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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환기의 책임 (삿 0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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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역사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가장 큰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를 통해 아무 것도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역설이지만 사실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과 거의 실패를 오늘의 역사에서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고등학생이 성적이 좋지 못해 그 아버지가 학교에 불려왔습니 다. 국사를 가르치는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하던 이 학생의 아버 지가 선생님께 아들 녀석의 국사 성적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 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반문하기를 『아버님께서는 과거 학교 다 닐 때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하셨는지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저야 뭐 형편 없었습니다라고 계면쩍은 듯 대답했습니다. 이때 선생님이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 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시대도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이 전환기의 책임을 위해 사사기에 나타난 한 사건을 같이 생각해 봅시다.

다음 세대의 비극 ^ 사사기 2장은 역사의 전환기에 일어났던 비극에 대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 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 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그러나 10절 말씀을 보면 전환기에 중대한 변화가, 예기치 못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 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 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인도하심을 힘입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위대한 과제를 성취했던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한 나라를 잃는 데 못지않게 큰 비극입 니다. 후세대(後世代)에게 신앙을 물려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중대한 비극입니다. 신앙을 잃는 것은 한 나라 정도 가 아니라 영원한 기업을, 영원한 나라를 상실하는 비극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는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 합니다.

첫째, 이 새로운 세대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상실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 새로운 세대는 하나님께 대한 영적인 무관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 말씀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들의 아버지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입니다.

또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성전 안에 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계속 들었습니다. 성전 의 모든 종교 의식에 열심히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 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지적(知的)으로 하 나님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 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새롭게 일어나는 한 세대의 비극이었습니다. 바울의 경고처 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우리 에게 주는 중대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우리 뒤에 일어나는 새로운 세대는 영적인 무관심의 세대 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불신앙의 시대를 만들어 갈지 모릅 니다.

그들은 여전히 교회에 출석하는 일을 계속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한동안 발걸음을 그치지 않고 종교적인 자리에 계속 찾아올지도 모 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안심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모양만 가지고는 그들의 마음에 진정 하나님 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두려 워해야 할 일입니다. 다음 세대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비극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의 등장이 전환기 의 비극입니다.

이 비극은 어디에 기인한 것이겠습니까? 본문을 유심히 읽어 보십 시오. 6-10절 말씀에서 두 가지 원인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현실 안주 의식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더 이상의 모험과 더 이상의 희생 을 감내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며 이만 하면 되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에 젖습니다.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 베섹을 정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 니다. 그들은 전환기에 용감하게 전진하여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그러했던 백성들 사이에서 전투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일어났습 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와서 이만큼 정복했으면 됐지, 더 이상 피 흘릴 필요가 있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즐기며 살자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을 거부하고, 더 이상의 노동 을 거부하고, 더 이상의 땀 흘림을 거부하고, 더 이상의 모험을 거부하는 이런 현실 안주 의식이 새로운 세대 사이에 서서히 등 장하였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병들어 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사 시대의 비극을 초래한 원인입니다.

비극의 서막은 바로 현실 안주 의식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다음 세대, 2세대들은 1세대들이 갖고 있던 도전과 기백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이민 1세대들이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문화에 부딪쳐서도 삶을 잘 가꾸어 나가는 반면, 2세대들은 부모 들이 닦아 놓은 터에서 자기들의 삶을 즐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 민 1세대들은 나름대로의 꿈을 일구기 위해 땀 흘리며 새로운 역 사에 도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에서 이 기백과 비전과 새로운 삶에 대한 의욕이 서서히 감퇴합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 아가 그들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들은 꿈이 없습니다. 높은 이상도 없고 새로운 가치에 대한 도전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가 슴 설레이게 하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한 흥분된 기대도 없습니다.

적당히 살다가 적당히 즐기고 죽으면 그만이라는 현실 안주 의식 이 2세대들의 문제 있는 생활 태도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자세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끕니다. 개구리 한 마 리를 냄비에 넣고 서서히 열을 가하면 개구리는 아주 편안하게, 기분 좋게 죽어 갑니다. 현실에 만족하는 개구리는 물이 뜨거워져 서 자기가 죽어 가는 줄도 모릅니다. 밖으로 뛰쳐나와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편안한 환경은 우리의 의식을 마 비시킵니다. 꿈을 잃어버리고 도전을 상실한 세대는 죽음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것입니다(미국에서 출판된 조지 바나의 『주전자 속의 개구리』에서 인용).

둘째/신앙 체험의 상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비극을 맞는 또다른 원인은 신앙 체 험이 없는 것입니다. 1세대의 신앙 경험이 7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이 세대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 우신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역경을 거쳤습니다. 그들 은 많은 고난과 시련을 통과했습니다. 이 시련 가운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이 아니면 살 길이 없습니다라고 간구했습니 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면서 역경 속에서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1세대의 신앙 체험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새로운 세대는 하나님을 보는 눈, 하나님 의 음성을 듣는 귀를 점점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보는 것은 현실밖에 없습니다. 이 새로운 세대는 신앙의 실제성(rea lity)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형식주의에 빠져 듭니다.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교회 출석은 열심 히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은 더 이상 그들의 삶에 능력을 주지 못합니다. 신앙은 그들에게 생명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들에 게 능력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들에게 가치가 아닙니다. 신앙은 그들의 소망이 아닙니다. 신앙 체험의 상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세상과의 타협과 불순종의 범죄를 초래합니다. 현실 안주 의식에 빠져 있고 신앙 체험을 상실한 이 세대에게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본문 2절 말씀에 하나님의 탄식 소리가 들립니다.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 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새로운 세대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비극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극의 해결

이 비극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예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다음 세대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 을 떠나가고, 의미 없는 삶에 만족하며 사는 비극을 맞지 않게 하려면 다음 네 가지 사항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회개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1세대가 회개해야 합니다. 2세대의 회개 가 아닙니다. 부모 세대가 자녀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 것을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며 최대 가치인 신앙을 적극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하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실패를 하나님 앞에 자복해야 합니다 . 내가 교회에 나오니까 그것만으로 우리 자녀들은 잘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너무 안이한 태도입니다. 적극적으로 다음 세대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르치고, 하 나님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당신은 자녀를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정열을 쏟았습니까? 자녀를 믿음으 로 기르는 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새로운 세대에게도 회개를 가 르쳐야만 합니다. 자녀들이 불순종의 죄를 회개하고 현실 안주의 죄를 회개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도전이 없는 삶에 적응하다 보면 새로운 꿈을 꾸지 못합니 다. 그리고 서서히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 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의 범죄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우리는 영적으로 눈멀어 있고, 가난하고 앙상하게 매말라 있으면서 도 우리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수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세대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해야 합 니다.

하나님은 전환기의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고 한 장소로 이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그 장소는 바로 보김입니다. 사사기 2장 4,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 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보김』은 우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안타 까움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의 영적인 헐벗음과 가난,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지 못했던 무책임한 모습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채찍과 하나님의 심판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도우 심을 바라면서 주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금 우리도 보김에서 우리 죄를, 다음 세대를 신앙으로 키우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우리들의 모습을 회개해야겠습니다.

둘째/도전 우리는 다음 세대가 세속 문화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 다. 당시의 가나안 문화는 우상 문화였습니다. 성(性)의 문화, 쾌락의 문화였습니다. 불신앙의 문화였습니다. 우리 후세대를 둘 러싸고 그들을 죄짓게 만들고 있는 병든 문화에서 그들이 담대하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에 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의 교훈을 가 르쳐야 합니다. 자녀들이 병든 문화의 물결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 다. 돈보다 위대한 신앙을 가르쳐서 우리 자신이 돈에서 해방된 자유인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삶의 진정한 가치, 진정한 의미, 진정한 목적,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추구하는 우리들 의 모습을 통해 자녀들에게 도전할 수 있기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 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 별하도록 하라(롬 12:2).

셋째/비전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꿈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이 광야를 여행할 때 광야에서 수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도 지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한 비전 때문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마자 주저앉아 버리 고 말았습니다. 더 높은 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 그보다 더 높은 꿈이 없었습니다.

꿈이 없으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집 한 채 사는 것이 목표인 사람은 집 한 채 사는 것으로 끝장입니다. 더 높 은 꿈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꿈을 키울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지구촌 곳곳에 복음을 전하여 말씀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진리를 가르치는 위대한 꿈을 자녀들에게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보다 위대한 꿈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우리 다음 세대는 병들 수밖에 없 습니다.

넷째/희생 희생 없이는 비전이 성취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희생하지 않고 위대한 꿈을 이룬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우리는 자 녀들에게 희생의 가치를 가르쳐야 합니다. 안이하게 키우지 마십시 오. 우리 자녀들은 그들이 맞닥뜨리는 환경에서 희생이 얼마나 중 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을 조금만 눈여겨보아도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이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굶주림과 고통 속 에 살고 있는 세계 곳곳의 난민들을 보게 하십시오. 우리 자녀들 의 삶이 너무 안이함을 깨우쳐 주십시오. 그리하여 더 위대한 가 치를 위해서, 더 위대한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인식하게 하 십시오. 자기를 희생할 줄 모르면 우리 다음 세대는 사사 시대의 비극처럼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여 자녀의 비극적인 삶을 막아 주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가 됩시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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