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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일조도 복음적인가 (레 27:30-33, 눅 11: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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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생활에서 가장 큰 멍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 '십일조' 헌금에 관한 것이다. 설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 문제에 대한 설교를 하는데 괴로움을 겪고 있다. 그만큼 듣는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회 하면 십일조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과연 복음적인가 이스라엘의 옛 관습이 아닌가 현대사회에는 세금제도가 있는데 또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는 것은 교인들에게 이중부담을 주는 것이 아닌가

(1) 땅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십분의 일은 야훼의 것이니 야훼께 바칠 것이니라 소든, 양이든, 모든 짐승의 십분의 일은 야훼께 거룩한 것으로 바쳐야 한다(레위기27:30)

구약성서는 율법과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의 역사와 문학도 이 범주 안에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율법과 예언은 많은 점에서 서로 배치되고 있으나 하늘과 그 아래 모든 것, 땅과 그 위의 모든 것은 하나님 의 것(시편24편)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른 비와 늦은 비도 야훼께서 내려 주시며(신명기11장)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도 야훼께서 주신다(호세아2장)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교훈은 십일조란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 을 시인하는 표시로 드리는 봉헌이라는 것이다. '셈'족들 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에서도 시행되던 종교행위였다.

 사람들은 십일조는 농경문명시대의 유물이지,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 어떻게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고 항변한다. 모세의 율법이 제정되던 시대에는 제1차산업(농경,축산업)시대여서 그렇게 표현했 을 뿐이지 본래의 정신은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 표시로 십분의 일을 드렸던 것임을 알아야 한다.

 (2) 살렘 왕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하늘과 땅을 만드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여, 아브람에게 복을 내리소서. 그대의 원수를 그대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찬양드리어라(창세기14:17)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즉시 자기 소유의 십분의 일을 그에 게 드렸다.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표시로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이다. 아브람은 전쟁의 승리로 받은 배상금의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운 결과의 십분의 일을 바쳤다.

 신약성서의 진리는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가 어찌 감사하며 찬양하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아까워하며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여러 갑절의 상을 받을 것이며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누가복음18:29)

시인 오우덴(Auden)은 거울을 보라. 모든 것은 은총이니라고 말하였 다. 다윗의 노래 속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엿보게 된다.

야훼, 우리 주여!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나님 다음 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 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시편8:3)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왕 가운데서도 위대한 왕이었다. 그러면 서도 인생을 하나님의 은총의 존재로 여겼다. 결코 자신의 위대한 능력과 지혜를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하였다.

이 시가 다윗의 이름으로 쓴 시이든지, 다윗 자신의 시든지 그것이 큰 문제 가 되지 않는다. 오직 다윗의 일생이 그와 같은 신앙으로 엮어진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인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 축복을 감사하며 찬양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도리가 아닐까 그 감사와 찬양이 제물로 승화될 때 은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그 밖의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바치면서 정의 를 행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구나.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고 이것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는 가 (누가복음11:42)

십일조는 하나님 사랑의 실천을 뜻하는 것이다. 사회정의의 실천을 뜻 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십일조는 모든 율법의 클라이막스이다. 십일조 는 결코 물질적인 계산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정의구현이라는 복음적 인 생활의 표현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게 된 것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화석화된 율법 주의를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십일조란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희생제사요 이웃사랑의 실천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십일조가 걸림돌이 될 수 있을까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정의의 실천을 의미한다. 정의의 구현을 위해 십분의 일을 봉헌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의무요 영광이 아닐까

심리학자 제임스(W.James)는 우리와 하나님은 함께 일하신다. 그 일 속에서 우리의 최고운명이 성취된다고 말하였다. 꼬리가 되는 인생이 아니 라 머리가 되는 인생이다. 노예가 되는 인생이 아니라 자유인이 되는 인 생이다. 사랑과 정의의 실천은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일하는 최고 최선의 영역이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일하는 최고,최선의 영역에 동참 하는 표시이다.

 미국의 경제우선순위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의 130 개의 생 활필수품 제조회사들 가운데 사회적 기여도가 가장 높은 1등급 회사는 콜게 잇, 제너랄 제분회사, 켈로그사등으로 판명되었다. 작업환경, 국민의 건 강, 근로자의 노임, 사회봉사등을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다. 콜게잇회사는 식용유와 화장품으로 유명하고, 제너랄 제분회사는 밀가루와 요구르트제품 으로 유명하고 켈로그회사는 옥수수제품으로 유명하다. 콜게잇회사의 사주 윌리암 콜게잇은 18세때부터 십일조신앙으로 살아왔으며, 제너랄 제분회사 의 사주는 주일학교 봉사자로 살아왔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과 정의 실천 의 기수로서 사회에 공헌하였다.

 신학자 발도 비취(V.Beach)는 사람은 삼차원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고 하였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재물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는 길은 예배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 갖는 길은 사랑이다. 그리고 재물과의 관계를 바로 유지하는 길은 잘 쓰는 것이다.

 그런데 재물을 누구를 위해,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언제나 문제가 된다. 누가복음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재물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 을 위해 써야 한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 재물을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쓰려다가 망한 사례에 속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19장의 삭개 오의 경우, 가난한 이웃을 위해 씀으로써 구원받은 사례에 속한다. 누가 복음 16장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경우, 자신만을 위해 쓰다가 지옥의 형 벌을 받는 사례에 속하고 누가복음 7장의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예수님을 위해 씀으로써 그 많은 죄가 사함을 받은 사례에 속한다.

 예수는 말씀했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히거 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 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희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마태복음6:19-21)

사람들은 이 말씀이 진리인 줄을 안다. 그러나 이 진리를 거스리고 있 다. 믿음이 없어서이다. 확신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재물을 쓴다. 이 세상의 권세가 악한 줄을 알면서도 수십억원씩 기부금을 바치지만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는 1억원도 바치지 못한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다는데는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재물을 쓰는데는 거부 아니면 인색해진 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십일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십일조는 영원히 무거운 멍에가 되고 걸림돌이 된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사요 이 땅에 정의를 구현하는 행위가 된다 는 믿음을 전제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 자기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불의한 사회가 아닌 정의사회이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그것 은 마음의 소원일 뿐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오 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지금 우리들은 이 기도의 실천을 결단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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