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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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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막2:23-28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은 비유와 산상설교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는 짧은 말과 그 말에 따른 장면을 만들어내시는 분이셨습니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도 그렇고 오늘 안식일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이 두 장면은 서로 연결해서 이해하셔야 합니다. 오늘 행동은 어디서부터 출발을 하나요? 그렇죠.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이야기 끄트머리에 나오죠.

 

우리는 두 장면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예수님은 그 어떠한 법과 제도 보다는 인간이 우선이라는 정신에 서 있으며(‘사람이 먼저지요’하는 어떤 지도자의 모습이 떠오름), 그중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에 해석의 의미를 둬야 합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도 그렇지만 오늘 이 말도 아주 급진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느 시대건 사회가 정해 놓은 틀 안에서 법과 규율, 또는 기존의 도덕을 따름으로 안전하게 선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정면으로 뒤집기 때문이죠.

 

안식일은 고대 이스라엘 농경사회의 휴식일이었습니다. 신명기5:13-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엿새 동안 힘써 일을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나, 너희 아들이나 딸이나, 남종이나 여종뿐 아니라, 소나 나귀나, 그 밖의 모든 짐승이나, 너희의 집안에 머무르는 식색일지라도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의 남종이나 여종도 쉬게 해야 한다.” 이런 농경 사회의 휴식 규정이던 것이 율법 규정으로 바귄 것은 훗날의 일입니다.

 

안식일 법이라는 건 유대교의 법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성서 시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닙니다. 기원전 6세기쯤 유대 왕국이 멸망하고 국가가 없는 시대에 형성 되어, 유대인들의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해 주는 기능을 하던 헌장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종교적인 관행의 유지와 실천을 담당할 국가가 없는 대신에 율법이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된 겁니다. 이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이레째 되는 날 안식을 해서 이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연결시켜서 안식일 율법이 모세의 십계명 속으로 들어왔고, 일주일의 이레째(태양력으로는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되는 날은 신명기5:13이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주 너희 하나님의 안식일이니, 너희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이렇게 말입니다. 즉 농경 사회의 자연스런 삶의 리듬이던 것이 법제화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시는 무서운 법이 아닌 삶의 리듬이던 것이 무서운 법으로 바뀌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끝난 게 아닙니다. 이 율법을 해석하고 세칙을 만들던 율법학자들이 안식일에 금지해야 할 일의 종류를 세부적으로 정하면서 금지 조항에 ‘밀을 자르는 일’이 들어가게 됩니다. 에수의 제자들은 이 금지 규정을 위반했으므로 바리새인들의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비판에 대해서 정당성을 얻고자 비유로든 다윗의 이야기는 본래 안식일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비아달 때라고 되어 있지만 이 본문이 등장하는 삼상21:1절에는 아비아달이 아니라 아히멜렉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과 상관이 없는데도 율법학자들은 안식일 규정의 엄격성을 위해서 다윗을 끌어다 붙이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비유를 끌어다 쓰는 이유는 그렇게 엉터리로 안식을 강화를 도모하는 그들을 비난할 목적이 있는 듯싶습니다. 정작 예수님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 다음입니다. 예수는 다윗이라든지 이런 예를 들어 정당화 하지 않고 단언적으로 아무 조건 없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실 때 ‘다윗이 어쩌고....’하는 말은 해석의 범주에 넣지 말아야 하는 대목이라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도 사실은 아주 신선한 것은 아닙니다. 진보적인 랍비중에 한 사람인 시므온 벤 메나자라는 이가 사람의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는 안식일 금령을 위반할 있다고 했습니다. “너희를 위해 안식일 주어져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 너희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예 어떤 전제 조건도 다 떼버리고 ‘사람이 안식일 계명보다 우선한다’고 강력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예수의 선언이 안식일을 폐지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농경사회의 인간휴식을 위해 정해진 안식일 본래의 의미로 돌아가자는 뜻이었습니다. 만일 안식일 규정 대문에 인간의 삶이 침해를 당하면 그건 인간이 안식일 규정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 중심 사회가 안 되는 것이지요.

 

그 무렵 유대 사회애서 율법이란 건 종교영역에 한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삶 전반에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정치, 사회, 문화 등이 구분되지 않는 전통사회에서 율법은 그 자체로 법의 기능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은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법 정신의 기본 원리로 확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삶을 우선시하는 예수의 급진적인 정신을 잘 드러내는 ‘인권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또 예수의 말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마지막에 나옵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서조차 주인이다”라는 말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나는 모든 법위에 있다든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안식일에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정당하다든가, 나는 모든 법위에 군림하는 권위 있는 존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걸 연역법이라 하는데, 내가 권위 있으므로 나를 통해 인간들의 권리가 부여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의 권리가 확보 될 때 나도 그 권위도 그것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연역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이미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포된 인간의 권위 안에 예수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안식일의 주인이면 모든 인간도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아람어에서 ‘인자’는 그냥 보통 사람을 의미합니다. ‘내가(예수) 안식일의 주인이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안식일의 주인이다’가 됩니다.

 

물론 마가복음에서는 ‘인자’를 예수를 가리켜 썼습니다. 마가는 안식일 법으로 대표되는 모든 율법에 대해서 인간이 우선이라는, 인간이 중심이라는 인권 선언과 관련해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예수의 신적 권위보다는 인간적인 삶을 옹호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마태(12:1-8)나 누가(6:1-5)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인간의 자유와 사람의 아들 예수에 관심하지 않습니다. 이 책들에서는 예수의 신적인 권위와 위상을 부각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마가에 나오는 ‘안식일의 주인이 사람이다’라는 말을 마태나 누가는 생략합니다. 대신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부각합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다. 따라서 나의 제자들과 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도 안식일에서 자유로워진다’로 변경을 합니다. 모든 게 예수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예수 때문에 그의 제자들도 그리스도인들도 안식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예수의 권위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게 마태나 누가에 나오는 논리입니다.

 

이것을 유대교의 안식일이 초대 기독교의 ‘주일’ ‘주의 날’로 대체되는 과정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초대 기독교는 안식일을 주의 날로 대체해야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마가복음의 무조건적인 인권 선언은 너무 급진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와 누가는 이 말을 삭제하고 안식일 법에 대한 인간의 자유보다는 인자 예수의 원위를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론적’기초, 즉 인간의 자유를 그리스도의 권위에 근거하게 하는 신학적인 잡업이 이루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매사를 ‘예수 때문에’ ‘예수로 인해서’하는 전제들이 여기서 생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서가 역사적인 예수에 훨씬 확고하게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자유’해야 할 사항은 단지 율법이나 법의 항목만이 아닙니다. 우리를 둘러싼 견고한 감옥들이 법보다 훨씬 많고 강력합니다. 그런 것들은 규제받지도 않고, 규제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세계로부터 교묘하게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구속하고 있는 ‘비인간화의 질서’들을 간파하고, 그것들 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권위를 되찾는 일이 이 시대의 마가복음의 정신이며, 예수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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