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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을 주노니 (요 10: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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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주노니 (요 10:22-42)


수전절은 히브리 말로 하누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는 성전에 헌신한 날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성전에 헌신한 날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 스룹바벨 시대, 헬라 시대, 헤롯 시대 등 여러 차례 봉헌한바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수전절은 그중에서 마카비 시대에 성전에 헌신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에 제국은 넷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중 유대 땅에 영향을 미친 세력은 애굽의 프톨레미 왕조와 수리아의 안디오쿠스 왕조였습니다.  
안디오쿠스의 아들 에피파네스 왕은 애굽 세력을 정벌하여 자신의 세력 하에 두려는 뜻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군을 이끌고 애굽 원정에 나섰습니다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도중에 예루살렘에 들러 분풀이를 하듯 유대 민족을 사정없이 짓밟았습니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그는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전을 세웁니다. 거기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리며 성전에 돼지 피를 뿌렸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기에 항거하지 못했습니다. 한 삼 년이 지나서 BC 165년경에 독립운동가인 마카비와 그의 형제들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단합하여 일어날 때 국민들이 함께 일어나서 외세를 몰아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제우스 신전을 제거해 버리고 성전을 다시 수리를 하고 정결케 하고 다시금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 더럽혀진 성전을 성결케 했다는 뜻으로 ‘수전절’이라고 하게 됐습니다. 수전절(修殿節)은 한문으로는 ‘닦을 수’ 자를 쓰고 ‘대궐 전’ 자를 쓰고 ‘마디 절’ 자, ‘절기’할 때 그 ‘절’ 자를 썼습니다. 원어에는 ‘엥카이니아’로 ‘새롭게 한다’라는 뜻입니다. 

성전을 새롭게 성결하게 만들어서 매년 12월 중순경에 팔일 정도 제사를 드리는 것이 수전절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집집마다 기름으로 등불을 켜서 밝혔습니다. 그래서 “빛의 축제일이다”라고도 말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잘못된 메시야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필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성전에 불을 밝히며 수전절 지키는 이날에 성전에 왔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하필 이 수전절날, 어두웠던 시절을 되돌아보며 불을 밝히고 있는 이 절기 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예수님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여전히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뭐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의혹이라고 하는 단어는 ‘들어 올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과 마음을 당신이 언제까지 빼앗아 흔들고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늘 “나는 선한 목자다”, 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을 하니까 “언제까지 이런 소리나 하고 다니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까? 즉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왜 나타내지 못합니까?”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 마카비가 혁명을 일으켜서 수리아 군대를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듯이 당신이 정말 메시아라면 마카비처럼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를 로마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진짜 메시야가 되는 것이 아니냐? 우리 민족은 로마의 탄압을 받고 있는데 당신은 저들을 몰아내지 않으면서 어찌 메시아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라며 시비를 걸고 있는 겁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말을 합니까? 그것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메시야가 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실 것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외적들로부터 나라를 해방시켜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최우선순위로 지금 유대를 점령하고 다스리고 있는 로마 군대부터 몰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한데 어째서 예수 당신은 외적은 그대로 두고 메시야인 척만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 뜻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지만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메시야를 눈앞에 두고 보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분이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분명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타나는 증거만으로 본다면 메시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가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외적을 다 물리치고 나라의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려야 할 터인데 그럴 생각은 전혀 없으니 이건 무언가 부족하다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예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분명하게 말씀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질문은 긍정적인 입자에서 “예수여 당신은 정말 메시야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메시야라면 베들레헴을 통해서 와야 하는데 자기들이 알기로 예수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입니다.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말처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이가 나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그들 모두의 생각입니다. 

예수가 행하는 많은 이적들을 볼 때는 혹시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마음도 있다가도 나라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뜻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다 결정적으로 그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께 세례를 줄 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리는 것을 보고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했던 세례 요한조차도 나중에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겠습니까? 그렇기에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 우리는 동일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과연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고 하십니까?
무엇보다 유대인들을 더 혼란스럽게 한 것은 메시야라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할 터인데 예수님은 오히려 보란 듯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칩니다. 제자들도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으면서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는 아주 비판적이면서도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세리라든가 사마리아 사람 그리고 누가 봐도 자기나 부모의 죄로 인해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 되고 귀신 들린 그런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함께 울고 웃는 예수를 보면서 그렇다면 그는 메시야일 수가 없다 그러니 그가 뭐라고 하는지 그의 말이나 한번 들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지금 예수께 와서 말을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우선 순위는 안식입니다. 안식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함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평안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은 일에 매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말라 대신 전날에 이틀 치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치 양식을 거두었지만 안식일까지 두어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거두는 수고를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입니다. 

즉 오늘로 말하면 예배하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생명과 마음의 안식인 것이요 거기로부터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따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원리는 믿고 따르라는 것이 안식일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요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리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런 것조차도 제한했습니다. 예를 들어 당장 죽을 일이 아니면 꼭 안식일에 그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특별히 안식일에만 병자를 고친 것은 아닙니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가운데 안식일에도 기회가 주어지면 뒷날 보자고 하지 않고 그 아픔에서 그날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그에게 참으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며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안식의 뜻을 살려 참 평안을 누리도록 병을 고쳐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그 문자에만 매달려서 그럴 수는 없느니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하는 말에 그냥 속 시원하게 맞다 내가 메시야다 하면 될 터인데 그렇게 말씀하시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메시야라는 증거로 모두가 고개를 끄떡일만한 그런 이적을 보여주시지도 않습니다.
반면 수가성 사마리아 여자에게는 “네게 말하는 내가 그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눈을 떠서 보게 된 사람에게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는 “내가 메시야다”라고 확정적인 말씀을 해 주시면서도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하고 묻는 유대인들에게는 아무런 확답도 주시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메시야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니까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증거를 보여주어도 믿지를 않습니다. 
보십시오. 세계 역사가 다 확인하고 증거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6.25가 북침이라고 남쪽에서 먼저 북쪽을 침략한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남쪽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증거를 갖다 보여주어도 믿지를 않습니다. 그건 다 조작된 증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말만 내세우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하는 가운데 “저 나사로를 세상에 돌려보내셔서 세상에 남아 있는 내 형제들로 하여금 나 있는 곳이 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할 때 이미 저들 가운데 있는 증거를 통해서 깨닫지 못하면 나사로가 다시 살아서 돌아간다고 한들 누구도 믿지를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도 바른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질문은 그래서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들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주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오늘날 교회가 그리고 많은 성도들이 아니 그보다는 앞서서 믿는 목회자들과 교직자들이 멀리는 사회로부터 그리고 가까이는 교회 안에 함께 신앙생활하는 다른 믿음의 형제 자매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다고 할 때 저나 여러분이나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교회에 안 다닌다고 할 때 사실 우리가 입이 열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저도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말의 실수도 많고 때로는 여러분의 눈에 비치는 모습이 이건 아닌데 싶은 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셨고 주님이 세상의 빛이 되어 주셨고 주님이 생명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제불능의 나를 새롭게 빚어가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사울이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짐으로 비로소 바로 보게 된 것처럼 따라서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눈도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간구하심으로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사랑과 긍휼하심을 품어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님의 백성에게서 생명을 빼앗아갈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순교사화를 보면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물웅덩이에 40명의 그리스도인들을 빠트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도 항복하지 않고 모두가 자랑스럽게 찬송을 부르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인들과 군인들이 찬송을 부르며 의연하게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물속에 있던 한 사람이 그만 항복하고 기어 나왔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 병사 중의 한명이 그 웅덩이 속으로 뛰어 들어가 빈자리를 채워 함께 순교해 죽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그날 그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를테면 멋이고 맛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맛과 멋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이 복음화 되고 그 복음으로 이 세상이 정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멋과 맛은 그냥 앉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소금이 물에 들어가면 산산이 녹아 물이 되어버립니다. 촛불은 모양도 존재도 흔적도 없이 다 타버립니다. 누룩이 반죽에 들어가면 모두를 부풀게 만들어 놓고 자신은 맛으로 변해버립니다. 그것이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그런 믿음으로 인도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가장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인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지만 과연 내가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에는 오히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적어도 내가 이 정도 예수를 믿었다면 적어도 내가 이 정도의 직분자라면 이런 저런 수준까지는 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설정을 우리는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몇 년씩 다녀도 아직 글도 깨우치지 못한 아이처럼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은 아닌지 두려울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네가 그러고도 예수 믿는 사람이냐 네가 그러고도 직분자냐 라고 할 때면 그냥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그런 때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둠 가운데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셨습니다. 내가 남들보다는 나아서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우리들의 자화상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0세까지 대도시에서 호화호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했던 일이 우상장사입니다. 

우상 장사란 말 그대로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그의 직업이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한데 그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하여 그 이름도 아브라함이라고 바꾸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가는 과정을 쭉 보면 저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의 본토를 떠났지만 친척을 다 떠나지는 못했습니다. 한동안 그는 조카 롯과 함께 생활합니다. 

물론 좋게 보면 삼촌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 롯을 믿음의 사람으로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또 다른 아픔입니다. 그는 100세가 되기까지 어찌 보면 하나님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그런 일들을 참으로 많이 했습니다. 물론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가나안까지 갔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존경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의 속사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 믿음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흉년이 드니까 슬그머니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가버리지를 않나 애굽에 가서는 바로 앞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지를 않나 다시 돌아와서도 또 다시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께서 불로 멸하시는 장면을 목격했으면서도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 또다시 아내를 누이라고 또다시 속이지를 않습니까? 

오죽하면 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책망하지 않습니까? 네가 어찌 하여 이렇게 말하여 나를 속였느냐? 하마터면 내가 너로 말미암아 범죄할 뻔 하였지 않느냐? 세상 사람이 거꾸로 아브라함을 책망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이 약속을 잘못 이해하여 아내의 말을 따라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지 않나 그나마 여종과 아내를 바로 다스리지 못하여 서로 반목하게 내버려 두어 결국 오늘까지도 세계 역사에 어둠이 깃들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그를 끝까지 붙들어 마침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나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도 아브라함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과 교회가 그리고 목사와 직분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의 본이 되고 칭찬을 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오히려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전에는 내가 교회를 핍박하던 자다. 내가 눈이 멀었다.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눈에서 비늘을 벗겨 보게 하심으로 비로소 보게 되어 이제 깨닫고 보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 그런데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불러주셨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의 복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동일하게 받는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곧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별 볼일 없이 살아가고 손가락질 받을만한 모습이 여전히 우리들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연단하시고 빚으셔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 되게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을 주시기도 하고 깨우쳐 주시기도 하며 또한 동시에 부족한 종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을 기쁨으로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때로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부담이 되고 아픔이 되고 상처가 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아픔이 있어야 고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것은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외양간에서 나온 송이지가 뛰듯 그렇게 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칼을 쓰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고 칼을 들려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칼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여기 저기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아픔을 주님이 먼저 겪으셨습니다. 직접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어머니가 자식에게 젖을 물립니다. 커가면서 이유식도 먹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아이에게 아이가 싫다고 하는 약을 억지로 먹이기도 합니다. 왜 싫다는데도 약을 먹입니까? 왜 아이가 아프다고 우는데도 굳이 예방주사를 맞힙니까? 그게 바로 아이를 건강으로 이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를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지금은 영 아닌 것 같아도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길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사랑스러운 자녀로 빚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우리가 힘들어합니다. 

나도 힘들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건 아니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합니다. 물론 지금 당장 보면 이건 아니지 싶습니다. 사실이지 저나 여러분이나 어떤 때는 보면 못나도 그렇게 못 낫나 싶습니다. 못돼도 너무 못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길 잃고 방황하는 어린 양과 같은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자가 되어 늑대 가운데서 지켜 주십니다. 목자가 지켜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어린 양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은 선한 목자가 되실 뿐 아니라 또한 가장 훌륭한 장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주님의 손길에 저와 여러분을 온전히 맡길 때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으로 인해 우리는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과 사람 앞에 기뻐하심을 입은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이요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꼭 붙들어 주시어서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비판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하시지 마십시오. 빚으시고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빚어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믿고 기도하고 축복하고 순종함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영생을 주시는 주님을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먼저 벧전 1:2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따라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우리 죄가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어린 양의 털같이 희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고 그 보배로운 피를 우리 마음에 뿌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하늘나라 백성이 되게 하여 주셨습니다.  

계속해서 베드로 사도는 1: 3~5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산 소망 즉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이미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유산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앞으로 받게 될 것이 아니라 이미 누리게 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문제는 우리들의 연약함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삶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시험들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우리도 알거니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허물 때문에 생기는 시험도 있습니다.(temptation)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은 군사요 복된 자로 삼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시험으로서의 시련도 있습니다.(trial) 또한 우리의 수준을 알게 하기 위한 시험(test)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합력해서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하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자녀로 우리를 세워 가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외면하신 적도 버리신 적도 없으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서 양 99마리를 두고 찾아나서는 선한 목자 되십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손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나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내가 딴청을 하느라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주님을 향한 믿음에서 언제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그러므로 순간순간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여 믿음의 확실함을 날마다 하나님께 보이는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즘 베스트셀러 가운데 하나인 “빽이 도대체 누구야”라는 책이 있답니다. 다니엘 명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초등학교 때 부모를 따라 미국이민을 갔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이 망해 살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어렵게 학교를 다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AICPA 즉, 미국 공인회계사가 되었습니다. 성적이 너무 좋아 미국 최고 인류 Big 6 회계 감사법인 중 네 곳에서 프러포즈가 왔습니다. 당시 세계 1위로 빅 6 중 넘버 1인 Arthur Anderson에서 좋은 급료와 함께 프러포즈가 왔습니다. 엄청난 연봉을 제의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일성수가 걸렸습니다. 주일날 교회 나가는 것이 보장이 안 되었습니다. 넘버 4까지 모두 좋은 조건이었으나 모두가 주일성수가 문제였습니다. 교회 가는 것이 보장이 안 된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넘버 6인 Coopers and Lybrand 회사를 택했습니다. 그 회사는 크리스천 회사로서 주일성수가 보장되었습니다. 교회를 자유롭게 갈 수 있게 해준다는 조건을 들어주었습니다. 

다니엘 명씨는 No. 6를 택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바보스런 결단이라고 했습니다. 광신자라고 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바보스런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에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1위 회사인 Arthur Anderson 회사가 재무악화로 문을 닫았습니다. 반면에 No. 6인 Cooper and Lybrand회사가 No. 5 회사와 합병하여 No. 1회사가 되었습니다. 

결국 다니엘 명은 승승장구하여 IBM 컨설팅 팀장을 거쳐 ‘GT 컨설팅’ 소속으로 미 8군에서 1조원 규모의 예산을 다루는 프로젝트 팀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꼴찌를 택했는데 하나님은 꼴찌를 일등으로 바꾸시더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교회를 삶의 축으로 삼고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큰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 귀한 믿음의 상급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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