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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욘 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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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하나님의 사람 요나가 하나님의 선교 명령을 받고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도망하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이 어려움이 자기 때문이라고 고백함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까지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서원까지 하는 부흥이 일어난 사실을 보았습니다.
제비 뽑힌 요나는 책임을 지고 바다에 던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고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3일 3야를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나서 2장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요나서 2장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께 기도하여”로 시작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등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기를 시작했습니다. 요나의 얼굴은 하나님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가까이하시는데, 내가 오히려 도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에게 기대를 가지시고 그의 일을 맡기셨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해야 할 일,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은 오늘 나를 위해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물고기는 내 가정의 풍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내가 당하는 육체적인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물고기는 내 자녀들이 당하는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배워야 할 교훈을 알게 하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 2절을 보세요.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요나는 그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생로병사의 인생사고(人生四苦)란 말이 있습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무명한 사람이나 유명한 사람의 구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때는 특별한 고난의 날이 있습니다. 욥은 본래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고난의 날이 왔습니다. 요셉도 본래는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
하게 자라나던 중 뜻밖에 고난의 날이 그의 앞에 임했던 것입니다.
이 고난의 날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닥칩니다. 그러기에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슬픈 일도 그렇고, 실패도 그렇고, 질병도 그렇게 예고 없이 우리 앞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를 볼 때에도 꼭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가서 바로에게 핍박을 받을 때에도 고난의 날은 예고가 없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70년 간 포로생활하던 그때야말로 역시 민족적인 고난의 나라이었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의 역사 속에서도 고난의 날이 종종 있었습니다. 고구려 때, 수 양제가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 오던 때는 민족의 고난의 날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가 침략해 오던 때,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때가 고난의 날이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36년 간이란 긴 세월동안 일본의 압박을 받았고, 해방은 되었지만 38선이 생겼고, 공산당이 북한을 침략했고, 6.25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그 후에도 우리 남한에 거듭되는 혁명과 불안한 정국, 이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을 고난의 날로 몰고 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난의 날에 우리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불평이나 원망하지 말고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지 말 것입니다.
그러면 고난의 날에 어떻게 할 것입니까
시편 50편 15절에 보면 “고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요나는 그가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불러 아뢰었다고 했습니다. ‘부른다’고 하는 말은 ‘찾으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큰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성 프랜시스도 중한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유명한 과학자요, 위대한 종교가였던 파스칼 같은 이도 중상을 입고 병상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하나님을 찾았고, 마침내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 로욜라의 생활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요나가 탄 배에 큰 풍랑이 일어날 때, 그 배의 선장이 배 밑창에서 잠자고 있는 요나에게 와서 “잠자는 자여, 어찜이뇨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재촉했습니다.
고난의 날에 나나님을 부르고 찾아야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고난의 날이야말로 하나님을 찾고 또 만날 때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습니다.
고난의 날에 낙심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반항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부르고 하나님만을 찾아 만나는 가운데 살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불러 아뢴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가, 다니엘이, 에스겔이, 고난의 날에 그 민족과 더불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고난의 날에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형제도,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 증거입니다.
보통 때도 그렇지마는 고난의 날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고난의 날에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구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고난의 날에 기도할 때, 죄를 회개하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는 “여호와의 팔이 짧아서 능치못한 것이 아니요 그가 귀가 둔해서 너희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죄가 하나님과 너희 사이를 막아서 너희의 기도가 상달하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기도할 때에도 자기의 죄와 열조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누구든지 고난의 나라에 기도할 때, 자기의 죄를 살펴서 그 죄를 자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드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도 요나 선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대방향으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고,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받은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 (그러니까 음부, 지옥이란 말입니다.)에서 부르짓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8장에서 하신 말씀처럼 불쌍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가서 계속해서 구하고 또 구할 때 불의한 재판관도 마지막에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하시면서,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택한자들이 간절히 계속해서 기도할 때에 이루어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셔씁니다.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우리 민족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이 무지와 혼란 가운데서 구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하리오마는 오늘과 같은 고난의 때을 당해서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간절히 불러 아뢰고 부르짖어야겠습니다.
부르짖으면,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은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길을 떠날 때 지중해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열나흘 동안 해와 달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험악한 날씨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네가 정녕히 가이사 앞에 설 것이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네 손에 맡긴다”하셨습니다.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사무엘이 미스바의 청년 사사로서 자기 백성을 인도할 때, 블레셋 사람이 침입해 왔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놀라고 무서워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무엘은 어린 양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며 죄를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큰 폭풍우가 일어나게 하셔서 블레셋 사람의 대오가 혼란하게 되었고, 이 기회를 타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아가 습격할 때, 블레셋 사람들이 쫓겨서 멀리 변경 밖으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변경 밖에다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날에 구하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일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불란서가 독일 나치스 군대에게 패해 버리고, 영국에서 도와주려고 건너갔던 30만 대군이 자기들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영국으로 다시 건너오려고 했습니다. 그 때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도망가는 영국 군인들을 아주 전멸시켜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영국왕 죠지 6세가 온 영국에 “어떻게 하든지 영국 군대를 건져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전 국민에게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날 독일군 편에는 큰 폭풍우가 일어서 비행기가 한 대도 뜰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비가 많이 와서 탱크 한 대도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 편에는 이상할 정도로 도버 해협이 잔잔하고 고요하고 거울같이 맑아서 수천의 배가 30만의 영국 군대를 무사히 영국까지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온 영국 국민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날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믿는 사람도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여기 ‘세상을 이기었다’고 한 말의 ‘세상’은 고난을 의미합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렌트 기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렌트는 어떤 기간입니까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기간입니다. 주님께서도 고난을 당하셨는데, 우리라고 해서 고난을 당하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으레 고난을 당할 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신앙적인 태도입니까
욥은 고난의 날에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할 때 이유를 알 수 없으므로 “오! 하나님이시여”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와서 눈물로써 부르짖은 것입니다. 캄캄한 고난의 밤에 위를 바라보면서 소망의 별을 찾으려고 힘쓴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의 밤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와서 이 사정을 고하며 이 고난의 밤을 바로 맞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성경에 말
씀했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날에 이 약속을 붙들고 이 고난의 날이 잘 지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내가 고아와 같이 너희를 그냥 두지 아니하고 장차 보혜사를 보내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하여 너희에게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대로 보혜사 성령을 내게 충만히 주시기를 기도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옛날 하나님의 사람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 세 사람이 멀리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서 우상 숭배를 거절한 때문에 보통 때보다 7배나 뜨겁게 한 풀무에 던짐을 받게 되었습니다.
던지기는 세 사람을 던졌는데 네 사람이 풀무 속에 있었습니다. 그 한 분은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이렇게 옛날에도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과 같이 계셔서 힘을 주시고 그들을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풀무같은 고난의 구덩이에 있는 나를 버리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 저와 함께 계셔서 승리하게 해주세요.” 라고 간절히 부르짖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의 날은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요. 고난의 날은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시는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주시려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큰 고난이 미치는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무리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뜻을 들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고난의 폭풍우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싫어해서 그 반대로 다시스에 가는 배의 선가를 지불하고 도망하는 때에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풍랑을 통해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는 길을 돌려라. 네가 가는 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탕자가 자기 아버지를 떠나서 멀리 외국에 가서 허랑 방탕하며 죄악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궁핍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네 아버지께로 돌아가라. 왜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느냐 네 아버지께로 돌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처 다 알지 못하는 어떤 선한 목적때문에 이 고난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쳐다보게 하기위해서 어떤 때는 반듯하게 눕혀 놓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이것저것 하노라고 분주해서 위를 쳐다볼 사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해서 반듯하게 눕혀 놓으면 자연히 위를 쳐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질병의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실패의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태리에 가면 중세로부터 내려오는 월렌시아 교회라는 유명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를 맨 처음 설립한 분은 피터월터라는 분인데, 이 사람은 젊었을 때 보통 이태리 청년들과 같이 허랑 방탕한 젊은이였습니다. 어느날 저녁 여느 때와 같이 어느 친구 집에 모여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친구 하나가 쓰러져 죽었습니다. 함께 즐기던 이 청년은 그 친구의 비참한 최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다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 세세에 있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끝으로, 고난을 통해서 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이 우리에게 아무리 어렵고 아프다고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요셉을 보세요. 요셉이 형들의 시기 때문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고생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한 고난에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축복이 따랐습니다. 요셉에게 만일 그 고난이 없었다면 그 후의 축복은 물론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고난은 축복이 따른 고난이었습니다. 고난의 배후에는 반드시 목적이 따릅니다.
욥기 23장 10절에 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나의 가는 길을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나를 연단 시킨 후에 내가 정금 같은 인격이 되어서 나올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어떤 분은 “고난이란 모든 덕이 잘 자랄 수 있는 옥토라”고 말했습니다. 온유, 겸손, 성결, 인내, 자비, 관대, 용기같은 덕은 고난의 밭, 눈물의 밭에서 자라나는 꽃입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축복이 따른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축복을 받는 길은 신앙의 태도로 고난을 당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민족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얼마나 큰 고난을 당했습니까 그러나 그 큰 고난은 이 민족에게 매우 귀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민족의식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애국심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같은 인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애굽을 박차고 광야로 나오게 되고 마지막에는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만일에 고센 땅에서 만족하고 살았다면 애굽 사람에게 다 동화되고 이스라엘 민족을 땅에서 찾아보기 아주 어렵게 되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보면 그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의 사명을 행할 수 있었고 큰 축복이 따른 것입니다.
요나는 일시 하나님을 거절했지만 요나는 역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고난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이미 응답하신 하나님을 확신했습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다”고 했습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받았고, 고난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고난을 통해 주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994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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