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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하나님의 나라를 택하실 건가!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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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나님의 나라를 택하실 건가!

눅15:11-34


지난 주일에 나눈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화해와 우정’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아야 화해할 수 있고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구정이라 몇몇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왔을 거라 생각해서 ‘돌아오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으니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표면적으로 이 비유를 ‘돌아온 탕자’라고 붙여 놔서 그렇지 본시 이 비유는 ‘관용과 자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설 날’의 깊은 뜻과 다르지 않아서 이 본문을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는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지, 누가가 이 비유를 그의 책에 다른 비유들과 함께 편집해 넣을 때 무엇을 독자들에게 기대했었는지를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오죠. 그리고 잃은 양의 비유, 잃었던 동전의 비유와 함께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세 비유는 잃은 양, 잃었던 동전, 잃었던 아들 이렇게 ‘잃었다가 다시 찾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 비유를 한꺼번에 말씀 하신 게 아니라 누가가 그렇게 편집을 한 겁니다.

 

이 비유의 앞에는 죄인들과 세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 가까이 오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눅15:2)라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들의 비난을 듣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들 비유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문맥과 연결지어 본다면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돈’, ‘잃어버린 아들’은 앞의 저들 즉, 죄인들과 세리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비난하는 세리와 죄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에 비난에 대해서 답하시는 것이 이비유인 것이지요.

 

누가는 이 비유를 변한 세상에서 다양해진 공동체의 구성에 대해 정당성을 갖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넘어서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에 따라 기술적으로 배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가 이 예수님의 비유들 세 가지를 일렬로 배열해 놓은 이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애초에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실 때도 그런 의미에서 하신 것인지를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브랜던 스콧이라는 신약성서학자가 제시한 해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잃은 아들이라는 이 비유는 고대에 있었던 형제간의 편애와 경쟁에 관한 이야기 유형에 속해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흥부놀부 이야기가 그런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대개 작은 아들을 편 듭니다. 초등학교 5학 년 때 담임선생님이 원주 분이라 처음으로 원주엘 갔다가 군인극장에서 ‘두 아들’이라는 영화를 본적 있는데, 그것도 오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고대세계에서는 대체적으로 개인보다는 가족이나 집단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재산을 장남에게 물려줍니다. 재화가 한정된 상황에서 가문의 물질적인 토대를 지키기 위해선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영국 사람을 ‘젠틀맨’이라고 하잖아요? 이것도 장남이 아니어서 유산 상속을 받지 못하는 ‘젠트리 계급’에서 유래된 겁니다.

 

이러니 장남이 아니면 그 다음 형제들은 일순간에 거지가 되는 것이죠. 동서양의 형제 이야기가 장자 보다는 차자들에게 더 호의적인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 보상감정으로 둘 째 아들에 관용을 베푸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대 둘 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는 이야기는 불가능한 설정입니다. 실제로 이러한다면 이는 아버지와 가풍에 대한 모독인 셈입니다. 그러니 둘째가 아버지더러 ‘내 재산을 주세요’하는 건 아버지더러 가족의 전통을 무시하고 꺼지라(죽으라)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이제 그만 가족을 해체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고대인들의 시각에서 둘째 아들의 요구는 아버지더러 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에 정확히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 나에게 존재 중에서 내 몫을 주십시오.”

그래서 그는 형제들에게 그의 생명을 나눠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당시 사람들은 ‘저런 후레자식 같으니라고’하면서 분통을 터드렸을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행동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을 겁니다. 우의 구절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생명을 나눠 주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는 아들을 위해 죽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전통과 권위를 죽인 것입니다. 신명기21장에는 ‘ 모는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 되어 있습니다(시락33:20-24). 이것은 가족의 재산이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성서적인 충고도 있고, 전통도 분명했었는데 이 아버지는 그 모든 걸 거부하고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것도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눠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만해도 여러분이 그동안 이 본문에 대해 들었던 지식을 훨씬 상회하고 있지요? 뭔가 반듯한 해석이 나올 거 같지 않습니까? 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제도적으로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그 자식들이 재산을 현금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그걸 돈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 써 버렸다는 것이지요. 레위기11:7에 돼지는 불결함으로 가까이 하지 말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예 돼지를 기릅니다. 어마어마한 배교를 저지른 것입니다. 돼지의 먹이까지 먹었다니 말해 무엇 하겠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이이야기는 당시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들로 설정이 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실현하고 아들이 돌아옵니다. 그 바보 같은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중들은 설마설마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오는 아들을 엄하게 책망할거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당시의 풍습대로라면 그래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시의 풍습과는 반대로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새 옷을 지어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엽니다. 살찐 송아지는 이 잔치가 큰 잔치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일단 고기를 잡으면 상하기 때문에 한 번에 다 먹어야 했습니다. 살찐 송아지를 한 번에 다 먹어야 하는 잔치니 그냥 칼질이나 하는 만찬이 아닙니다. 집안에서 조용히 한 게 아닙니다. 동네가 떠들썩하게 공개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좀 이상하죠?

자기의 목숨, 즉 목숨과 진배없는 전통을 무너뜨리면서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하고, 현금으로 바꿔주고,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꾸짖기는커녕 어머어마하게 환대를 합니다. 아버지는 그 어떤 판단도 하지 않습니다.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돌아온 것, 죽었다가 살아 난 것, 잃었다가 찾은 것입니다. 아들은 죄를 지었지만 자동적으로 요서를 받았습니다. 그 어떤 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걸 보는 큰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듯이 대들며 말합니다. 화를 내면서 동생의 귀향을 축하하는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큰 아들에게 이제 아버지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 아들의 갈등은 여전히 지속됩니다. 안에는 동생의 잔치가 밖에는 형의 분노가 아버지를 추락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이런 화를 자초하는 것일까요?

 

대체로 고대의 형제 이야기는 둘째 아들에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비유는 그런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점이 이 본문의 중심입니다. 작은 아들을 편애하는 다른 이야기와는 달리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두 아들을 다 사랑합니다. 작은 아들도 아버지를 진멸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처신을 경멸하면서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둘 다 패륜입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는 끄덕도 하질 않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의 적대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두 아들과 화해합니다. 아들들을 위해, 그들이 어떤 짓을 해도, 어떤 경우에 없는 말과 행동을 해도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이나 명예, 재산이나 권위를 헌신짝처럼 내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같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수와 형벌의 엄한 아버지의 세계가 아니라, 그지없는 관용과 자비를 베푸는 어머니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큰 아들이 그 이후에 잔치 자리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끝내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요? 아버지가 나이 들어 죽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지금처럼 행동한다면 형제들은 증오하고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아버지의 방식대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따뜻하게 환영하여 향제의 우정을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란 앞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인데,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바보 같은 아버지처럼 서로를 용납하고 관용하는 자비로운 선택’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 하나님 나라는 ‘잘못한 자에게 벌을 주고 잘한 자식에게 상을 주는, 심판하고 보응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바보 같은 아버지처럼 서로를 용납하고 관용하는 자비로운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들어있는 예수님의 의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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