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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시는 예수님

  •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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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71128170938_01.jpg (File Size: 67.0KB/Download: 0)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중략)...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중략)...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1장 17~44절)


 ‘우시는 예수님’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마다 베다니라는 마을에 와서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가 사는 집에 들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친형제처럼 사랑했고, 그 두 자매와 나사로는 예수님을 오빠와 같이 아버지와 같이 형과 같이 사랑하며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느 날 베다니로부터 먼 거리에 계실때였습니다. 걸어서 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있었는데,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으니 빨리 와달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들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는 죽을병이 아니다. 우리 더 있다가 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발을 동동 구르는데, 예수님은 이틀이나 더 있다가 가자고 하니 제자들이 ‘아니, 이틀이나 더 있다 가면 나사로가 살아있겠습니까?’하고 염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는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죽은지 나흘에 베다니로 갑니다.


1.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베다니 근처에 도달하자 마르다가 뛰어나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면서 “주님이 나흘 전에 이곳에 있었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에 보면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과 마리아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살리라.”하자 “예, 오라버니가 부활의 날에는 살 줄 믿습니다.”라고 마르다는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부활이요 생명인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묻자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이 세상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의 예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예수님이신데, 마르다는 그렇치 않았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다 마르다와 같습니다. “나흘 전에 오라버니가 살아있을 동안에 왔으면 병이 나았을 것인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여동생 마리아도 요한복음 11장 32절에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라고 말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현재 주님이 계셨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가 기대하던 대로 오라버니를 지금 살릴 수 있는데 왜 예수님이 우십니까? 예수님은 절대적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주님이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간적인 제한으로 무력하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오셨는데 우리가 예수님이 과거에는 하나님이고, 미래에는 하나님이겠지만, 지금은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도울 수가 없다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굉장히 충격을 받아서 지금의 예수님을 인정 안 하는 그 마당에 그리스도가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우리가 늘 말하는데, 그런데 좀처럼 이대로 실행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생기면 ‘과거에 예수님이 계실 때 생겼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혹은 ‘미래에는 예수님 오셔서 도와주실 것인데 지금은 어떻게 된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지금의 예수님을 인정해주지 아니하심으로 그것이 충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와 함께 계시려고 하시는데, 지금의 예수를 인정해주지 않는 그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데 그 속에서 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한복음 11장 33절~35절)’ 대단한 충격을 예수님이 받은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확실히 알고 계셨습니다. 당신 자신이 할 일 이니까요. 그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미래의 부활은 믿었지만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생각지는 못했습니다. 마르다 뿐 아니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지금 그 앞에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울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서 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오셔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지전능하신 주님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망하여 울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그 모습을 보시고 매우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환경에 조건을 들어 놓아도 불가능을 그 조건으로 선언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불가능한 조건이 붙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예수님은 통곡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조건 있는 전능한 하나님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나흘 전에 오셨으면 안 죽었을 것이다. 부활의 날이었다면 안 죽었을 것이다. 온갖 이런 조건을 붙이는데 조건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전능하신 그 능력은 무슨 조건이 붙어서 전능한 것이 아닙니다.


2.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되어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한복음 11장 38절~39절)’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왔는데 중동에는 무덤을 동굴로 만들어서 거기에 관을 갖다 넣는 것, 돌로써 그 무덤을 막아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그 무덤 곁에 왔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에게 “돌문을 옮겨 놓아라.” 그러니까 기겁을 합니다. 두 처녀가. “주님, 나흘 전에 무덤에 장사 지내서 지금 썩은 냄새가 나는데 돌문을 밀어서 어떻게 합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두 딸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죽어 썩어 냄새가 나는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라고 상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삼차원의 세계는 보는 것만 보고 사는데 예수님은 사차원의 하나님이시라 눈에 안 보이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벌떡 일어납니다. 수의를 입은 채 무덤에서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수족이 묶여있는 것 다 풀어주고 옷을 바꾸어 입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한복음 11장 38절~39절)’ 이것은 절대절망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다”는 말에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셨더라면 병을 고칠 수 있었겠지만 이미 죽었는데, 너무 늦었는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의심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시신에게 썩는 냄새가 난다는 것은 절대절망의 상황이라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절대절망의 상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네 믿음대로 될지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너무 늦었다고 말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이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예수님께 가지고 나오면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삼키지만, 그 삼킨 자를 토해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나사로를 되찾아오기 위해 나사로를 삼킨 무덤으로 쳐들어가신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신 것은 “나사로야 이리로 나오라. 밖으로 나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죽음의 세력은 더 이상 나사로를 붙들 수가 없었습니다. 나사로가 벌떡 일어나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자,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풀어 놓다’라는 말은 사람이나 동물을 매인 것으로부터 풀어주어 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서 15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매여 종 노릇 하는 이들을 풀어 주셔서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남편 없이 과부가 자기 아들 하나 데리고 살다가 아들이 병들어서 죽어버렸습니다. 비통하기 말로 다할 수 없어 울고 통곡하면서 그 청년을 관 속에 담아 짊어지고 과부가 뒤에 따라가면서 울면서 골목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이 마침 그 길로 오다가 그 과부의 비통한 마음을 보고 공동묘지로 데리고 가는 장례행렬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청년아 일어나라!”고 명령하자 그 관 속에서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그 과부 엄마에게 돌려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만 살린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죽은 자의 장례식의 행렬을 중지시키고 살린 적이 있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의 행렬을 중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6절로 7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11장 40절에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에 베다니로 출발하신 것도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를 믿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1장 15절)’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축복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바닥났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의 믿음이 바닥났기 때문에”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제게 안수기도를 받으러 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면들이 있습니다. 병들어서 온 사람이 “나는 더 이상 이 병 때문에 고통당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의 결심과 믿음의 결단을 보여주는 사람이 대개 병이 낫습니다. 믿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크든 작든 ‘믿겠다.’라고 결단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장 24절)’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생각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받았다고 믿으면 믿음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감각이나 이성을 의지하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떡값을 먼저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감각과 이성을 초월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함께하시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먹이라고 하면 그 말을 절대로 믿고 시행해야지 계산하면 안 됩니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먹이라면 그냥 믿음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기적을 믿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불가능하다고 해서 하나님에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칼빈은 “믿음이란 저수지 물을 집으로 끌어들이는 수도관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할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생이란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음의 행렬에 동참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붙잡고 있던 사망의 세력을 깨뜨리시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나사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와 질병과 가난과 저주와 죽음이라는 무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캄캄한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지금 이 시간에도 명령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누구든지 주님의 이 음성을 들을 때, 믿음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러면 무덤에서 걸어 나와 주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건이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이 인정되고,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큰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 적다고 통곡할 필요가 없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이해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아는 것은 돌을 옮겨놓는 행동으로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무덤 문의 돌을 옮겨 놓을 것이요, 믿음이 없으면 무덤 문의 돌을 못옮길것입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믿음이 있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매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마음속에 저장하고 그 믿음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이 역사해주기를 기다려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고 우리가 행하는지, 행치 않는 불신앙을 가졌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믿음을 행함으로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쉽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도 주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행하면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생활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일을 해주시고 문제가 해결되게 해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금요일에 병든 자는 기도를 항상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학생이 있었는데 위가 굉장히 나빠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매 금요일마다 와서 안수를 받고 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니까 그가 고함을 쳤습니다. “내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믿음 좀 찾아서 주십시오. 목사님 내 믿음 좀 찾아주십시오.” 그래서 “네 믿음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 믿음은 네가 가지고 있다. 너의 위장병이 나은 줄 믿어라.”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그럼 여기 계신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위장병이 나았다고 믿었는데 나았는지 안 나았는지 좀 봐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다 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이내에 그 청년의 위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굉장히 기뻤습니다. 그 믿음대로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것을 굉장히 믿음을 굳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것은 할 수 있고, 어느 것은 못 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은 오늘에도 그 믿음의 역사를 베푸는 것인데,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주님의 시키는 일을 믿으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믿음은 우리가 믿으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항상 함께 계셔서 나에게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십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질 때, 예수님이 기뻐 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뻐 즐거워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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