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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 (롬 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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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 (롬 4:1-17)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1977년 미국의 경제학자인 ‘존. K. 갈브레이스’가 발간한 저서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 지난 200년간 경제의 발전을 지켜보면서 경제사와 사회사상사를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책에서 예전처럼 확신에 찬 경제학자도, 자본가도, 제국주의자나, 사회주의자도 존재하지 않는 현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일찍이 지나간 날에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만한 경제이론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분명한 경제관을 가지고, 독보적인 철학을 가진 경제학자들이 있어서 무엇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해주었는데, 오늘날에는 그처럼 확신을 갖게 하는 철학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경제민주화’라는 말을 하는데, 우리나라에 경제학자들이 없어서 정치가들이 경제민주화라는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매우 불확실한 시대에 틀림없습니다. 우리에게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고 밝은 내일을 약속하는 이들이 있는데, 불확실한 공약에 불과합니다. 

이용규선교사가 하버드라는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몽골 땅에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가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써서 유명해졌습니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이용규박사는 하버드대학을 졸업하였으니 많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몽골 선교사로 갔어. 이 사람은 많이 내려놨구나! 나는 그렇게 못 해왔는데”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높은 자리에 있다가 낮은 자리로 내려왔다는데 독자들은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더 올라가기 위하여 내려놓아야 하는 것처럼 이해한 것이 안타까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용규선교사는 그의 다음 책 “더 내려놓음”에서 진정한 내려놓음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이란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내려놓아야 하는 것을 내려놓고, 비워야 하는 것은 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기 위하여 내려놓고 비우는 것입니다. 단순히 비우고 내려놓기 위하여 목적이 아닙니다. 

불교나 뉴에이지 사상에서도 우리에게 비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가르침은 비우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합니다. 인생이란 비우는 것으로, 무소유로 살아갈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얻고, 그것으로 채우기 위하여 비우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기 위하여 나를 비우고, 세상의 것을 비워야 합니다. 그것이 비움의 목적입니다. 불분명한 것을 버리고 분명한 것으로, 불확실한 것을 비우고 확실한 것으로 채우고 가꾸기 위하여 비워야하고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로서 교인들에게 “구원받으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무슨 구원파 목사인가 하여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예 구원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해요. 그러면 “언제 구원받았느냐”라고 다시 물어오면 “예, 저는 1949. 1. 16에 구원받았습니다.” “그 날이 언제입니까?” “그 날은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입니다. 저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로, 구원받은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나가면 어떤 사이비 집단의 유혹이라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확신과 간증과 성경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고후13:5에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남의 이야기나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구원이기에 나 자신을 시험해보고, 확증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 안에 있는가? 아니면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지만, 대충 믿어두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나의 구원이요, 이것이 나의 간증이라는 분명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와 성가곡을 많이 작사하신 분으로, 미국의 감리 교인인, 맹인이신 홰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9-1915) 여사가 있습니다. 홰니 여사는 평생에 9000편의 찬송시를 작사하였습니다. 그는 두 눈을 보지 못하는 가장 불행한 처지에 있었지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연약한 여성의 몸으로 95세를 살았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23곡이 수록되어 있는 최다의 작사자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맹인으로 태어나고 싶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저는 다시 태어나도 맹인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제가 천국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눈을 뜰 때에 그 처음 만나게 되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에 저는 저의 눈을 가지고 맨 처음 바라볼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처음 눈을 뜰 때에 우리 주님을 바라보겠다는 그의 소원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집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눈을 뜰 때에 예수님을 바라보겠다고는 하는 그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 때문에 가슴이 떨리고, 애타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서 예수님과 함께 눈을 뜨고, 저녁에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갈 때에도 주님과 함께 누워 잠을 잔다는 생각으로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거하는 그런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일생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홰니 여사가 53세 되는 때, 그의 친구이며, 메트로풀리탄 생명보험회사의 설립자요, 초대 사장인 죠셉 내프의 부인이신 P.P. 내프여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아마추어 작곡가였는데, 자기가 작곡한 곡에 맞추어 시 한 편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내프 여사는 피아노에 앉아 한 곡을 흥얼거리며 곡을 연주하였습니다. 그 곡을 듣는 동안 홰니 여사는 지난주일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설교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설교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한 시를 썼습니다. 홰니 크로스비는 즉석에서 시를 써주었고, 내프여사가 치는 곡에 붙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찬송이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이 되었고, 세계 많은 성도들이 애송하는 찬송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삼아야 하는데,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성령과 피로써 거듭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마음의 평안 정도가 아닙니다. 자식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라고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 믿어보다가 아닌 것 같으면 슬그머니 놓아버리고, 그래도 믿어두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으니 계속 믿어보자는 그런 정도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떤 확신보다도 구원받은 것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겠습니다. 구원받은 증거가 분명해야 됩니다.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목사가 죄를 회개하라고 하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과 감정을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말씀에 의지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 십자가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됩니다.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머잖아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면 두렵기가 그지없고,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라는 것은 우리의 체면을 잘 살려주고, 우리를 얽어매는데, 이런 죄에 빠지면 이성이 마비되고, 점점 더 어리석은 죄악에 빠지고 맙니다. 죄를 다 회개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깨진 유리창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면 연이어 옆의 유리창도 깨진다고 합니다. 이 상황이 계속되다 보면 그 건물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인근에 범죄가 속출하면서 일대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됩니다. 빈 건물의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하였는데, 그 지역이 황폐해지고 공동화되고, 범죄의 온상으로 깡패들이나 출입하게 되고, 사람 살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연구한 사람이 있는데,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란 사람이 1982년에 발표한 이론입니다. 이것을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라토가스 대학의 겔링 교수는 이 ‘브로큰 윈도우’ 법칙에 근거해서 뉴욕 시의 지하철 흉악 범죄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낙서를 철저히 지우는 것을 제안했다. 낙서가 방치되어 있는 상태는 창문이 깨져있는 빈집이나 방치된 자동차와 같은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시에는 무려 5년 동안에 걸쳐 6000대의 지하철 차량의 모든 낙서를 지우면서 범죄를 줄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지하철 범죄의 75%를 낮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범죄를 100% 없앨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죄를 아파하고 버리려고 하고, 회개하지만, 우리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죄, 이 죄가 문제입니다. 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죄가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 그런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받은 것은 나의 구세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영접하여 구원받은 확신을 가질 때 그 확신을 근거로 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 개혁교회를 이룩하신 요한 칼빈 선생님은 세례란 “하나님에 의하여 그의 자녀로 삼으시는 거룩한 인침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접붙임으로써 새로운 출발”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칼빈이 내린 세례의 정의는 대단히 잘 된 것으로 세례를 그 이상 설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세례란 영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새로운 존재인 한 인간의 결단이다”로 했습니다. 새로운 존재(New being)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고후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새로운 피조물, 새로 지음을 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세례 받은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다고 하면 세례 받은 것도 구원받은 것에 대한 확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기에 세례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구원받은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연구해보겠습니다. 먼저 1-2절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란 분은 믿음의 조상이요, 매우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깨끗하고 정직하고 죄가 없으므로 하여 의롭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고 하면 그는 정말 자랑스러운 사람이요, 자기를 내세울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단언합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우리와 같이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3절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3절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 그것을 의로 여겨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교리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보려면 창세기15:6을 잘 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상한 인격을 가지고 행동이 바르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거나 공의로운 사람이기에 그를 의롭다고 받아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대하여 말하거나 연구할 때는 어떤 사건 하나만을 가지고 말하지 말고, 그의 전체를 놓고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유명하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창세기15:6의 한 말씀만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로 이해하라고 말합니다. 루터가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언제나 믿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창12장에서 고향을 떠나는 것이나, 창22장에서 나오는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복종하여 결단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의를 순종의 행위에서 찾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롭게 보시고 있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의 말씀 때문에 어떤 기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말씀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는 말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만 믿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긴 바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믿음’과 ‘의’는 동등한 관계로 봅니다. “여긴다”는 말은 평가한다, 간주한다, 계산한다는 말입니다. 

4-5절을 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노동자를 예로 들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을 시켰으면 돈을 주어야 합니다. 일한 사람에게 노임을 주는 것을 마땅한 일이지 은혜가 아닙니다. 노동자가 일을 하였으면 채권자가 되고, 주인은 당연히 돈을 주어야 하는 채무자가 됩니다. 내가 일해서 돈을 받는 것처럼 내가 열심히 믿고 노력하여 얻은 구원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주셔서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구원이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노력한 결과가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엡2:8-9의 말씀이 이것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엡2: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6-8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 주님을 주인으로 영접하므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따지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하였는지도 묻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10-11절을 봅니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기에 의롭게 된 것이 아니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올라가 드리려고 했기에 의롭다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무할례시였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이 할례받기 이전이라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지 아니한 모든 자의 조상이 되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례자의 조상이 아니라, 할례받지 아니한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2절입니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우리들이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인정하고,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믿어야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믿어야 하고,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아야 됩니다. 나를 내세우거나 나의 공로로 구원받는 것으로 알지 말고, 오로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음을 확신하여야 됩니다.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데, 경건하지도 않은 죄인인데,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가난해도, 죽음의 고통이 닥쳐와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넘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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