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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덕 세우기를 기도하라 (고전 1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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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덕 세우기를 기도하라 (고전 14:1-19)


오늘 본문에 앞서서 사도 바울은 쓰기를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한 후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 하고서도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오늘 본문을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본문 1절 상반절)는 말로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령한 것들이 다 무익한 것이라고 이미 말했기 때문에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더라도 사랑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 어떤 신령한 것을 행하든 사랑이 함께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방언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예언을 하려 하라고(본문 1절 하반절) 권면합니다. 방언이든 예언이든 그 어떤 은사든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엇이든 받기를 사모하려거든 방언하는 은사보다는 예언하는 은사 받기를 더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본문 2-5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여기서 사도바울은 방언과 예언에 관한 그의 이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방언에 관한 그의 생각입니다. 방언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바람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은사 중 하나이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덕을 세워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 하는 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 교회에 덕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방언을 통역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교회에 덕이 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말하는 방언은 기도와 찬양이 될 것인데 성령에 힘입어 하는 기도와 찬양은 은혜로운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하는 이의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로 역사하셨는지를 알게 됨으로써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이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말이라면 예언은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주된 목적은 사람들에게 통찰력과 경고와 교정과 격려와 위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했고,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했으며, 통역 없는 방언보다 예언이 더 바람직한 은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그 자체 가운데서 우열을 노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그 두 은사는 모두 같은 한 성령의 은사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필요한 이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방언과 예언 사이의 근본적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예언을 더 사모하게 하는 요인으로 사도 바울이 언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언이 방언보다 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 이유로서 그 말이 분명하고 알아듣기 쉬움을 들고 있습니다(본문 8-9절).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일만 마디보다 남을 잘 가르칠 수 있는 예언 다섯 마디가 낫다는 것입니다(본문 19절).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의 가르침을 여러 가지 악기의 경우와 언어의 경우를 예로 들어 이해시키려고 합니다. 먼저 본문 6-9절을 봅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사람들이 피리도 불고 거문고도 타는 것 같기는 한데 소리가 나지 않으면 지금 피리를 부는 것인지 거문고를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방언을 하기는 하는데 그 소리가 무엇을 말하는 소리인지 알지 못하면 교회에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나팔수가 나팔을 불기는 하는데 그 나팔소리가 전투를 준비하라는 신호의 소리를 명확하게 내주어야 병사들이 전투준비를 할 터인데 식사시간이라는 신호인지 취침하라는 신호인지 퇴각하라는 신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으면 큰 혼란과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방언이 분명하고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통역되지 않으면 교회에 덕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신자들과 교회를 큰 무질서와 시험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언어 사이의 불통의 예를 들어 다시 설명합니다. 본문 10-11절에서 그는 쓰기를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합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쓰는 말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 뜻을 다 알지 못하면 사람마다 모두가 서로 서로에 대하여 언어가 불통하는 외국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인 곳에서 통역하는 사람이 없이 각자가 자기 나라의 말을 한다면 그 모임은 아무런 유익도 의미도 없는 자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각자가 서로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통역 없이 마구 말하는 사람들은 결코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사모하는 것은 좋으나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도록 하며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면 통역하는 은사까지 함께 구하여 교회의 덕이 되게 하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서로 축복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하게 축복을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할 방언으로 축복하면 누가 “아멘”으로 화답하겠습니까? 누가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아무리 은혜롭고 감동스럽게 한들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한다면 누가 마음을 같이 하여 감사하며 덕 세움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16-17절입니다: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누구에게보다도 큰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감사하지만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잘 깨달을 수 있는 말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낫다고 한 것입니다(본문 18-19절).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관해서 말하며 중요한 것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 사이의 분명한 언어소통과 그것을 통한 교회의 덕 세우기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방언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방언을 비롯한 신령한 은사들을 부인해서는 안 되며 그런 이들을 억누르려 해서도 안 됩니다. 방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은사이고, 신앙의 필수요건은 아니지만 바람직한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방언하는 사람들이 방언하지 않는 사람들을 깔보아서도 안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특수한 은사를 받은 이들이 예배와 교회생활을 무질서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에서 영적 일치의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영적 우월성의 표시로 남용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은사들은 오직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사용되어야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방언 등 신령한 은사 말고도 여러 가지 다양한 달란트를 받은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위한 열심이 특별한 이들도 많습니다. 정말 교회밖에 모르고 교회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힘쓰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그 뛰어난 능력과 열심이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거나 교회 일 전체를 보는 안목이 없거나 소통의 기술이나 노력이 결여되어서 교회에 유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골치 거리가 되고 분란의 원인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능력도 있고 열심도 있는데 가는 데마다 부딪치고 불화하고 불협화음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다고 마음 먹으면 누가 뭐래도 하고야 말겠다고 사방을 쑤시고 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도리어 교회가 시끄럽곤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나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며, 언제나 무슨 일에나 나의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세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과 열심을 자랑하기보다 교회의 덕 세우기를 사랑하기를 끊임없이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 훈련 자체가 교회 사랑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주시고 모두가 교회의 덕 세우기를 최우선으로 힘쓰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게 해주시기를 날마다 기도하는 새문안교회 온 성도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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