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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24> “왕래 없으면 북·미 관계는 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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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북한 당국은 남한의 사업가와 정치 지도자, 종교인을 대거 초청했다. 당시는 김일성 시대 말기의 대전환기였다. 89년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평양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했고, 함흥 출신 재미교포 실업가 황규빈씨도 평양에 갔었다. 황씨는 오래전 내가 미국 유학을 주선했던 후암교회 출신 신자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세계적 경제인이었다.

나의 두 번째 평양 방문은 1990년 11월 이루어졌다. 미국 윌리엄캐리대 랄프 윈터 총장과 데일 키츠맨 수석부총장, 개발 담당 찰스 위크맨 부총장 등과 함께 초청받았다. 김일성종합대와 김형직사범대에서 초청했다. 윈터 총장은 학교의 급한 사정으로 떠나지 못했다. 미국의 대표적 선교대학원 총장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북·미 관계는 여전히 정전 상태의 교전 당사국인 것이 문제였다. 평양 당국의 어느 부처에서도 미국 대학 총장단의 입국허가 수속을 처리하려 하지 않았다. 조선노동당과 정무원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최종 결정에서도 대미 정책을 다룰 수 있는 최고위 간부들과 부처 간에 토론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90년 11월 23일부터 12월 4일까지 방북했다. 미국에 대한 북한 당국자들의 인식은 학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한시해 부부장과의 대화는 벽이 느껴졌다. 그는 주체사상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미국 측 말은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키츠맨 수석부총장이 노련한 선교학자답게 경청하면서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리의 평화선교 노력이 극적으로 풀리기 시작한 것은 11월 25일 저녁 평양 옥류관에서였다. 주 유엔대사로 뉴욕에서 7년간 살았던 한 부부장은 공식석상에서와는 달리 통역 없이 영어로 담소했다.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바로 그때 키츠맨 수석부총장이 한 부부장에게 미국 방문을 권유했다.

한 부부장은 “미국 국무부가 나에게 비자를 내줄 리 없다”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키츠맨 수석부총장은 한 부부장에게 확신을 주는 말로 답했다.

“오고가는 것이 없으면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풀리지 않습니다.” “….”

“미국에 오라는 말은 빈손으로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북한과 미국이 화해할 수 있는 평화 사절로 오십시오.” “….”

“우리가 온 것은 순수 민간사절이며 비정치적 방문이지만 북·미 간 평화와 화해의 다리를 놓기 위한 기초작업차 온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조선그리스도연맹 대표들과 김일성종합대학 학자들도 초청하겠습니다. 당신이 미국을 방문한다면 국무부와 의회 지도자들, 그리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총장단은 이들을 초청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윈터 총장은 직접 워싱턴 국무부를 방문했고 키츠맨 수석부총장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국무부 고위 간부에게 전화해 자신의 북한 방문을 설명하면서 한시해 일행의 방미를 미국 정부의 대북전략 전환 기회로 삼으라고 설득했다.

마침 북미기독학자회와 미국장로교총회도 북한의 학자들과 조선그리스도연맹 목사들을 초청하려고 국무부와 접촉 중이었다. 우리의 삼각 노력에 국무부는 마침내 반응했고 세 가지 초청 계획을 일괄 취급키로 했다고 연락이 왔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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