축하려는 것은 좋습니다. 이런 경우 교회가 먼저 편리한 장소를 채아 서 떠나야 합니다.

어느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악을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 무지하고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교회 안에, 믿는 자의 심령 속에 이방의 방법이 들어오지 않게 해야 합니다.

 둘째. 19절을 보시겠습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 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하였습니다.

감각없는 신자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싶습니다. 신앙의 감각, 진리 의 감각, 도덕성에 대한 감각이 점점 무디어져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죄를 나병에 비유합니다. 나병은 감각이 없는 병입니다. 신 경을 갉아 먹기 때문에 감각이 없어 진다고 합니다, 한하운은 문둥이 시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문둥이 입니다 / 어머니 가 문둥이 입니다 /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잘못 태어난 버섯 / 문둥 이 새끼 올시다.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는 슬픈 그의 시입니다.

한하운이 쓴 보리피리라는 시집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북 간도 땅을 걸어 갑니다. 때는 봄날입니다. 보리가 패는 밭고랑에 앉아 다리 쉼을 합니다. 땀에 절은 양말을 벗습니다. 탈탈 털어내니 잘리운 발가락 하나가 툭 털려 나옵니다.

땅바닥에 나디구는 발가락을 보면서 남아 있는 발가락 형제를 만지 작 거립니다. 언제 또 잘려 나갈지 모를 형제들입니다. 발가락이 잘려 나가도 아픔을 모르는 문둥이 입니다.

그 문둥이 신세를 두고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잘못 태어난 버섯 / 문둥이 새끼 올시다. 하고 시를 읊픕니다. 버섯은 원래 썩은데서 자라 는 것입니다. 썩어 가는 자신의 육체를 보면서도 감각을 모르는 슬픔 이 여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문둥이와도 같습니다. 나병은 그 자체가 아픔이어 서가 아니라 감각을 없이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도들도 자신만을 위하여 살려고 하면 죄에 깊이 빠지게 됩니다.

죄란 묘한 것이어서 빠져 들면 들어 갈수록 감각이 상실 됩니다. 그래 서 자신이 죄인인지 조차 잊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입술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은 더욱 거짓 과 탐심으로 강하여 집니다. 외면적으로는 화려한 교회 생활을 해도 심령이 새롭게 되지 못합니다.

갈수록 감각이 없기 때문에 더 흉악해집니다. 그래서 자기 만이 잘 한다고 착각하는 위선자가 되어 버립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사람 들을 가리켜서 망상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20절을 보시겠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배 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그리스도를 배웠다면 그리스도가 행하신대로 해야 합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 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1 절에서 24절까지 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배운다는 말과 입는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 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읽고 공부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입는다는 말씀 역시 의복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 사람으로 변화 되는 것을 말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려면 먼저 썩 어져 가는 모든 구습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겟세마네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 시는 주님을 배웠습니다. 무엇을 기도 하셨을까요. 내 뜻을 이루기 위 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시기 위한 기도 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어깨에 메었습니다. 돌짝길, 골고다 언덕을 맨발로 올라 가셨습니다. 당신이 질머지고 간 십자가 위에다 당신의 몸을 못 박았습니다. 살점이 툭툭 떨어져 나가고 선지 피가 점점이 튀겼습니 다.

주님은 왜 험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더럽고 추한 인생의 죄짐을 대신 하시려고 그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 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잘라버린 말고의 귀를 붙여 주시고, 당신에게 침 뱉고 조롱하는 이들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순종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용서를 배웁니 다. 새 사람이 되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로 새로워지라는 말씀입니 다.

 마지막으로 25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 라 이것은 새 사람을 입은 후에 취해야 할 출발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직해야 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직 새 사람을 입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의 경력이 오래 되어도 거짓에서 완전히 벗어 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짓말은 큰 문제로 등장 합니다.

진실이 아닌 줄 알면서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진실이 아닌데도 진리인양 믿고 말하는 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한번 망상에 빠지면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이비 신흥종교가 많이 일어나는 것은 이러한 망상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거짓말 하는 습관에 익숙해져서는 안됩니다. 소위 부 흥사 식으로 말한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부흥사들이 집회에서 25명이 결신 했으면 50명 이 었다 하고, 500만원의 연보가 나왔으면 천만원이 나왔다고 선전 합니 다.

부흥사들의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과장하여 말하다 보면 습관이 되고 결국은 망상에 빠져버리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 하십시다. 주님 앞에 선 중풍병자는 천만다행이 었습니다. 그에게 몸의 문제보다 마음의 문제가 심각함을 지적하여 주 셨습니다. 흔히 몸이 건강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척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문제 입니다. 건강한 몸속에 숨겨져 있는 악을 보지 못하기 때문 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건전성에는 거의 감각이 마비되어 있습니다. 성공적인 교회란 교인의 수를 많이 확보하여 화려 한 예배당을 건축하고 예산의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상승 시켜야 하 는 것입니다.

성장하고 있는 교회란 많은 스탭들에 의한 다양한 프로그램의 운영 이 매끄럽고 전문적인 교인상식이 늘어나 소위 교회 비지니스가 잘되 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교회의 망상입니다.

주님의 소원은 교회의 사업에 있지 아니합니다. 죄인을 구원하여 그 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는데 있습니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 어 새 사람을 입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 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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