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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교회도 한겨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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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도 한겨울인가?  

- 송태근 목사(강남교회) 
 
  
BC 202년 경,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와 한왕(漢王) 유방(劉邦) 사이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윽고 해하(垓下)에서 초나라 진영은 한나라 대군에 겹겹이 포위되었고, 많은 군사를 잃고 군량마저 떨어져 있었다. 전쟁의 승리를 굳히기 위하여 유방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한밤중에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四面楚歌)’를 울려퍼지게 하였고, 초나라 군사들은 그리운 고향노래에 눈물을 흘리며 전쟁의 열의를 잃고 만다. 울려 퍼지던 초나라 노래는 한의 승리를 확인하며 초의 패배를 비웃는 역설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유사하고 비참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포로시절 바벨론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도록 한다. 주권과 영토는 사라졌고, 언약은 파기되어진 듯한 역사 앞에서 시편기자는 이방 땅에서 더 이상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피를 토하며 외친다. 여호와 노래가 바벨론의 저급 문화 중의 하나로 취급되며 노리개가 된 현실에 대한 쓰디쓴 아픔이었다. 

어찌 한국교회의 모습이 이보다 나은 처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해 한국교회와 합동교단은 안팎으로 터진 일련의 대형 사건들로 내홍을 겪고 있으며, 사회로부터 공개적인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구체적으로 입에 담기에도 거북한 몇몇 대형교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몇 달 사이에 대중에게 공개된 것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교회는 매 주일 예배마다 거룩한 찬송을 울리며 공기도에서는 구국을 말하며 복음을 선포하고 심지어 선교대국으로 성장하는 듯 보이지만, 이는 작금의 위기 앞에서는 오히려 적군의 비웃음을 가중시키는 역설로 더 깊게 한국교회의 가슴을 내려치고 있다. 기본적인 상식에 있어서도 세상의 다른 집단보다 못하다는 자괴감이 교회의 뼛속 깊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이제 교회를 향하여 비난의 수준을 넘어서 원래 그런 자들이라는 무관심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혹자들은 한국교회의 썩은 부위가 이제 드러났을 뿐이라 진단한다. 목회의 기본마저 흔들린 이유가 무엇일까? 주님의 불의한 청지지에 대한 책망의 이유와 동일하다(눅 12:41~45). 그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재산에 대하여 두 가지 불의, 권력남용과 직무유기를 저질렀다. 당시 청지기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다 맡아 주관하는 권세를 누릴 수 있었지만, 주인의 종에 대하여 물리적인 압제를 금하고 있었다. 불의한 청지기는 종을 구타하며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또한 주인이 돌아오지 않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여 주인이 맡긴 소유를 돌보는 일에 직무유기의 모습을 보였다. 

현재 한국교회를 흔들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지도자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주인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 재정이 은밀히 사유화되며 교인들 위에서 마치 제왕처럼 군림하여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남용하고 있다. 목회를 개인의 영광이나 번영과 혼동하고 거기에 훈련되지 않은 리더의 영성이 나쁜 열매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성실히 양떼를 위한 꼴을 준비하고 목양해야할 의무는 점점 더 개인을 위한 일들에 밀리고 지도자는 이러한 직무유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면으로부터 유혹의 초가가 울려 퍼지는 때에 주님 세우신 교회가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일까. 첫째는 이 비극은 어떤 특정인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잘못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일이다. 이는 단순히 몇몇 지도자들의 잘못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현주소요, 한국교회의 철학이요, 한국교회의 과오이다. 에덴동산에서 그러했듯이 죄의 본성은 핑계거리를 찾으려 한다.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엎드려야 한다. 

둘째로는 지도자들은 청지기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한 개인의 신념에 의해서 그 방향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소형교회이든 대형교회이든 주인으로부터 부름 받은 청지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청지기의식이 사라진 목회에는 종교행위를 통한 소위 부의 축적과 사회적 지위의 강화라는 왜곡된 의도를 은밀히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비극적인 결과물을 한국교회는 떠안고 있는 현실이다.

셋째로 한국교회는 연약함을 인정하며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교회 내 건강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잘못된 관행이 반복되면 그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칼빈은 교회 내에 복음과 함께 율법의 역할도 강조하면서, 율법은 죄를 벌하며 억제하는 기능이 있음을 말하였다. 이는 모두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한 겸손에서 출발한 것이다. 재정과 인사에 관하여 겸손히 율법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

목회는 영혼을 만지는 작업이기에 한 인간의 호연지기나 대범한 성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토기장이의 섬세함으로 작은 허점도 사단에게 용납하지 않겠다는 영적 장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시인 윤동주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웠다’라고 읊조렸던 것 같이, 한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된 작은 마음이 회복되어져야 한다. 한국교회여! 다시 한 번 뜨거운 심장을 회복하고 다시 도래할 푸르른 봄의 기운으로 살아나길 기도한다.
 
- 출처 : 기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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