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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골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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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골 3:15-17)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여러분,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1 5a)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마음에 가득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 하기를 빕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15b)라고 합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행복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행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행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지난 6월, 영국의 민간 싱크탱크인 신경제재단(NEF)이 국가별 행복지수(HPI)라는 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전 세계 151개국을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와 기대수명, 환경오염 지표 등을 평가해 국가별 행복지수를 산출한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43.8점으로 63위에 머물렀습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라는 우리나라가 63위라는 것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 미국은 거의 하위권인 105위에 그쳤습니다. 영국은 40위(47.9), 프랑스는 50위(46.5), 독일는 46위(47.2)였습니다. 주요 선진국들이 대부분 40위권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리고 1위는 중남미의 작은 나라 코스타리카입니다. 코스타리카는 총 64점으로 2009년에 이어 연속 1위에 올랐습니다. 이어 베트남이 60.4점으로 종전 조사보다 3단계 올라선 2위였습니다. 국가 경제순위와 국가 행복지수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것과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을까요? 기독교언론포럼이 최근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올해 한국인의 행복점수는 100점 만점에 61.4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61점은 거의 낙제점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자의 58.6%가 ‘힐링이 필요하다’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즉, 60%에 가까운 사람들이 치료까지는 아니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꼽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질만능주의(32.7%), 극단적 이기주의(19.8%), 사회양극화(16.4%), 무한욕망을 부추기는 사회(11.3%), 그리고 무한경쟁(8.6%) 등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더 잘살기 위해 발버둥질 치는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책은 무엇일까요? 우리국민의 행복감이 낮은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극단적 이기심과 무한경쟁 문화를 극복하는 정치 프레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해결하는 경제정책이 요구된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국민이 바라는 행복’에 대해 발제한 이정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소득수준의 향상만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는 초저성장 시대가 오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그리고 그 대안은 “화목한 가정, 좋은 인간관계와 같은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을 더 많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생활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행복해야 정말로 행복한 사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감사를 회복하여야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불평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적은 것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는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받은 은혜를 감사해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에 감사함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우리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까?
16절 말씀입니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풍성히 거하는 사람의 특징을 말씀합니다. 말씀이 마음속에 풍성히 거하게 되면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일하십니다. 그 결과, 말씀이 우리를 지혜로 가르치십니다. 말씀이 우리를 서로 권면하게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를 찬양하게 합니다. 가르침과 권면과 찬양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의 겉모습입니다. 우리는 성시와 찬송가와 영가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I. 하나님께 찬양하십시오.

노래는 행복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때로 슬픈 노래를 부르며 슬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을 부르면서 정처 없는 나그네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별의 노래’를 부르면서 미래의 이별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래는 현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자신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그가 부르는 노래는 그의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을 찬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시 113:1-2)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오늘의 감리교회가 있게 한 존 웨슬리의 임종의 모습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간호사로서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엘리자베스 리치에 의하여 자세히 기록되고 전해져 왔기 때문입니다. 

1791년 3월 1일(화요일), 돌아가시기 전 날의 기록입니다.

존은 “많이 아프십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찬송을 불렀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그러면 땅 위에 평화가 오리로다.” 존은 이 찬송의 두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하여 부르더니, “나는 쓰고 싶다.”라고 하였다. 펜을 손에 쥐어주었지만 그는 펜을 쥘 수가 없었다. “제가 대신 쓰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라고 말하자, 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밖에는….”이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서 아이작 왓츠의 찬송을 불렀다.

“나는 내가 숨 쉬는 동안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하리라. 비록 내가 죽어 내 목소리가 힘을 잃을 때라도 나의 찬양은 더욱 더 높이 울려 퍼지리라. 내 숨이 멎고 기억이 꺼져가도 나의 찬양은 영원하리라.”

이제 존은 더 이상 설교할 수 없고, 글을 읽을 수 없고, 쓸 수 없고, 생각할 수도 없고, 기도할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 찬양만은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존의 마지막 노래였다. 그는 이 찬송을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부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노래를 이어가지 못하였다. 그는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하였습니다. 이제는 작별합시다.”라고 말하고 다음의 말을 두 번 외쳤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이제 존은 숨이 가빠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데, 아직도 아이작 왓츠의 찬송의 첫줄 “나는 내가 숨 쉬는 동안 나의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를 최후의 순간까지 부르고 있었다. 

존 웨슬리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받아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천상의 행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노래할 수 없는 중에도 찬송하는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으로 감사를 표현하여야 하겠습니까? 

17절 말씀입니다.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어지는 말씀은 계속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만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배당에서 부르는 찬송가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즉 사람에게 대한 것과 우리가 당하고 겪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II. 무엇을 하든지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모든 일에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서 감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그 일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가 불평하는 그 일은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우리들이 모든 일에서 감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들이 모든 일에서 행복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고도원은 아침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을 선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작게 느껴질지라도 빈손으로 세상에 나와 지금의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에 앞서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불평으로 가득했던 삶이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만족하고 그것에 머무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도전의 아름다움도 있어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향하여 달려가는 것도 행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불평하느라고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있는 것을 감사하고 없는 것을 위하여 도전하면 됩니다. 이것은 자기 긍정의 삶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신 복을 헤아리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래 전, 어느 모임에서 김종수목사님이라는 분을 소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김종수목사님을 알지 못하지만 그 분을 소개하는 분의 태도와 내용에 감동받았습니다.

김종수목사님은 자신이 담임하던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천국 방언을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천국방언이라는 것을 만들어 교인들에게, 심지어 유치부 아이들에게까지 암송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천국방언을 만들고 교인들에게 암송하게 가르친다는 것은 처음에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무슨 사이비 종교의 우두머리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 시간, 저도 여러분에게 그 천국방언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신 분들이 오늘 저에게 배워서 다 천국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해 봅시다.

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 미안합니다. // 죄송합니다. // 반갑습니다. // 사랑합니다. // 잘했습니다. // 믿겠습니다. 

얘야 괜찮다 다 모르고 그랬는걸 뭘. // 얘야 괜찮다 다 나 때문이다. // 얘야 괜찮다 내가 썩어야지. // 얘야 걱정 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만 봐라.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얘야 잘 믿어야 한다. // 얘야 잘 살아야 한다. // 얘야 잘 죽어야 한다. // 얘야 영원한 천국에서 더 잘 살아야한다. 

이것이 천국방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천국방언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말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에 천국방언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분명히 표준말인데 방언이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방언은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일부지역에서, 또는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분명히 이 말들은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보통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도 사용하여야 할 말이 되어서 방언이라는 한 것일 것입니다. 천국에 갈 사람은 천국에 가서 사용할 말을 연습하여야 합니다. 천국에 가서 사용할 말을 연습하지 않으면 천국에서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연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잘했습니다. 

믿겠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 살아도 천국 말을 하는 사람은 천국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천국백성이라면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가족을 포함하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한다면 예배당에서만 행복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영적으로 행복하다지만,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없어서 개인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전체적으로 불행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사람들에게 불평이 함께 나오는 입은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내는 샘과 같습니다. 성경은 같은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같은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사람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1) 

그런데 우리는 한 입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내는 아주 특수한(?) 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 어찌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하여도 무엇을 하든지 감사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체질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고,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다시 17절 말씀입니다.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다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단 물과 쓴 물을 내는 아주 특수한(?) 입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오직 단 물, 하나님께 찬송과 범사에 감사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할 수 있습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를 힘입어서’에서 ‘힘입어’[diav/디아]는 ‘무엇을 통하여’ 또는 ‘무엇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라는 입니다.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III.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감사할 이유도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할 이유도,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할 이유도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이유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예수님을 통하면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이자,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능력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김종수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그 분은 어떻게 해서 천국방언을 말하게 되었을까요?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의 아버지는 목사님이셨는데, 41세에 뇌일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졸지에 남편을 여윈 어머니는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모진 고생을 다하였습니다. 남의 집 식모살이를 비롯하여 지게를 지며 삯바느질 하여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키운 아들이 연희전문, 오늘의 연세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방탕하였습니다. 목사의 아내이자 한 교회의 사모였던 어머니에게 술을 사오게 하였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흑노처럼 학대하고, 주모처럼 술상을 차리게 한 못된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나 노여워하지 않고, 비정한 자식에게 털 깎는 자 앞에 선 양처럼 순종하셨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급성 위암으로 쓰러졌을 때,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회개하였더니 오히려 어머니는 “애야! 괜찮다. 네가 모르고 한 것인데, 다 내 탓이다. 내가 썩으면 돼.”라고 하셨답니다. 그는 병상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어머니의 가슴을 만지면서 어머니의 슬픈 가슴의 의미를 처음으로 깊이 깨닫게 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회개하면서 “어머니, 저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썩으셨습니까? 얼마나 아프셨어요?”라고 할 때도, 그 어머니는 “내가 썩으면 돼, 내가 썩으면 네가 잘 될 것이다.”라고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니를 배꽃 피는 계곡에 묻고 난 후, 어머니가 주신 가슴을 파고드는 진하디 진한 사랑의 말씀들이 얼이 되어 천국방언으로 승화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아들을 사랑했고, 아들은 이 예수님의 사랑에 녹아졌던 것입니다. 김종수목사님은 자신의 호를 ‘한밀’이라고 하셨다는데 이것은 한 알의 밀이 썩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압축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모두 어머니의 사랑을 똑 같이 받은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할 수 없는 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고맙습니다.’라고, ‘감사합니다.’라고,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와 능력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일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행복하게 되면 웃겠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인생에 결코 웃을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사람은 웃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웃는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는 못해도 예수님을 믿고 웃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 이름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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