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화근 3, 아스돗 (수 11:21-23)

첨부 1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사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한다. 왜 우리가 저들 이방인에게 졌을까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언약궤를 생각했다. 그 언약궤만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중에 들어올 때에 이스라엘은 사기가 충천했고, 블레셋은 두려워 떨었다. 그런데 다시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삼상 4:10)”
그날에는 삼만명이 죽었다. 알렉산더가 동방을 정복하러 출정할 때에 동원된 숫자가 삼만 오천이었다. 대단히 많은 숫자가 죽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병사만 죽은 것이 아니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법궤까지 빼앗겼다. 법궤를 빼앗긴 장소는 에벤에셀이었고 이 법궤는 여호수아가 정복하지 않았던 땅 아스돗으로 옮겨갔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삼상 5:1-2)”
이 사건을 인하여 이스라엘은 기가 죽었다. 여호와의 안약궤를 빼앗기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전투가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패배로 기록되고 우리에게 중요한 멧세지가 되는지를 오늘 살펴보고자 한다.
5:1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서 언약궤를 빼앗겼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는 우리가 언약궤를 지켰고 또 하나님이 지켜 주셨다.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이 시점까지 도운 것으로 미래가 약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을 이 본문만큼 멋있게 설명하는 부분은 없을 것이다. 어제의 승리와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 것이 신앙 생활의 싸움이다. 하나님이 도와오신 이곳에서부터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겨 적군의 수중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치욕스럽게도 다곤의 신전에 바쳐지는 불상사가 생겨나는 싸움이 아스돗의 싸움이다. 또 아스돗이라는 이름은 재미있게도 ‘요새’라는 뜻이다. 적군의 요새가 이스라엘 군의 최강의 힘을 가지고도 파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게 된다.
에벤에셀에서부터 빼앗긴 언약궤, 그래서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땅에 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곤보다 못해서 이 전쟁에 실패한 것이 아님을 5장에 기록하고 있다. 다곤의 신전에 여호와의 언약궤를 넣어 놓았더니 다음날 다곤의 팔 다리가 잘려서 몸뚱아리만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있는 것을 블레셋 사람들이 발견한다. 게다가 온역이 일어나고 많은 재앙이 생겨서 결국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려보내고 만다. 그러면 이 에벤에셀 싸움에서 그 싸움의 승패는 다곤이 여호와보다 커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돌보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를 얻지 못할만한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어제 당신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승리하였는가 그건 어제의 일이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은 놀아도 될 것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제의 승리는 어제고 오늘은 새날이다. 오늘은 오늘로써 하나님 앞에 싸워야할 신자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어제 승리한 것으로 오늘 하루는 놀자고 우기지 말라. 그 싸움을 가리켜 에벤에셀 싸움이라고 한다. 여기까지 도우신 것으로, 어제까지 도와 주신 것으로 오늘과 내일을 대체하지 말라. 어제까지 도움 받은 것으로 말미암아 오늘과 내일의 승리를 위한 원리를 배워야 한다. 어떻게 했을 때 내가 신앙 생활의 승리를 취득했었는가를 과거의 경험 속에서 승리한 것을 오늘 붙여놓고 앉아 있지 말라는 말씀이 에벤에셀 전투이다. 오늘 이 에벤에셀 전투에서 나타난 하나님 언약궤의 상징성이다. 신앙 생활이란 결과적으로 내가 살아야 할 싸움이지 무엇으로 대체할 싸움이 아니다. 언약궤를 갖다 놓을 싸움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할 싸움일 뿐이다. 신자의 생활은 종교화와 신앙의 형태화의 싸움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선 오늘 걸어야 하는 싸움이 있을 뿐이다.
목표라는 것은 언제나 시각을 직선으로 놓고 보는 법이다. 그러나 거기에 도달하는 데는 현실이라는 감각이 필요하다. 현실이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눈에 보이게 펼쳐낼 수 있는 복된 무대이다. 그것이 왜 타협의 조건이 되는가 오늘 우리의 싸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이란 결단코 타협의 요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 있다. 막힌 담이 있으면 돌아서 가거나 넘어가야 한다. 막히면 돌아가고, 더 크게 막히면 넘어가는 집요한 물의 성질같이 흐르고 흘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끊임없는 전진을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거기에 부딪치는 어떤 방해물도 기어이 뚫어가고 돌아가고 넘어서 가고 싶은 곳에 가고야 마는 현장의 모습들을 현실이라고 한다. 이 현실의 모습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대표적으로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행복이라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대이다. 이 무대의 조건이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대이다. 이 무대의 조건이 우리에게 성공이란 세상적으로 큰 힘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앞에 유혹의 모습으로, 타협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요구를 받는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요구된다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을 하지 말자” 이것을 우리가 순교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이것을 순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를 잘 못믿는 한이 있어도 애를 일류대학에 보내야겠다” “예수를 잘 못믿는 한이 있어도 일단 결혼을 해야겠다”고 말한다. 강도가 들어 “목숨과 돈 중 어떤 것을 내놓겠느냐”했을 때 목숨을 내놓겠다고 한다. 목숨보다 돈이 귀한 사회가 되었다.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이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대치하고 있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에벤에셀 전투에서 그들의 신앙의 싸움을 대치했다는 것이 그들이 실패한 이유이다. 즉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고,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전투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 여러분의 과거가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를 게으르게 하는 요소가 되어 있다면 이것만큼 경계해야 될 무서운 것은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0-14)”
신자란 그의 과거가 오늘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다. 지나온 내 과거들이 오늘의 전쟁과 내일의 전쟁에 중요한 원리와 경험들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남아있는 내 생애는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가 점점 더 굳어지고 점점 더 확실해지는 사람들의 집단이 교회여야 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1)”
이스라엘 백성의 기록은 그 역사는 이 기록과 똑같다. 수많은 기적의 과거를 갖고 있는데도 늘 넘어지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 어떤 기적의 경험이 있을지라도 ‘지금은 언제나 지금’이라고 말한다. 지금 하나님 편을 들지 않으면 언제나 얻어 터진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여러분이 과거에 아무리 큰 기적을 갖고 있어도 이스라엘 만큼은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2000년 동안을 세계 민족 앞에 괄시와 천대를 받으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그 엄청난 구약의 축복된 기적의 역사를 가졌었는데도 하나님이 절대로 긍휼히 여기시지 않고 쫓아 보내셨다. 오늘은 오늘의 싸움이다. 내일은 또 내일의 싸움이다. 어제만 꿈꾸고 있지 말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지나온 어제로 오늘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늘은 승리해야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오늘 공부해야 할 일이 있고, 오늘 예습할 일이 있고, 오늘 숙제할 일이 있다. ‘내가 건너야 할 부분에서 갖고 올 신앙의 어떤 형태가 있기보다는 내 마음에서 뽑아버릴 것이 우선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이다.
오늘 여기 이자리까지 온 것 대단히 잘한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여기에다 말뚝을 박아놓아서는 안된다. 늘 밀고 나가야 한다. 여기까지가 ‘늘 내가 서 있는 자리까지만’ 이기를 권하고 싶다. ‘여기까지’라는 여기가 과거여서는 안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언제나 에벤에셀이어야 한다. 그 싸움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실은 그것을 증명해 내는 무대로써 필요하다. 하나님을 믿고 이 길을 간 사람중에 슬픔과 아우성 속에 눈을 감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 ‘터진’ 사람 중에는 우리의 귀청을 따갑게 하는 아우성을 친 사람이 성경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제는 여러분 개인이 판단할 문제이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하서 하나님이 놔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다음에 여러분의 만수무강을 위해서 알아서 결단을 해야 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