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 (약 2:23-23)

첨부 1


하나님의 친구가 된 사람 (약 2:23-23)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다정한 말이 있습니다. 바로 ‘친구’라는 말, ‘벗’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사람을 만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나의 친구로, 동료이자 벗으로 사귀게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잘 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잘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보면서, ‘저 사람은 참 인복이 많구나’하는 생각에 부러워할 때가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풍요롭게 되기도, 반대로 위기 속에 빠져 들기도 하는 것이 인생이기에 사람 만나는 복이 있다는 것은 충분히 부러워할 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종종 부모를 잘 만난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부모님과의 만남은 내 결정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는 일은 내 몫입니다. 내가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또 어떤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 할 것인가를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옛 어른들은 사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4번의 기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갑자기 그 사람이 큰 재물을 얻었을 때입니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갑자기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입니다. 마냥 슬퍼하고 있는지, 아니면 뭔가 새롭게 도전하려고 하는지를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때입니다. 인기가 사라졌을 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통해 그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특별히 남자들의 세계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술을 마신 후에 자기절제가 있는지, 주정을 부리지는 않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청나라 시대의 서예가였던 정판교는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친구란 무엇입니까? 친구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러자 스승은 네 가지 종류의 친구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꽃과 같은 친구이지. 꽃이 아름답게 피면 그것을 품에 안고 좋아하지만 꽃이 시들면 가차 없이 내버리는 사람이라네. 

두 번째는 저울과 같은 친구라네. 무거운 물건이나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고개를 금방 숙이지만 가벼운 물건이나 사람을 만나게 되면 고개를 빳빳이 드는 이중적인 인물이지. 

세 번째는 산과 같은 친구라네. 관계를 맺으면 능력을 받아 높은 곳이라도 기꺼이 오를 수 있는 사람이라네. 조그만 묘목을 심은 것 같은데 어느 날 보면 큰 나무그늘을 능히 만들 수 있는 멋진 인물이지. 

네 번째는 땅과 같은 친구라네. 묵묵히, 때로는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부담을 지고 인내할 줄 아는 사람이라네. 하나의 씨앗을 심으면 100배의 결실로 키워내는 인물이라네. 소박하지만 가슴에 원한을 품지 않는 친구이지.” 

하나님에게는 아브라함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분별한다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별할 줄 알되, 차별하지는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세상의 가치관이나 기준과는 다른 잣대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세상은 돈과 재물, 사회적인 지위를 보며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하고 더 많이 가진 사람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면을 통해서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겉모습이나 소유로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 즉 그의 마음과 영혼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지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을 보며 ‘아,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택하셨구나.’하고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거의 유일하게 “이 사람은 내 친구다”라고 말씀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읽은 말씀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가 잘나서도 강건해서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내 벗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간곡히 부르십니다. 그들을 향해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시는 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사야 41:8)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때, 아브라함 앞에 덧붙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벗’입니다. “나의 벗, 나의 친구인 아브라함의 자손아” 마치 좋은 친구를 먼저 보내고, 친구의 아들과 딸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너희는 내 친구의 아들들이고, 내 친구의 딸들이 아니냐? 내가 너희를 돕지 않을 수가 없구나. 내가 사랑하는 아들과 딸처럼 너희들을 대하겠다.” 사랑하던 친구의 아들과 딸을 대하는 모습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슴에 품으시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그러면서 너는 내 친구의 자손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꽉 붙들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나를 믿고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연 아브라함의 무엇이 그를 하나님의 친구가 되도록 했던 것일까요? 과연 무엇이 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소개하도록 한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서 2:23)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일에 대해서 성경은 한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믿으니’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고,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 나를 신뢰하는 사람, 나의 슬픔도 기쁨도 알고 있는 사람, 나를 소중한 존재로 대우해 주는 사람, 그것이 친구 아닙니까?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보면, 친구라는 말은 참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인생에서 우정을 빼앗는 것은 우주에서 태양을 빼앗는 것과도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태양이 없으면 세상은 어떠하겠습니까? 온통 어둠일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친구가 있기 때문에 마음이, 인생이 밝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친구에게 기쁜 일이 생겼을 때에는 한발 늦게 찾아가고 슬픈 일이 생겼을 때에는 한발 먼저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우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보다 오히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먼저 찾아가는 것이 진짜 친구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친구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좋게 말하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다” 나와 같이 있을 때는 나를 칭찬하고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이 행동하다가도 내가 없을 때는 나에 대해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건 친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위에 어떤 친구들이 있습니까? 아니, 여러분은 어떤 친구입니까? 
예수님도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최고의 친구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 그것은 친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과 적대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나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천사의 모습으로, 때로는 선지자의 말씀으로, 때로는 인간의 사건 사고 속에서 찾아오셨습니다. 노아를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도 우리에게 친구로 찾아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만 하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말씀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한다. 너희들 내 친구가 되어주지 않을래.”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임을 선포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면서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누가복음 12:4) 

몸만 죽이고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세상의 권력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육체와 몸, 영혼과 정신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제자들을 향해 ‘내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의 친구’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친구가 된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길은, ‘믿음’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 하면 크게 두 가지 사건을 떠올립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75세였습니다. 성경에는 75세까지의 아브라함의 생애는 기록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는 75세 때 부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그때부터 아브라함의 생에 꽃이 피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땅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오직 말씀만 붙잡고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만으로 도전하는 용기,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 신앙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이 매우 좋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나를 신뢰하고 있구나. 내게 자신의 인생 전체를 맡기고 있구나. 여태까지 자신의 생각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인생을 이제 열어놓기 시작했구나’ 

이것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비결입니다. 지금까지 내 욕심과 내 생각, 내 방식으로만 살다가,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제가 받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조금 자라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게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내게 바쳐라.” 성경은 아버지로서의 아브라함의 심정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은 감정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100세에 낳은 아들,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아들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새벽 일찍 일어나 아들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을 향해서 가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칼을 들어서 아들을 내리치려고 하는 모습까지 담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칼을 내려놓으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기를 네 아들을 아끼지 않을 정도구나.” 

아브라함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슬픔과 아픔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아버지로서의 처절한 슬픔과 아픔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선택한 아브라함을 보시며 하나님은 칭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릴 줄도, 도전할 줄도 아는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또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소중히 여기는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그가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친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또 다른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1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세기 18:17)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숨김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친구이자 동역자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도 용기를 내어 말합니다. “하나님, 안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라 긍휼과 구원을 베푸시기 원하는 분임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 속에 50명의 의인이 있어도 이 소돔과 고모라를 치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의인이 50명에서 10명으로 줄어들 때까지 하나님과 협상을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과 그렇게 사귀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받으며 대답할 수 있는 사이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런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한복음 15:15) 

“내가 3년 동안 너희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더냐? 친구이기에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여기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각과 계획, 아픔까지도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친구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에 맞는 완벽한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된 아브라함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실수도 많았습니다. 때론 겁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는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높이는 자를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내리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 곁으로 가까이 부르시고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십니다. 

다음 주일부터 이 땅에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그 예수님을 친구로 삼으세요. 친구의 이름을 부르세요. “내가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주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내 친구가 되어주시고, 나도 주님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바라고 결단하면서, 이 멋진 친구를 가진 것을 인생의 자랑으로 여기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친구 됨을 허락하셨으니,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내 인생을 다시 열어 놓겠습니다. 이제 주님과 동행하겠습니다.”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의 친구다. 내 음성을 들어라!” 하나님과의 이 귀한 관계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