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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숙제와 축제 (눅 14: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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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와 축제 (눅 14:15-24)

여러분, 학교 다니실 때에 숙제 하시던 것 생각나십니까? 특별히 방학숙제는 참으로 고된 것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요즘처럼 아이들이 학원 다니느라 바빠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름 방학 때에는 냇가나 저수지에 가서 수영하고 노느라, 또 겨울 방학 때에는 썰매를 타고 연날리기를 하며 노느라 방학숙제는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개학 때가 다가오면 불과 며칠 사이에 그동안 밀려놓았던 숙제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야 했습니다. 다른 것이야 대충 빨리 끝낼 수 있지만, 일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쓸 내용도 생각나지 않을 뿐더러, 날씨를 적어 넣는 일은 아주 고된 숙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을 통해서 지나간 날씨도 다 알아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지나간 날씨를 알아내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기를 제 때 쓴 친구의 것을 보고 일기를 맞추려고 찾아다녀보아도, 제 때 일기를 쓴 놈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면 개학을 한 후에 선생님께 꾸중 듣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여러분, 저는 어떤 학생이었을 것 같습니까? 방학숙제를 잘 하는 학생이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방학 때 늘 놀다가 막바지가 되면 부리나케 벼락치기 숙제를 하는 학생이었을 것 같습니까?

벼락치기로 숙제를 하다보면 방학숙제가 굉장히 부담스럽고, 개학할 날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습니다.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선생님께 꾸중 들어야 할 것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건 비단 방학숙제만이 아닐 것입니다. 학생에게 숙제는 언제가 부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긴 해야겠는데 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참 공감되는 글이 있습니다. 나누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소장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씨가 쓴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라는 제목의 책에 나오는 ‘인생을 축제처럼 사는 사람들’이라는 아티클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인생을 숙제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생을 축제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을 숙제처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짐을 혼자 지고 가는 사람, 직장에서든지 집에서든지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 남녀간에 교제할 때에도 애인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애인의 기쁨이 곧 자신의 기쁨이라고 여기는 사람, 항상 주기만 하고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이나 자기주장으로 살지 못하고, 언젠가 남들이 자신의 희생을 알아줄 거라 믿으며 힘든 일을 도맡아 합니다. 그러기에 늘 삶이 힘들고 피곤합니다.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천사파이지만, 정신분석적으로 이런 사람을 ‘도덕적 자학증’(moral masochism)으로 분류한다는 것입니다. 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이 희생한 만큼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인정해주고 자신이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이 희생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내가 그보다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 하고, 자신이 더 우월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려 합니다. 겉으로는 천사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은 왜곡된 정서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인생을 숙제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모든 힘든 일들을 숙제를 하듯 자신이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 숙제에서 스스로 벗어나야만 인생을 즐기며 축제처럼 살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숙제와 같은 일들이 기쁨이 되지 못한다면 그런 것들을 때로 내려놓아야 우리의 인생이 축제와 같이 사는 인생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축제처럼 사는 인생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의 말씀입니다. 3년 동안의 짧은 공생애를 사시는 예수님은 동안 무척이나 바쁘게 사셨습니다. 마가복음 3:20절에서 ‘식사할 겨를도 없으셨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바쁘게 사역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늘 그렇게 바쁘게만 사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즐기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생각할 때 참으로 고달프게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는 예수님께서는 웃고 즐기는 삶이 아니라, 엄숙하고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삶의 여흥과 행복 누림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잔치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은 모두 잔치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100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열 개의 드라크마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이 잃어버린 그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에도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 중에 자신의 몫을 미리 달라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탕진한 후에 거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반겨 맞은 아버지도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잔치에 대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잔치를 즐기기도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은 잔치를 즐기지도 않으시고 잔치집에 가시지도 않으면서 잔치에 대한 말씀을 가르치셨다면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되이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잔치를 즐기셨기 때문에 잔치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에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말씀에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신 곳이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였습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가신 예수님께서 분명 그 잔치를 즐기셨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축하하며 흥에 겨워 노래하며 춤을 추는 그 기쁨의 잔치에서 얼굴에 오만가지 상을 하고 계시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주가 떨어져 그 기쁨과 흥이 사라진 그 잔치에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심으로 기쁨의 잔치를 계속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3년 동안 예수님은 잔치를 무척이나 즐기셨고, 잔치에 참 많이 참석하셨습니다. 특별히 잔치의 기쁨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일부러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잔치를 즐기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의 죄인의 친구’(누가복음 7:34)라고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경건하고 엄숙하게만 하셨다면 그런 비난을 듣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잔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이 속한 누가복음 14장은 그 처음부터 잔치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14:1절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떡 잡수러 들어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랍비들은 안식일 만찬을 굉장히 큰 잔치로 치렀다고 합니다. 이 바리새인 지도자가 예수님을 왜 자신의 안식일 만찬에 초대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새인 지도자가 마련한 안식일 만찬 축제에 참석하셨습니다. 안식일 만찬 축제에 참석하셨다는 것은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 가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어서 14:7절 이하에서는 잔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이 말씀을 하신 곳도 역시 잔치자리였습니다. 7절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말씀을 가르쳐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 이하에서는 자신을 잔치에 초대한 사람에게 ‘잔치에 사람을 초대하려거든 부자나 권력을 가진 사람을 초대하기보다는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잔치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말씀의 연속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잔치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 -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없었던 성대한 잔치(축제)를 베푸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자신들과 같은 유대인들만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메시야 잔치에 초청받을 수 있고, 초청을 받고 그 잔치에 참여한 자신들이 복된 사람 아니냐고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잔치, 그런 축제가 아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첫 번째 차이점이 바로 누구를 위하여 잔치를 베푸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메시야 잔치를 베푸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야는 당연히 유대인들을 위한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다.’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는 말씀은 그 대상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큰 잔치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잔치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일부 국한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고, 더 나아가 그 큰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사람들, 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들’까지도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잔치에서 제외시킨 것도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잔치에 불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잔치에 오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실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은 세 사람의 예만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왜 밭을 샀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했겠습니까? ‘밭을 사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밭을 샀습니다. 긴급하게 잔금을 치루지 않으면 밭을 사기로 한 계약이 파기 때문에 급히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때를 놓치면 그 밭을 살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가봐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밭을 샀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밭에 가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밭에 일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사람도 같은 이유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자신이 산 그 소를 시험해 보아야 하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소 다섯 겨리는 열 마리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소 열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부자입니다. 당시 평범하게 농사를 짓는 사람은 소 한두 겨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소 다섯 겨리를 샀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농토를 가지고 있고,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농사를 짓는 부농(富農)입니다. 
  
그 소 다섯 겨리를 산 사람이 잔치에 갈 수 없다고 거절한 이유는 자신이 산 그 소들을 시험해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소를 시험한다는 것은 농사를 잘 지을 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테스트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소를 사는 사람은 소를 사기로 결정하기 전에 이미 그 소가 농사짓는데 유용한 소인지, 적장한 소인지를 테스트해본 후에 사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농부 역시 ‘자신이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해 보아야 하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 소로 빨리 농사를 짓고 싶은 생각에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려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사놓은 그 다섯 겨리의 소를 놀릴 수 없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 농부 역시 자신이 산 소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율법에는 결혼한 사람은 1년간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면제받게 되어 있습니다.(신명기 24:5) 그런데 지금은 전쟁 때와 같은 긴급한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의 결혼식이 열리는 것도 아닙니다. 문맥으로 보아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혼부부인 듯합니다. 그가 잔치 초청을 거부하고 급하게 집에 가야할 명분은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자신이 집에 가서 자기 부인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할 일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이 뭔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 잔치가 어떤 잔치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 잔치를 ‘큰 잔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잔치를 큰 잔치라고 부르는가는 같은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2장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의하면 그 잔치는 ‘임금님이 베푼 아들의 혼인잔치’입니다. 왕자의 혼인잔치입니다. 
  
여러분, 만일 왕이 왕자의 혼인잔치를 베풀고 우리에게 초청장을 보내왔다면, 여러분은 그 잔치에 가시겠습니까? 안 가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그 잔치에 갈 것입니다. 더군다나 왕이 베푼 잔치입니다. 당시의 관습에 의하면, 잔치에 초청하기 위해서는 미리 정중하게 초청의사를 밝힙니다. 그리고 잔치날이 되면 하인을 보내서 그 사람을 모셔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극빈대우를 해 주며 잔치에 모시는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나를 극빈대우해 주며 잔치에 초청했는데, 어찌 안 갈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급한 일이 일더라도 만사를 제쳐놓고 그 잔치에 참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사로운 일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때문에 초청을 거절합니다. 그 일도 다급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일도 아닙니다. 그 일이 임금님의 초청을 거절할만큼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오늘 해야 할 숙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 때문에 거절한 것입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큰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을 초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들의 혼인잔치를 위해서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했습니다. 누구를 초대할 것인가, 어떤 음식을 만들 것인가? 음식을 얼마만큼 준비할 것인가? 잔치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 초대받아 온 사람들을 어떻게 기쁘게 해 줄 것인가? 그런 계획들을 미리미리 다 세워놓았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나고 드디어 잔치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잔치 개막에 맞춰 이미 초대장을 보낸 사람들에게 종들을 보냈습니다. 정중하게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 모두가 잔치에 오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잔치에 참석하겠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때 잔치를 열어 논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작은 잔치자리라 하더라도 참석해주고 축하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잔치가 됩니다. 자리가 비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참석해 주어야 잔치를 베푼 사람이 기쁩니다. 더구나 큰 잔치를 베풀어 놓았는데 그 넓은 잔치마당이 썰렁하다면 얼마나 실망감이 크겠습니까?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큰 잔치를 베푼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님 역시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잔치를 베푸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 잔치에 참여해서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며 행복을 나누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사람 -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거절한 사람은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산다 하면서도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살지 못했습니다. 혹시나 율법에 저촉되는 일은 하지 않았는지, 혹시 저주받을 일은 하지 않았는지, 혹 무언가 잘못 만져 부정해지지는 않을지, 늘 가슴 졸이며 살았습니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에 얽매여서 참 자유와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야 했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숙제하는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이것은 꼭 해야만 하고, 그런 숙제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잔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거절한 사람들 대신해서 잔치에 초대된 ‘가난한 사람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 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놓으신 잔치에 들어가기가 너무나도 부끄러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초청에 거절한 유대인 대신에 자격도 없는 우리를 그 잔치에 주빈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고,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인생을 숙제처럼 살지 않습니다. 축제처럼 삽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웃으시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보고 계신 사진이 캐나다 사람 윌리스 휘틀리(Willis S. Wheatley)라는 분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웃으시는 예수님’(Laughing Jesus)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가시관을 쓰시고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의 그림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그러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많이 웃으셨습니다. 잔치에 참석하실 때마다 축제를 즐기시면서 기뻐하셨고 웃으며 사셨습니다. 
  
이 그림이 제 방 안에 걸려 있습니다. 목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그림이 보이게 걸어놓았습니다. ‘목회를 할 때 십자가를 지는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하지 말고 기쁘게 웃으시는 예수님처럼 기쁘게 목회하자’는 생각에서 웃으시는 예수님의 그림을 걸어놓았습니다. 목회가 늘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웃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목회하려 한다면 내 마음도 기쁠 것이고, 목사인 제가 기뻐야 교인인 여러분들도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에 나오실 때 ‘벌써 주일이 되었어? 또 교회 가야 돼?’ 그렇게 생각하며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오늘도 주일이구나! 기쁨의 날이구나! 오늘 예배드리는 것도 기대되고, 사랑하는 교인들 친구들 만나는 것도 기대되는구나!’ 그렇게 기대하며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오늘 봉사할 때 무거운 마음으로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기쁜 마음으로 하십니까? 찬양대에서 찬양할 때에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축제를 즐기는 것같이 찬양하십니까? 아니면 마지못해 숙제 하는 것처럼 찬양하십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길 때에 숙제처럼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이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으로 봉사할 때 우리는 축제를 즐기는 것처럼 섬길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아닙니다. 주부가 가정에서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안일 하는 것도 마지못해 하는 마음으로 숙제하는 것처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직장에서 내게 주어진 업무를 할 때에도 죽지 못해 하는 사람처럼 얼굴에 인상을 쓰고 불편한 심기로 일하지 말고,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니! 나에게 이런 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다니!’ 그렇게 환호성을 지르며 일해야 합니다. 
  
기왕에 하는 것이라면 숙제하는 것처럼 하지 마십시다. 기쁘게 하십시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축제를 즐기는 사람처럼 봉사하고 일하십시다. 고린도전서 3:17절에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죄의 굴레에서 해방된 자유가 있습니다. 일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난 기쁨의 자유가 있습니다. 인생의 고달픔에서 벗어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결코 숙제하는 사람처럼 살지 않습니다. 매일매일이 잔치하는 사람, 축제를 즐기는 사람처럼 삽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축제처럼 살 것이냐, 아니면 끙끙거리며 숙제하는 사람처럼 살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잔치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 고통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축제를 마련해 놓으셨고, 그 축제의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 축제에 참여하여 축제를 즐기며 사는 사람은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십자가마저 기쁘게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축제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섬김과 봉사가 축제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모든 삶의 걸음들이 축제와 같은 삶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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