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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 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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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 6:10-12)


남미의 마야 문명이 멸망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은 ‘아포칼립토’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첫 장면에 ‘거대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었다’라는 자막이 뜹니다. 영화는 한 부족이 사냥을 하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야 문명을 세운 거대한 부족이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칠 사람들을 잡아 가기 위해 사냥꾼 전사들의 공격으로 부족의 평화는 무너집니다. 그들은 무차별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태양신의 제물로 잡아갑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간 사람들은 태양신의 제단에서 머리가 잘려 제물로 드려지게 됩니다. 
 
포로 가운데 ‘표범발톱’이라는 주인공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밀림의 자신의 마을로 돌아옵니다. 사냥꾼인 전사들은 그를 죽이기 위해 추격 합니다. 추격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에 의해 그를 쫓던 사냥꾼 전사들이 한 사람씩 죽어갑니다. 사냥꾼 전사들이 모두 죽고 두 명만이 주인공을 추격합니다. 크게 부상을 입은 주인공은 도망을 치다가 결국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해변에 도달합니다. 그를 추격하던 사냥꾼 전사 두 명도 해변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변에서 한 장면을 보고 꼼짝 못하고 얼어붙고 맙니다. 거기에는 거대한 스페인 함선들이 정박해 있었습니다. 스페인 군사들은 작은 배에 나눠 타고 해변으로 노를 저어 오고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마야 문명의 멸망에 대해 ‘스페인과 같은 외부의 강한 문명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기존의 주장과는 달리 ‘마야 문명의 멸망은 그들의 내부에서 일어난 분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1528년경에 스페인 함대가 남미 대륙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부족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이는 분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남미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입장과 침략자인 서구 사람들이 역사를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달리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이 영화를 생각하게 된 것은 영화가 시작되지 전에 ‘거대 문명은 외세에 정복당하기 전에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었다’는 자막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주인공은 자기 민족의 내부에서 일어난 분열과 싸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죽고 죽이는 내부 싸움 끝에 간신히 살아남지만 그것은 싸움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내부의 분열로 인해 힘을 다 소진한 그들은 막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는 외부 세력인 스페인 군대와 맞서게 됩니다. 내부의 적과 싸우는 가운데 분열될 대로 분열되고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은 외부 세력인 스페인 군대와는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패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움이 벌어지는 곳은 어디입니까? 중동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하마스가 가자 지구에서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아프카니스탄에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전쟁 위협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도 쉼 없이 계속 일어나는 전쟁터는 바로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는 돈, 명예, 사랑, 미움, 분노 등으로 끊임없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내, 남편, 자녀, 부모, 친구, 직장 동료 사이에서 갈등과 다툼이 끊이질 않습니다. 가장 큰 전쟁과 갈등의 문제는 우리 자신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내면의 세계의 갈등과 싸움의 원인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그 싸움의 원인은 바로 외부에서 그 갈등과 싸움을 조장하고 있는 악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우리를 삼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내면의 세계 속에 계속해서 갈등과 분노와 미움을 만들어 분열을 일으키며 스스로 무너지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5장 8,9절의 말씀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의 진정한 싸움의 대상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2절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적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마귀와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만드신 후에 그곳에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모든 것은 주시면서 다만 선악과만은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분명히 죽는다’ 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악과에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담과 하와에게 어느 날 사단이 찾아와서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은 의심과 불순종의 마음을 불어 넣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들이 주의를 기울여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사단도 선악과와 관련해서 아담에게 명령하고 유혹을 합니다. 즉 말로 당신의 뜻을 전달합니다. 하지만 그 말에 따르게 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먹지 못하도록 막지를 않으십니다. 사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따 먹으라고 유혹을 했지만 직접 선악과를 따서 주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따 먹지 말라는 말씀과 사단의 따 먹으라는 말 사이에서 갈등을 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가 누구의 말을 믿고 따르느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고 결과가 달라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마음과 사단의 유혹의 말을 향한 마음, 즉 두 마음이 갈등을 일으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유혹의 말을 더 믿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아담과 하와에게는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성품이 산산조각이 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합니다. 

그 속사람이 무너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의 말을 믿고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부터 사단의 속성을 닮게 됩니다. 그것은 분열과 분노와 미움의 속성입니다. 성경은 이를 겉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겉 사람은 세상의 쾌락과 소유를 추구하며 이 땅의 것만을 쫓아갑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에서 추방된 이후로 인류는 사단의 속성의 지배를 받으며 겉 사람 중심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은 겉 사람과 속사람을 옛 사람과 새 사람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에서 24절의 말씀을 통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 보겠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 즉 속사람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 겉 사람의 영역까지 가득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을 영적인 면에서 보면 겉 사람과 속사람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즉 속사람이 강건하여서 겉 사람을 훌훌 걷어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힘차고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을 온갖 방법으로 유혹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속사람을 짓누르고 자신의 속성인 겉 사람이 왕성하게 활동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지배하는 속사람의 영역과 사단의 성품이 지배하는 겉 사람의 영역인 두 영역이 항상 갈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상태를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악한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귀룰 기울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해 유혹합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 의심의 마음을 불어 넣어 하나님의 말씀과 축복을 의심하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의 마음을 불어 넣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평안과 기쁨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을 불어 넣어 하나님의 것이 아닌 세상의 것을 소유하는 일에 몰두하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분노를 불어 넣어 분노로 인해 가족 간에, 이웃 간에 관계가 깨어지게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싸울 때 대충대충 싸우는 법이 없습니다. 사단은 싸우는 전략을 세워서 싸웁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라고 말합니다. ‘마귀의 간계’란 마귀가 꾸미고 있는 간교한 꽤 입니다. 사단이 우리와 영적인 전쟁을 할 때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허점을 다 파악하고 어떤 사람과 상황을 이용해서 어떤 때에 공격을 해야 하는지를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공격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가정에 부부의 갈등과 다툼, 부모와 자녀의 갈등, 성도간의 미움과 이간질과 분열은 단순한 사람 간의 갈등과 미움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악한 영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지켜보며 틈이 보이기만을 기다립니다. 그 틈만 보이면 언제든지 헤집고 들어와 우리 마음을 요동치게 만듭니다. 우리의 관계를 갈등의 관계와 고통의 관계로 만듭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분열로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석학 C. S. 루이스는 대표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의 회심은 세계 지성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루이스 박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열 명이 술좌석에 웃고 떠들고 있다면 그때 웃음소리는 열 한명이 웃는 소리일 것이다. 열 명이 술 먹고 흥청망청 노래를 부르고 웃고 고함치지만 그들의 뒤에서 그 분위기를 조장하는 마귀의 소리가 보태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불안해 떨고 있다면 그 뒤에 마귀는 팔짱을 끼고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 범하는 결정적인 어리석음은 악의 존재를 믿으면서 그 악의 배후자가 되는 마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오는 한 주간도 살아갈 때에 성령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영의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겉 사람에 눌려 사단의 조롱거리와 비웃음거리로 살아가는 삶을 살지 맙시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님 안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여 겉 사람을 지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삽시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는 성도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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