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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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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약 5:7-11)

우리가 예전에는 인사할 때 이런 인사를 많이 했습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왜? 밤에 늘 어려움이 많았거든요. 밤에 목이 잘리는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또 한 때는 아침에 만나면 ‘아침 드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 이런 인사도 많이 했습니다. 왜? 너무 어려워서 먹을 것이 없었거든요. 쌀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그저 아침을 먹는 것인데 이렇게 인사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서로 만나면 이렇게 인사했어요. ‘마라나타!’ 이렇게 했어요. 마라나타라는 뜻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너무너무 사모했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주님 오십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우리 오늘 옆에 분들과 마라나타 라고 인사했으면 좋겠습니다. ‘마라나타!!’ 네 그렇습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런데 쓰지도 않고 돈을 너무 많이 모아 둔 분들은 주여 좀 늦게 오시옵소서. 돈을 다 쓴 다음에... 그러나 주님이 빨리 오시는 것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고 소망이지요.

계시록 21장 20절에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렇게 사도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될 가장 아름다운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주께서 오실 때 죽은 자들 또 산자들이 그 앞에 설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찌 보면 천국 동창회가 열릴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간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도 그 때는 다 같이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얼마나 기대되고 즐거운 날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아무도 모릅니다.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누구만 아셔요? 아버지만 아신다. 하나님만 아셔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재림에 어떤 날짜나 시간을 정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이고 이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해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한 번은 새벽에 순시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순시를 하다 보니까 초소에 초병이 없어요. 그래서 어디 갔나 보니까? 그가 피곤한지 땅바닥에 다리를 뻗치고 누워서 자고 있어요. 그는 옆에다 총을 세워 놓았어요. 나폴레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보초 초병의 총을 들고 자기가 그 자리에서 보초를 섭니다. 

여러분 이 초병이 한 참을 자다가 일어나서 총을 찾으니 총이 없어요. 일어나보니까 나폴레옹 사령관이 자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어요. 기절초풍할 일이 아닙니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우리가 지켜야 할 자리가 있고 해야 할 사명이 있는데 우리가 만약에 졸고 있다면 주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울까?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할 때, 우리가 해야 할 그 사역의 자리에 우리가 끼어 있지 못할 때 얼마나 부끄러움을 가질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성경에 약속된 많은 증거들이 있는데 특별히 취소되지 않는 아주 유일한 약속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증거 된 많은 약속들은 다 성취되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남아 있는 약속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어요. 2천 년 전에 초림의 주로 오신 그 분은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깨어서 그 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 오늘 성경 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야고보서 5장 8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주의 강림이 가깝다고 오늘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길이 참고 인내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성경에는 이 약속들이 반복돼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감람산에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그 광경을 바라보는 거예요. 구름을 타고 승천을 하시는 거예요. 제자들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 천사가 말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쳐다보고 있느냐? 얼른 가서 복음을 증거해라.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너희에게 부여된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해라.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올라가신 것처럼 다시 재림하신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마태복음 24장 44절을 자막으로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인자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 한 때에. 그래서 우리는 늘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마치 도적같이 오신다! 도적같이! 도적이 뭐 예고하고 온 적이 있습니까? 예고 없이 오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 19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달란트 비유이지요. 주인이 먼 나라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 종들과 달란트를 결산 한다! 어찌 보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아름다운 복음 전도의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어요. 그리고 그분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실 때에 우리 앞에 서셔서 우리와 결산하실 것이다. 달란트 비유도 예수님의 재림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말씀 또 우리 자막으로 읽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랬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함께 친히 강림하신다. 이 땅에 다시 재림할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시지요. 

계시록 22장 7절에 보면 주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너희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 계시록 22장 12절에 “보라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니” 반복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지키는 자가 복되리라.” 

계시록 22장 20절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주님은 친히 ‘내가 속히 올 것이다.’ 세 번씩 반복했어요. 바로 요한계시록 22장 제일 마지막 장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세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약속은 다 이루어졌어요. 하나도 어긋난 것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실 것도 이미 구약 성경에 스가랴 등 여러 성경에 시편에 많이 예언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메시아인줄로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천국을 완성하기 위해서 다시 오신 다고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어요. 우리는 이제 오늘 그 약속을 기다리면서 이 땅에서 신실한 복음 증거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성경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이것이 비극이지요. 어떤 자들이 있을까요? 

마태복음 24장 48절의 말씀을 보십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려”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그는 방탕합니다. 종들을 때리고 학대하고 밥을 주지 않고 그리고 그가 술 취해서 방탕한 삶을 살 때 주인이 오면 그는 엄한 벌에 처해지게 되고 내 쫓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리석은 청지기입니다. 더디 오리라 생각하는 착각이지요. 

마태복음 25장 5절의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다가 늦게 오니까 다 졸며 잤다. 그러나 지혜로운 처녀들은 등잔의 기름을 준비했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의 기름이 없어서 결국은 결혼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우리는 그 잔치에 다 초대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기대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다 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대림절은 무엇일까요? 2천 년 전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계절이 바로 대림절이다. 오늘 성경은 주의 강림이 가까웠다고.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주의 강림이 정말 가까이 왔기에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적 자세는 무엇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대림절에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첫째로 대림절은 소망의 계절입니다. 우리 옆에 분들에게 한 번 이야기 하세요. “대림절은 소망의 계절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소망의 마음을 품어야 해요.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흑암과 절망의 땅에 빛과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구원주로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분은 약속대로 우리의 왕으로 우리의 위로자로 우리의 구원자로 다시 오신 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림절에 절망한 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혹 여러분 가운데 삶에 지치고 절망한 사람들이 있으면 다시 소망을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늘 소망 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리스도인에게는 끝이 없어요. 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우리의 영원한 승리의 구주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오직 승리만이 있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늘 소망과 희망만 있는 거예요. 그분은 반드시 오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소망을 가지고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을 그 진토에서 일으키신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이 대림절을 보내야 합니다. 여러분 농부는 봄에 파종을 합니다. 씨를 뿌리고 또 여름에 그 파종한 것을 잘 가꿉니다. 그리고 가을에 수확을 합니다. 그러기에 농부는 오늘 성경에 보니까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이 이른 비라는 것은 파종기에 비가 오는데 그것을 이른 비라고 하죠. 

10월 11월경입니다. 그리고 늦은 비는 수확 전에 오는 4월에서 5월에 오는 비를 늦은 비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가을에 수확, 가을에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이런 농부의 소망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이 반드시 오신다는 그래서 우리를 영원한 구원의 축복으로 인도하신다는 소망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인생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대림절에 다 희망과 소망으로 충만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대림절은 소망의 계절입니다.

두 번째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기다림의 계절. 자 우리 7절과 8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로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오늘 성경은 반복해서 ‘길이 참으라.’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인내를 전제로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잘 못 기다려요. 약속을 했다가 30분만 어기면 떠나 버립니다. 어떤 선남선녀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서로 약속해서 만나기로 했다가 만약에 자매가 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만약에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면 그것을 못 기다리고 떠나 버렸다면 그 결혼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인내함으로 만약에 3시간을 기다렸다면 아마 그는 그 원하는 여성과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 거예요. 기다림이라는 것은 인내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다림의 계절에 인내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은 인내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조급함입니다. 조급함.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이 말세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납고 포악하며 조급하며” 마음이 조급해요. 그래서 화도 쉽게 내 버리고 말도 쉽게 뱉어 놓습니다. 이 어려운거죠.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격 급한 사람이 늘 손해를 보는 것이죠. 때로 우리는 인내하지 못해서 참으로 우리가 아픈 일들을 겪을 때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인내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성경의 약속도 우리가 믿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박국 2장 3절에 보니까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딜지라도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한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공원에 산책을 하러 갔어요. 아들과 산책을 하다가 문득 자기가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 생각이 났어요. 그래서 아들을 공원 벤치에 앉혀 놓고 여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아빠가 얼른 다녀올게. 그는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바쁜 일들을 막 열심히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생각보다 길게 걸렸습니다. 그만 아들과의 약속을 깜빡 잊고 5시간이 지났습니다. 밤 10시가 됐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서 공원을 달려가면서 우리 아들이 정말 그 자리에 있을까? 걱정이 됐습니다. 어디로 방황하고는 있지 않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아들은 그 자리 그 벤치에 그대로 앉아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어요. 얼마나 반가운지 아들을 꼭 껴안아 주면서 “아들아! 너무 훌륭하구나. 너 어떻게 5시간 동안 배도 고픈데 집에도 가지 않고 아빠를 기다렸니?” “저는요, 아빠가 꼭 오실 줄로 알았어요. 아빠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으니까요.” 아들이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몰라요.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림으로 인내를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너무 조급한 것이 탈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고도 당장 응답이 없으면 기도를 안 해요. 오늘 기도 하고 내일 응답하시기를 바라는 너무 성급함이 있지 않습니까?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시간을 두고 응답하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어르신은 너무 성격이 급했어요. 자기는 성격이 느긋느긋한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요. 성격이 급한 사람이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지나가다 보니까 한 청년이 배를 붙들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가는 거예요. 옛날 화장실에는 문이 없으니까 저 친구가 급한가보다 하고 봤더니. 들어가서는 바지춤의 끈을 끌러야 하는데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더니 그냥 줄을 싹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바지를 훌렁 내리는 것입니다. ‘아! 그놈 성격 참 급한 놈이다. 마음에 든다.’ 그래가지고 자기 사위로 삼았어요. 성격 급한 사람이 일도 잘 할 것이고 뭐든지 척척 할 것이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결혼을 시켰더니 자기 딸하고 3일 만에 막 싸움이 났어요. 자기 아내를 막 때리는 거예요.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장인어른 제 얘기를 들어보세요. 아 이 여자가 결혼한 지 3일이 지났는데 아직 애도 못 낳는다고!!” 

얼마나 성격이 급했으면 말이예요. 3일 만에 어떻게 애를 낳습니까? 10개월은 기다려야지요. 성격이 급한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성격이 급한 것이 손해가 될 때가 많이 있지요. 뱉어 놓은 말을 주어 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인내를 배울 때 늘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2장 3절에 보니까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하신 것을 참으신 것을 생각하라.” 참으신 그 분이 누구예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무던히도 참고 인해하셨어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그 고통을 참아 내셨어요. 그러기에 그분에게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로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에 보니까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남의 말은 잘 듣되 말하는 것은 더디 말하라. 전도서 5장 2절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면 꼭 실수할 때가 있어요. 막 한참 떠들고 나니까 상황이 그게 아니예요. 이럴 수도 있거든요. 전후 사정을 모르고 현상만 보고 이야기 했는데 그게 아니예요. 이럴 때 너무너무 미안하잖아요. 흥분했던 것이 너무 미안하지요.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라. 

이런 경우가 민수기 20장에 소개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물이 없으니까 하나님과 모세 앞에 막 불평을 했습니다. 모세가 화가 났어요. 그래서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리치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 패역한 자들아!” 이 패역이라는 말은 가장 저주스러운 말이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을 너무너무 싫어하셨어요. 

시편 106편 33절에 보니까 “모세가 그 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그 일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참으로 비운의 지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내 뱉은 그 망령된 말, 저주의 말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늘 말도 조심해야 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 대림절에 인내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평가할 때도 너무 막 흥분해서 극단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들은 세상이 망할 것 같아요. 대통령이 나라를 다 말아 먹는다고! 그런데 망하지 않고 잘 살아오잖아요. 여러분 20년 전 신문을 보면 어떻습니까? 20년 전의 신문을 봐도 막 나라가 말세가 왔다고 끝났다고. 그런데 20년 동안 잘만 살고 있어요. 우리는 너무 극단적으로 평가를 해요. 너무 작은 현상을 보고 전체를 평가할 때가 많이 있어요. 우리는 말을 더디 할 필요가 있다. 왜? 그래야지 실수를 피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 우리 세계는 우리 온 땅은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기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문제도 있지만 기도하면 하나님이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가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가장 든든하죠. 정말 우리 대한민국을 향해서 어떤 분이 그런 글을 썼어요. ‘개천에서 용 난 민족이다.’ 용이라는 것은 좋은 말은 아니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개천에서 용이 된 민족이다. 왜? 너무너무 어렵고 절망스러운 가난과 핍박 가운데 살아가던 민족이 온 세계에 우뚝 선 아름다운 민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조선업 분야에서 적어도 컴퓨터 분야에서 스마트 폰에서 또 자동차 분야에서 세계의 1위를 달리고 있는 그런 민족이 아닙니까? 그러나 때로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작은 현상들 때문에 너무 비관적으로 세상을 평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분 대림절은 기다림의 지혜를 배우고 인내를 배우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그래요.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욥의 인내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인내할 때 하나님은 욥의 말년에 꼭 갑절의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대림절에 참으로 인내를 배울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대림절은 평화의 계절입니다. 옆에 분들에게 한 번 인사해주세요. “대림절은 평화의 계절입니다.” 대림절엔 싸우면 안돼요. 평화의 계절이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 막힌 담을 헐어주셨어요.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평화하게 하셨어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고 그들을 하나 되게 하셨어요. 평화의 계절입니다. 성탄은 바로 평화의 절기 아닙니까? 또한 성탄은 대림절은 용서의 계절이고 화해의 계절이예요. 반목과 질시를 우리는 무너뜨리고 원수와 보복을 던져 놓고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하는 그런 계절이 바로 이 대림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서로를 향해서 원망한다면 이 평화가 깨어질 수밖에 없어요. 자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 9절 말씀입니다. 9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가족 간에 공동체 가운데에서 서로 원망하지 말라. 심지어는 오늘 이 야고보의 상황 속에서는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서 원망하지 말라. 원망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상이 된다는 것이예요. 그리고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는데 너희들은 결코 원망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원망은 평화를 깨뜨립니다. 사랑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평화를 실천하고 평화를 배워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대림절 주님이 주시는 성탄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여러분 깨어 기도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서로 용납하고 화해하고 서로 평화를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회의 작은 자들 소외된 자들을 향해서 관심을 갖고 서로 손을 벌리고 또 주님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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