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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세의 성도의 생활 (벧전 0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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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우리는 말세의 징조들인 지진과 화산 그리고 가뭄과 홍수 등의 천재지변, 전쟁과 기근, 적 그리스도들의 출현을 비롯한 이단들의 발흥,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이 성해지는 현상, 가정의 붕괴, 도덕적 타락 등을 너무나 많이 듣고 보고 있습니다. 이 말세 곧 예수님이 출현하신 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시대의 징조는 어디까지나 말세의 징조이지, 아직 종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신 이후 꽤 많은 세월이 흘렀고, 이 시대의 모든 불행스런 현상은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 심판이 따르는 종말에 대한 의식이 없이 죄악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병적 집착으로 인해 현실 생활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우리의 생활은 자신은 물론, 남들에 대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개인 생활

앞서 최후 심판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임박한 종말 사상에 있어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죽음이 임박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떠올릴 때마다 보다 더 먼저 우리 자신의 죽음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알 수 없다는 임박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우리를 부르시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세에 사는 우리는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는 소프로네사테(σωφρονσατε)로서, ‘술 취하지 않다’, ‘정신을 맑게 하다’, ‘자제심을 갖다’, ‘냉정하다’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세상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 한동안은 그러한 죄악 생활에 대해 심한 역겨움과 거부감을 느끼지만, 자주 보고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고, 나중에는 알게 모르게 그러한 죄악 생활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7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세에 사는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음으로, 근신해야만 합니다. “근신하여”는 네파테 어떻게 부활되나
(νψατε)로서, ‘취하지 않도록 술을 삼가다’, ‘영적으로 조용하고 침착하다’, 말세의 성도의 생활
‘절제하다’, ‘자제하다’, ‘냉철하다’, ‘신중하다’, ‘진지하다’ 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아닌 다른 교리나 사상 등에 취하지 않도록 늘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5:8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농촌 교회에서 시무하던 여 전도사가 격무로 피곤했던지 단잠을 자다가 일어나 교회에 가면서도 졸았습니다. 벌써 성전에는 많은 성도들이 나와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찬송가 00장을 부르겠습니다.” 하고는 함께 부른 다음에, 자기가 기거하는 집주인인 한 집사님에게 대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대표 기도를 길게 하는 바람에 강단 의자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전도사님이 그만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를 잤던지 깨 보니까 성전에는 아무도 없고 찬란한 아침 햇살만 들어차 있었다고 합니다.
말세에 사는 우리는 늘 기도해야만 합니다. “기도하라”는 프로슈카스(προσευχ)로서, 피조물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모든 태도와 말과 행동을 포괄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세에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으시고, 근신하시고, 쉬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사회 생활

말세에 성도들의 개인적 생활에 대해 가르친 베드로는, 이어서 성도들의 사회 생활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입니다. 여기의 사랑은 인간들 사이에 주고받는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신적인 사랑 곧 아가페(γπη)입니다. 성경은 인간에게는 참 사랑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냉정하게 고찰해 보면, 인간의 사랑에는 본능적인 이기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인간적 사랑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받은 구원의 사랑을 비롯하여 우리가 받는 모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놀랍게도 그 주님 안에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효능이 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때에,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경험해서 아는 바와 같이, 사람이란 일방적으로 대접하고 또 대접하는데도, 계속 대접받는 사람에게서 대접을 받지 못하면 속상하게 되고, 마침내 원망스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생각을 하면, 원망 없이 계속 대접할 수가 있습니다.
허다한 죄인들을 구속해 주시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2:4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대표적인 은사들인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각자가 받은 은사를 가지고, 그 은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하라고 한 베드로는 두 가지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말하려면”은 랄레이(λαλε)로서, 사적인 대화나 논의 또는 방언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복음 전파자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교사들이 설교나 교육 등의 직무를 수행하느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성경을 가르치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하나님 말씀인 것처럼 가르치는 일입니다. 불행히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해야 할 이들 중에는 자신의 뜻이나 생각 또는 경험 등을 선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사상 등을 뒤섞은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실상 교회의 많은 문제들의 주된 원인은 강단의 오염입니다. 에스겔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겔 13:3)라고 하였고, 바울 사도는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라고 했습니다.
둘째,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봉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고 봉사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에 말씀대로 하고, 봉사할 때에 하나님께 받은 힘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으로 인해 권능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4. 맺음말

세계 도처에 말세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월이 종말을 향해 흘러가면 갈수록 끔찍한 재앙들이 더욱 많이 발생할 것이고, 사랑이 식어지고 불법이 성해지는 현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죄악들이 저지러질 것입니다. 이 말세의 때에, 우리 모두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시고;또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서로 대접하고, 받은 은사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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