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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대의 고정관념을 물구나무 세우다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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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고정관념을 물구나무 세우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막2:13-17

 

가버나움의 세관에 있던 세리 레위를 부르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레위는 이곳을 통과하는 여행객들에게 관세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치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로마에 직접 내는 직접세가 있었는데 토지세, 인두세, 가옥세가 있었습니다. 간접세금으로 통행세, 항만세, 관세, 시장세등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침략에 저항한 칼가쿠스는 다음과 같이 탄식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로마 식민지 치하 어디에서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영토와 재물은 조공이 되고, 땅의 연간 소출은 곡물세가 되고, 우리의 몸뚱이와 양손은 구타와 모욕을 당하면서 숲과 늪을 길로 만드는데 이용당한다.”

 

로마의 식민지인 유대에서 왕으로 임명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그 지역의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권력이 백성을 수탈하는 방식은 주로 조세제도입니다. 로마는 유대인의 왕을 내세워 이를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헤롯대왕이 죽고 유대는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유대와 사마리아를(400달란트/금8톤)), 안티파스가 갈릴리를(200달란트/금4톤), 빌립이 그 북쪽(100달란트/금2톤)을 맡아서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1달란트는 금 20킬로그램입니다. 하루 노동자의 임금이 1데나리온이고,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일용 노동자가 한 푼도 쓰지 않고 16년 반 정도를 모아야 1달란트를 모을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수치를 나열해 드리는 이유는 당시 유대민중들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을 지냈어야 하는 가를 알려드리는 거고, 이를 수행하는 말단 세리의 처지와 형편도 이해하시라 는 뜻입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관리들은 세금 임차업이라는 걸 통해 로마로부터 부과된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둬들였습니다. 유대지역은 기원전 4세기 전부터 세금임차업을 통해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금 임차업의 원조격이 바로 유대의 분봉왕인 헤롯입니다. 그는 약관 20살에 갈릴리 지방관이 되어서 혁혁한 세금징수성과를 올렸으니까요.

 

만약 오늘날에도 국가가 세금을 직접 거둬들이지 않고 그걸 청부업자에게 임차를 준다면 아마도 깡패들이 도맡아 할 것이고, 그러면 세금을 내야하는 백성들은 엄청난 고통과 절망의 나날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레위입니다. 그는 징세 청부인의 하수인이었습니다. 국가 공무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가 걷어온 돈은 일부 로마로, 일부가 갈릴리 영주의 금고로 들어가고, 그 다음은 청부업자에게 들어갔을 게 아닙니까? 당시 세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유대 주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세리는 율법에서 멀어진 로마인의 앞잡이였습니다. 즉 자기 몸을 더럽히면서 자기 민족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그도 청부업자의 하수인으로 부과된 세금액을 초과하여 거두어 차액으로 다기 주머니를 채우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세리는 사회적, 경제적, 민족적, 도덕적, 율법적으로 증오의 대상이자 부정한 자였습니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레위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세리 레위에게 자기를 따르라고 명령했고, 그가 예수를 따랐다는 겁니다.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인간을 집단이나 부류로 낙인찍고 그 사회적인 낙인에 따라 한 인간을 평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스스로 결단해서 삶의 변화를 이를 수 있는 고유한 개인으로 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세상은 다 그렇게 안 보는데, 예수님처럼 이렇게 한 인간을 오로지 인간으로만 보고 대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유대 사회가 겪는 수탈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그 악랄한 체제의 최전선에 있던 인물을 예수님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엄청난 생각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상을 결코 양보하지 않으면서, 한 개인을 그 선의에 따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레위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과 레위 둘 만이 아니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답니다. 그만큼 레위는 큰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쩌면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처럼 부자였을 것입니다(눅19:2).

 

유대인에게 식사는 두 가지 의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월절 식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의 내력은 아시지요? 기원전 1250년께 이집트를 탈출할 때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집을 통과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현대에도 3월말부터 4월초까지 유월절 식사를 함께 하면서 이집트 탈출을 기억해내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게 유대인들에게 식사가 갖는 하나의 의미고, 다른 하나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 사이에 퍼져있던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종말이 될 때 메시아가 불시에 들이닥쳐 멸망하게 하지 않고 이스라엘 성도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하는 종말론 잔치를 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하는 식사는 하루하루 살기 위해 먹는 양식이 아니라 언제인가 있을 종말의 식사를 미리 경험하는 의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눅22:15-16에 보면 예수님도 수난을 받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 까지 다시는 유월절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게 바로 종말론적 메시아 잔치와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식사란 그냥 밥 먹는 게 아닙니다. 유대인에게 식사는 의례입니다. 이 때문에 바리새처럼 정결을 중시하는 종교 엘리트들에게는 부정한 백성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볼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는 세리와 죄인이 바로 이 부정한 백성들인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도 되지 않을 일을 예수님이 하고 계신 겁니다. 당시 유대인의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유대교 율법과 그 세칙들을 특정 인간, 또는 인간 집단을 부정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십계명에 따라 유대인은 우상숭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은 부정하고, 그들을 섬기는 세리도 부정했습니다. 창녀는 왜 부정한가 하면, 간음을 금지한 십계명을 위반해서입니다. 부정한 자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목자도 죄인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예수가 목자라는 말은 그도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왜 목자가 죄인이냐? 짐승들은 내 땅 남의 땅이 없이 드나듭니다. 그러니 이는 도적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가 죄인입니다. 그러니 죄인이란 직접 죄를 저지른 사람만이 아니라 율법과 고대의 금기를 어긴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사회적인 개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더러 왜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느냐고 하는 건 당시로서는 당연한 질문이며 항의입니다. 사회 윤리였으니까요. 그걸 예수가 어기는 것이니까요.

 

그러자 예수님이 하신 대답은 이겁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이 말은 당시 로마에 널리 알려진 경구입니다. 플루타르코스(46-120) 윤리집에도 나옵니다. 이것만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특이점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하시는 말씀이 가르침의 특질이 잘 드러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이 예수의 행동을 아우르는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은 시대의 고정관념을 물구나무 세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행동 때문에, 또는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조인으로 낙인찍히고 차별받으며 공동식사에서 배제당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죄인인 대상에게 삶의 변화나 전환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죄인에게는 참으로 복음이었으며, 동시에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앞에는 병자 치유에 대한 이야기가 놓여 있습니다. 특히 이 이야기 바로 앞에는 중풍병자 치유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막2:9)고 선언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악인과 의읜의 경계를 무너뜨린 데에는 ‘죄의 용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때 죄는 그가 저지른 행위가 아니라 그를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은 그의 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그러한 부정한 운명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는 의인, 즉 건강한 사람이나 죄인이나 병자와 함께 밥과 삶을 나누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인 세리 레위를 부르고, 그의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하고,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같이 동석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교회역시 부정한 사람들, 이방인들, 죄인들과 함께해야 하는 거죠. 이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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