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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땅밟기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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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밟기 어떻게 볼 것인가      
 
- 장훈태 교수 (백석대학교 언론선교학)


땅 밟기 선교,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찬양인도자학교라는 한 단체에 소속된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만든 땅 밟기 동영상 논란이 한국사회와 기독교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지난달 25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된 이 동영상은 기독교와 불교 간 갈등의 발화점이 되었다. 또 기독교 내 땅 밟기 선교에 대한 개념 정리가 되지 않은 상황 비판과 더불어 해답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금번 봉은사 땅 밟기 기도에 대한 기독교내의 논쟁과 비판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땅 밟기 자체가 문제냐는 것과 정복주의 선교관에 대한 신학과 현장의 괴리 문제라는 평가가 일고 있는 형편이다. 

우상과 타종교를 어떻게 봐야 하나

우선 땅 밟기 기도는 정복주의적, 승리주의적 발상으로 기독교 선교에 방해가 된다. 교회가 단기선교팀을 통해 행해지는 땅 밟기 기도는 민간신앙적인 혼합주의가 내포된 것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창조론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땅 밟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땅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라(창 2:15)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비교불가론이다. 그분은 모든 신들과 구분이 되며 더 위대하시다. 그분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분은 창조자이시며 우주의 주관자이시고, 모든 능력과 모든 지혜의 무소부재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가운데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해 효과적으로 이루어낸 연민과 구원의 능력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다른 모든 신성한 열정을 가진 자들보다 훨씬 더 위대하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재적으로 다른 신은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분만이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충성을 받을 만한 대상은 없다. 

그러면 다른 신들은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들을 평가하는데 일관적이다. 그것들은 공허한 것이며 무능력하고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분명히 다른 신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몇 가지 형태를 구분 지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식적으로 범주 혹은 사상으로, 감정적 느낌이나 헌신으로, 현상학적으로 혹은 상상된 경험적 증빙에 의한 것으로, 존재론적으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상상과 감정에서만 존재하는 신들이 모두 신들인가? 어느 정도 현상학적으로 나타나는 신은 어떤 것인가? 성경은 우상과 신들에 연합된 많은 현상들이 사실상 귀신의 능력에 의해 활동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 경우에 있어 그 신은 신이 아니라 신처럼 보이는 불법자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한 분 하나님과 그분만이 인간의 종교적인 표현의 대상으로 섬길 수 있다고 하는 성경적인 증거가 남아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세상 속의 종교는 하나님의 창조론적인 면에서 보면 그리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이다. 


땅밟기의 근원과 단기 선교 

땅 밟기 기도가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 동기는 신사도운동이라 할 수 있다. 신사도운동은 영적전투라는 도해를 갖고 있는데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를 통한 축귀 사역을 강조하는 데 있다. 피터 와그너는 영적도해의 근원을 에스겔 4장 1∼3절에서 찾는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시(市)의 지도를 진흙판 위에, 그리고 그 성읍을 에워싸라고 명령하셨는데 이것은 보통의 전쟁이 아닌 영적전쟁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대 수메르 문화의 중심지였던 니프르라는 도시의 최초 지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지도 위 형상들은 기원전 1500년경에 그려진 것인데도 오늘날 우리가 영적도해라고 부를만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근거로 영적전투와 땅 밟기를 주장하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엽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실 성경에서 땅을 밟으면서 여리고성을 돌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에 순종한 것이다(수 6:2∼5). 이외에 성경 어디에도 영적전쟁을 위해 땅을 밟고 기도를 하라는 말씀은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땅 밟기는 자기 충족과 유익을 위한 것일 뿐 선교현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장기 선교사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일 뿐 아니라 자기기만이다. 만약 단기선교 차원에서 현장을 방문하게 된다면 장기선교사들의 계획과 사역, 연합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짧은 기간에 선교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교회와 자신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다. 

선교 신학적 차원에서 단기선교는 현지 교회와의 협력과 동역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종들이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고백과 더불어 당신의 말들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저에게 말씀하여 주시면 섬기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으로 선교현장을 방문해야 한다. 

그리고 장소에 관계없이 어디서나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태도 역시 중요하다. 마태복음 8장 5∼13절에 백부장이 예수를 만났을 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을 방문하지 않고 말씀만으로도 하인의 병을 고쳤다. 바울의 선교사역도 마찬가지다. 그는 땅만 밟고 다니지 않았다. 그는 지역 교회를 방문하면서 성도들을 일으켜 세우고, 교회를 설립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에 중점을 두었다. 바울의 사역현장에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거룩한 경험이 있었고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선교현장을 방문할 때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물론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단순한 논리적인 추론의 문제는 아니다. 이 명제는 이 세상의 경험적인 실재를 반영해 주고 있다. 역사를 통해 사람들과 문화는 어쩔 수 없이 종교적이었다. 

세계 종교는 인간 존재의 사실로 다루어지지 못한다는 인상을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는 찾지 못한다. 그 기원과 가치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그것들은 창조질서의 실제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형태를 대변하고 있다. 

이처럼 그들은 인식되어야 하며 능동적이며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단순하게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중상모략 하면서 비실체 혹은 유사실체의 개념적이고 감정적인 위치로 격하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학을 위한 도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함과 아울러 다른 종교를 바라보는 것이다. 종교의 존재가 논의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성경이 그것들의 근원과 기능과 적법성에 관련하여 어떤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평가는 우선적으로 부정적이 되겠지만 고도로 분별해야만 한다. 만일 인간의 죄성과 악한 영적 존재가 진리를 왜곡시키고 창조의 사역을 제거해 버릴 수 있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헌신을 받을 수 있고 또 받을만한 유일한 존재시라면 모든 인간의 종교적 표현은 잘못되는 것 같으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와 정도의 다양성은 있게 된다. 종교 자체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은 똑같은 결론을 갖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른 종교들에 대한 폭넓은 반응을 제시해 준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갔을 때처럼 파괴, 선지자들의 경고와 저주와 조롱의 경우에서처럼 논쟁, 애굽에서의 모세, 갈멜산의 엘리야, 구레네에서의 바울처럼 적극적인 대결, 아테네에서의 바울, 환관을 만난 빌립, 고넬료를 만난 베드로의 경우에서처럼 선교적인 적응이다. 

이러한 성경적인 예들로부터 주어진 상황에서 취해진 접근 방법은 직면하고 있는 쪽의 우선적인 의도에 의존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를 위해 기독교인들의 4가지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 순수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효과적인 대응책이 주어진 기독교 공동체는 유익함을 주의 깊게 적용하며 자신의 종교적 통합과 순수함을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걸친 지속적인 주제이다. 유일하신 구원자보다 다른 어떤 구세주의 손길로 구원을 추구하는 것은 고도의 어리석은 행동이고 속임수가 될 것이다. 그래서 말과 행동으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특별한 명령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세계 종교들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의 종교적인 순수함을 유지해야 한다.

둘째, 증거이다. 예수의 사역에 효과적인 대응책에 접근해 간 기독공동체는 인류에게 신성하게 계시된 진리를 선포할 청지기적 책임을 갖고 있다. 선교적 명령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과 유일한 구원을 나누려는 열망에 의해 동기부여가 된다. 그 이유 때문에 현실과 관용을 조절해 보려는 정신으로 수행해야 한다. 

셋째, 겸손해야 한다. 죄의 보편성에 비추어 도덕적 판단의 자기 의로움과 교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상대방에 대한 겸손한 태도는 감동을 주고 변혁의 사회를 이끌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유일한 대응책, 즉 예수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개인적인 믿음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땅 밟기 선교를 강조하기 이전에 성경에서 명령하지 않은 것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선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경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그 타당성이 인정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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