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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가 많다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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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many”

막5:1-20

 

지난주일 저녁부터 목요일 새벽까지 저는 인천에 있는 애광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감리교 본부출판국에서 근무하던 제 친구가 십 수 년 만에 목회를 하러 나갔기에 겸사겸사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인천에서 모텔이 가장 많이 밀집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숙소는 교회에서 2차선 도로 건너 건너편에 있는 호텔 같은 모텔이었습니다. 길바닥에는 명함크기의 반나체 사진이 찍힌 전단지가 눈 덮인 것처럼 쌓여 있는 그런 동네였습니다. 그런데도 누구하나(청소부조차)길바닥을 어지럽히는 전단지를 청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청소가 불가능한 그런 상태였습니다. 까만 오토바이를 탄 5-6명의 젊은이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비행기처럼 모텔 앞에 전단지를 날려댔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그러는 거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청소를 하겠습니까?

 

집회 인도를 하는 틈틈이 걷는 일을 계속했기 때문에 근 한 주일 동안 반나체의 여자들을 밟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설교를 하려는 궁리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에 악이란 뭔가?’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고, 농경문화에 살던 때에는 ‘악’을 규정하는 일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과연 무엇이 악인지 또는 무엇이 선인지 구분할 수 없는, 구분을 포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인간 삶의 내적 규율과도 같았던 ‘악’이란 말은 현재 실종 상태에 있습니다. 누구도 이 말을 쓰는 이 없고, 누구하나 악에 대한 생각을 하며 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악’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과연 무엇을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겠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십시오.’하는 대목에서 ‘악’은 어느 시대건, 어느 환경에서건 존재한다는 암시를 제공합니다. ‘악’이란 말은 예수 당시 일반 백성들이 메시아에게 기대하는 바이고, 메시아를 향한 염원의 최종 완결판입니다. 예수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주기도문의 마지막을 ‘우리를 악에서 구해 달라’는 간곡한 기도로 끝을 냅니다. 악의 문제는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악은 무엇이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악은 본래 존재하는 걸까요 아니면 만들어지는 걸까요? 만들어지는 거라면 어떻게 만들어 지는 걸까요?

 

악은, 누군가를 악이라고 지목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호명되는 순간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은 정치적 의도와 음모의 소산인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를 악이라 지목하면서 그것을 공식화 한다는 것은, 우리, 즉 내부를 공고히 하여 하나로 뭉치게 하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지니는 문제(예: 권력의 정당성, 현실정치에서의 실정, 그 밖의 여러 내부 소란들)들을 일거에 소거할 수 있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악은 대부분 정치권력에 의해 창조되고, 권력의 관심 속에서 길러졌으며, 다 크고 나면 권력에 의해 제거 당해야 하는, 혹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계속 있어줘야 하는 불행하고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정치공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악에 대한 범박한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학에서는 말하는 ’악‘은 뭘까요? 존재론적으로 악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합니다. 존재론적으로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악의 현상은 우리는 매일 목도합니다. 그것이 최순실 사건이나, 세월호 사건 같은 거대한 악일 수도 있고, 개개인에게서 소소하게 일어나는 일상적이고도 미시적인 악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든 종교에서 악에 대한 물음은 가장 중요한 화두이고, 마지막으로 남겨진 문제였습니다. 이런 악의 심각성을 알기에 예수는 주기도문 제일 마지막에 악의 문제를 배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악’은 너무나 큰 주제이기에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것을 한 눈에 조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이 악이 존재인가? 비존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답을 했던 사람이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그는 악을 “선의 결핍”으로 규정을 합니다. 우리가 100% 충만한 존재,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듣는 완벽한 존재인데, 시간이 흐르고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으면서 100% 충만함이 깨졌다는 거예요. 이것을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을 통해 설명합니다.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물질이란 일자(一者)의 유출이 끝나는 곳에 위치합니다. 물질은 악의 유통로입니다. 이 말은 악 역시 선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거스틴에게 있어 악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악은 선의 바깥에서 비존재로 위치하는 것입니다. 어둠은 빛의 결핍이고, 추위는 열의 결핍이고, 미움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그렇듯이 악도 선의 결핍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거스틴의 악에 대한 이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에게서 악은 무엇이었을까요? 복음서에 보면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예수의 공생애는 크게 두 가지로 예수의 사역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입니다. 기적은 크게 치유와 축귀로 나누어집니다. 여러분들 기억나는 예수님의 귀신 쫓는 이야기가 뭐가 있습니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거라사의 귀신 들린 사람 축귀 이야기”(막 5장)입니다.

 

귀신들린 사람에 대해 마가복음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 사이에서 사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 없었다. 여러 번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쇠고랑도 부수었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다. 그는 밤낮 무덤 사이나 산 속에서 살면서, 소리를 질러 대고,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곤 하였다.” 이 귀신들린 사람에게 예수가 제일 먼저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네 이름이 무엇이냐?”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엑소시스트들 소재로 한 영화들을 보면, 악령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사람들 뒤에 숨어서 자신을 감춥니다. 악의 생존방식이죠. 자신을 숨기고 다른 사람을 통해 악을 저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밝혀진다는 것, 즉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 자체가 악령의 입장에서는 패배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는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악령은 뜻밖으로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털어놓습니다. “군대입니다. 우리의 수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My name is Legion; for we are many” (5:9)

레기온은 단수한 군인들의 무리가 아니라, 대략 육천여 명의 보병과 칠백여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로마의 군단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이 대목에서 악에 대한 실마리가 나옵니다. 그것은 악령이 말했던 we are many 라는 말에서 분명해 집니다. 많다는 것이 악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수가 많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목사들 만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인 몇 명이야? 몇 명이다.” 라고 말하면, “와 많다. 잘 되었네”, 라고 기뻐합니다. 이건 단순히 목사들의 경우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풍요로움을 갈망하잖아요. 그렇다고 볼 때, 악마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우리가 많기 때문이다”라고 답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이 말은 풍요와 성공과 다산을 갈망하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악이 있다는 말일 수 있고, ‘많음’만을 강조하고 추구하는 전체의 생각이 사탄의 논리 일 수 있고, 나라는 개인 역시 많은(many) 사람 중 하나라고 볼 때, 나 역시 언제든 사탄이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서구 역사에서 악에 대한 담론이 크게 변화되었던 두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중세 말입니다. 십자군 원정과 페스트의 출몰을 겪으면서 죽음의 일상화가 전 유럽을 휩쓸던 시기였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죄악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죄를 고백하는 의식, 즉 고해성사가 본격적으로 교회 안에서 시행되기 시작하던 무렵이 바로 그때입니다.

 

악에 대한 성찰이 발전했던 다른 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후반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홀로코스트 이후입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나찌가 가능했나, 라는 물음이 대두되었습니다. 한나 아렌트 같은 사람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집단(many) 속 개인이 범할 수 있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주목합니다. 집단 속의 개인은, 전체 속의 개인은 자기가 하는 행위에 대한 반성적 고찰을 이루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죠. 멀쩡하던 사람들도 예비군 옷만 입혀 놓으면 돌아이가 됩니다. 미셀 푸코가 “전체는 광기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도적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전체주의와 악에 대한 비극을 노래합니다. 이들 공히 악의 전체성에 주목합니다.

 

악령이 말했던 ‘we are many’는 악의 전체성을 언급할 때 각주로 달리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들의 힘과 목소리가 크고 세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사회를 지배했던 힘과 목소리가 무엇이었는지 한번 회고해 보십시오. 그것은 권위주의, 가부장제, 서열주의, 반공주의, 경제제일주의, 패권주의, 이성애중심주의, 성과주의, 분열주의 등입니다. 이런 목소리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때, 이러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다수가 될 때 악이 작동되고, 반대파를 향한 혐오의 메카니즘이 등장하면서, 그들을 향한 공격이 정당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해주십시오’라는 기도의 숨은 뜻은, 전체주의적인 논리 안에서 그 전체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불이익과 폭력과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가부장제라는 전체주의적인 논리에서 이 땅의 여성들이 남모르게 고통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악입니다. 반공주의라는 전체주의 논리 속에서 누군가를 빨갱이로 지목하면서 아무런 이유 없이 사회적으로 매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악입니다. 무한경쟁, 무한질주, 세계경영의 신자유주의의 모토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우리가 보살피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전체주의를 인정하는 죄인들입니다. 예수는 본인이 했던 주기도문의 마지막에서 이런 악에서 우리를 구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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