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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시 65:10-13, 골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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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시 65:10-13, 골 3:16-17)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는 한해의 삶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한해의 삶의 진정한 감사의 표현이 추수감사로 나타나게 됩니다. 추수감사는 농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농사는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고 전적인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농부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도 하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추수 후에는 하늘에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발상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삶이었습니다. 

본시는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감사한 시입니다. 다윗은 목동출신이고 시골 출신입니다. 다윗은 농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시편23편은 양치는 삶을 노래한 시입니다. 시편65편 9절에서 13절을 보면 농사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랑, 단비, 싹, 초장, 양떼, 곡식, 골짜기 등 농촌 출신들은 익히 들어 아는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들은 듣기만 해도 정감이 드는 단어들입니다. 그렇게 농사를 지어 놓고 추수할 때 사람들은 하늘에 감사했습니다. 

사람이 감사를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우선 자신이 행복하고 삶이 행복하고 현실이 행복해집니다. 행복도 차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감사한다고 다 감사가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은 농사짓고 추수하고 그냥 막연하게 감사하는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양의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부터 추수감사절이 신앙적인 절기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100%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의 전달식입니다. 서양인들이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데는 뼈아픈 사연이 들어 있습니다. 

추수감사절 

기독교의 역사에는 몇 가지 마디가 있습니다. 기원 1054년에 기독교가 동서교회로 갈라지게 됩니다. 동교회는 희랍을 중심으로 한 오늘의 정교회와 서교회는 로마를 중심한 가톨릭으로 갈라졌습니다. 이 분열은 신학적인 문제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500년 후에 로마 가톨릭이 그 후 타락하고 형식화 되어 다시 갈라져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누이게 됩니다. 

다시 15년 후에 영국 제임스 국왕에 의하여 영국에 있는 교회들로 하여금 분리하여 앵글리칸 쳐치라는 영국 국교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성공회입니다. 이 분열은 정치적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국왕은 가톨릭의 지배를 거부하고 성공회를 만들어 모든 영국국민이 다 이 성공회에 가담해 줄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때 영국 국교에 반대하는 부류가 또 이탈하게 됩니다. 그들이 오늘 우리들이 말하는 청교도들입니다. 이 청교도들은 형식적인 영국국교의 통제를 받지 않고 청결한 신앙을 유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제임스 국왕이 그들을 그냥 놔 둘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가하자 청교도들은 그 핍박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마침내 1620년 9월에 메이플라워호라는 배에 102명이 타고 영국 플리머스 항구를 떠나서 박해를 피해 새 땅에 가서 마음껏 예배를 드리자, 신앙의 자유로운 삶을 누리자 하는 목적 하나만 가지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목적이 아주 선했습니다. 

그렇게 떠나 66일간 항해해서 11월21일 마침내 돌투성이인 불모지의 땅 오늘의 미국 매사추세츠 주 항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66일간 대서양을 건너 항해하는 동안 102명의 인원에서 반이 죽었습니다. 일부는 병들어 죽었고 일부는 추위에 얼어 죽었고 일부는 파도가 심해 배가 흔들릴 때 물에 빠져 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각고 끝에 이들은 신대륙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개척과 탐험과 모험의 삶이 따릅니다.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이런 모험의 삶도 함께 들어가게 됩니다. 동남아 몇 나라를 여행했는데 느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들도 복음을 받아들이면 개혁이 일어날 텐데 라는 아쉬움입니다. 한국이 그 모델이 아닙니까.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는 한결같이 모두 개혁되고 창조되고 선진사회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민족도 복음을 받아들인 곳에는 반드시 모험의 삶과 개혁의 삶이 주어집니다. 복음 자체가 모험과 창조와 개혁의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청교도들도 어지간하면 그냥 살지, 어지간하면 오늘 평안하니 대충 살자 했으면 이런 기적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청교도들에게는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모험의 길을 떠나자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새 세상, 새 세계, 새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자는 모험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기독교가 온갖 핍박을 이겨내며 세상을 복음화 하게 된 것입니다. 

새 땅의 농사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자마자 농사부터 지었습니다. 농사지을 줄을 모르니까 그 땅에 살던 가나안 족속에게 농사법을 배워 곡식을 심고 가꾸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새 땅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도착하자마자 농사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옥수수부터 심었습니다. 농사짓는 것을 원주민들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가꾸어서 첫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감개무량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그 음식으로 추수감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드린 감사는 눈물겨움이 있습니다. 그 눈물겨운 감사에 몇 가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죽은 동료들과 함께 한 감사입니다. 

고국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는 66일간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반이 죽었습니다. 얼어 죽고 거친 파도에 빠져 죽고 병들어 죽고 새 천지를 보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남은 대원중에서 또 반이 얼어 죽었습니다. 그렇게 추위를 극복하고 농사를 지어 첫 곡식을 거두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 세 세계로 자유로운 땅을 찾아 가던 중 사망한 동료들을 잊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첫 추수를 해서 그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놓고 먼저 동료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청교도들은 동료들이 묻힌 공동묘지에서 눈물로 감사제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누군가와 함께 할 때 더 진해집니다. 행복이나 즐거움은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삶은 진정한 동료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람들이 가진 것이 많고 누리고 살면서도 감사도 행복함도 없는 것입니다. 엊그제 한국인의 행복지수를 조사한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가 평균 61점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낮으냐? 하면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고 혼자 이기적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삶이 무료하고 재미없고 자꾸 자살충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응답자의 43%가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42.3%는 외로움과 고독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고 35.9%는 가정불화를 겪고 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그 말은 나 혼자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이 감사함이 없고 행복감이 없고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눈물겹게 농사를 지어 먼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동료들을 생각하였습니다. 함께 자유롭게 신앙생활 하려고 모험의 길을 떠났는데 그들은 도중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동료들을 어찌 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눈물로 동료들과 함께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웃과 함께 한 감사입니다. 청교도들은 음식을 만들어 이웃인 인디언들과 나누었습니다. 인디언들은 먼저 그 땅에 와 살고 있던 원주민들입니다. 청교도들은 그 인디언들로부터 농사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추수한 후에 그들을 초청하여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때 초대받은 인디언들은 칠면조를 잡아 음식을 만들어 와서 함께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의 추수감사절에는 칠면조를 먹는 전통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추수감사는 이웃과 함께 해야 제격입니다. 더 빛이 납니다. 그리고 감사가 배로 증가합니다. 옛날 시골 삶이 그랬습니다. 음식을 만들면 반드시 이웃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일할 때도, 모심기를 할 때도 혼자 하지 않고 함께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같이 하였습니다. 그것을 두레라고 말합니다. 두레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풍악을 울리고 품앗이를 하며 함께 먹으며 일했습니다. 

오늘 생각해 보면 그 때가 사는 것 같았습니다. 추수감사는 이웃과 함께 하는 절기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들 대부분의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이 모두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래로는 이웃과의 관계의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도 대부분 이웃과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웃은 삶의 필수 존재들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수확한 햇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놓고 동료들을 생각하고 인디언인 이웃들을 불러 함께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부터 드렸습니다. 한편의 감동 드라마와 같습니다. 그들의 삶속에는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이고 존재 그 자체였고 의미이고 삶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부터 드렸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성경의 중심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부터 드립니다. 제사드릴 때는 성가대가 동원되어 찬양이 어우러졌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이곳저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하라(시편149)”고 하였습니다.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고 현악과 퉁소로 찬양하라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고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라(시편150)”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흥이 있게 노래를 부르라는 말입니다. 찬양에는 흥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제사에는 반드시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제물입니다. 

제물은 양을 바쳤고 때로 농작물도 드렸습니다. 또 하나는 거기에 백성들이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참여하여 제사드릴 때는 시편에서 강조한 것처럼 악기가 동원되고 모든 백성이 참여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청교도들이 감사의 예배를 드릴 때는 그런 심정으로 드렸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심을 감사하고 새 세계를 열게 하심을 감사하고 새 세계 새 시대의 주역이 되게 하심을 감사하였습니다. 그것이 추수감사절의 정신입니다. 

정신 퇴색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는 모두 천사입니다. 순전합니다. 무죄합니다. 욕심이 없습니다. 그 상태로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조금 성장하면 배우지 않았는데도 움켜쥐기 시작합니다. 거짓말부터 하기 시작합니다. 부수고 찢고 파괴하고 탐욕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그들은 인디언들의 조언을 받아 농사를 지어 함께 추수감사절을 지켰습니다. 얼마나 좋은 이웃입니까. 그런데 좋은 이웃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거기까지만 은혜의 시기였습니다. 그들이 1620년 11월 21일 날 미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160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그들은 씻을 수 없는 끔찍한 살육의 역사를 만들게 됩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의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는 그 땅에 살고 있던 토착 인디언들이 대략 2천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인디언들은 성품이 온화하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소박한 그 땅의 주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몽고족이었다고 그들은 시베리아와 알라스카를 거쳐 아메리카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된 청교도 생활이 1600년대 후반으로 들어가면서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게 되고 씻을 수 없는 침략의 역사로 바뀌게 됩니다. 1600년대 인디언들이 2천만 명이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1900년에 들어가면서 인디언들이 25만 명으로 줄어듭니다. 전염병으로 죽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정복 전쟁의 피해로 죽었습니다. 그들을 누가 죽였습니까. 그 땅에 온 정복자들은 대부분 청교도들의 후예들인데 이 청교도들이 왜 그렇게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죽였습니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1620년 영국 플리머스 항을 떠날 때 모두 102명이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청교도들이 아니었습니다. 102명중 청교도는 35명뿐이었고 나머지 67명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함께 동승한 노동자, 상인, 군인들이었습니다. 소수의 청교도들이 다수의 사람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침략의 역사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박해를 피해 그곳에까지 간 그들은 거기서 또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말이 옳은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선한 속성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남의 것을 빼앗고 파괴하는 기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소수의 청교도들이 힘이 부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이플라워호에 탄 102명 중에는 두 얼굴이 있었던 것입니다. 35명은 청교도들의 얼굴이고 하나님을 찾아 거기까지 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67명은 물질주의자들의 얼굴입니다. 오직 잘 살기 위해서 그 배를 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에는 아직까지도 이 두 얼굴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신앙의 얼굴이 있고 또 다른 얼굴은 세속적인 얼굴입니다. 이것이 오늘 미국의 역사에 흐르고 보이지 않게 있는 두 얼굴입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추수감사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웃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추수감사는 감사와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음은 이웃과 함께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농사일은 함께 하고 상부상조해야 가능합니다. 그 정신을 두레라고 합니다. 농사도 추수도 함께 해야 합니다. 감사는 아무리 강조해도 다함이 없습니다. 감사는 우리 삶에 중심입니다. 중심 정신입니다. 삶의 정신입니다. 

하늘에 감사하고 이웃에 감사하고 서로 나누는 절기입니다. 스펄전은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다시 찾아온다.”고 하였습니다.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대통령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인생 1/3을 외딴 섬 감옥에서 갇혀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어떻게 27년간을 외딴 섬 감옥에서 살면서도 건강하게 지탱하였는가?”하고 묻는 말에 “감사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날이 밝으면 하늘에 감사하고 땅을 보며 감사하고 물을 하시며 감사하고 음식을 먹으며 감사하고 늘 감사하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감사도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평안할 때 배부를 때는 없습니다. 도저히 감사할 수 없을 때에 감사하는 감사가 진정한 감사입니다. 그것이 범사의 감사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넉넉할 때가 아니고 평안할 때도 아니고 건강해서만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진정한 감사는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감사 시입니다. 본시에서 말하는 풍경은 그 시대에는 없었습니다. 

다윗이 환상으로 본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본 것입니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초장은 양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노래하나이다.” 미래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질 영광의 삶을 내다보고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 풍경을 자연에서 우리의 삶속에서 날마다 보고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서도 우리는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지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장에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감사로 영광을 힘입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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