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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성애, 어떻게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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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어떻게 봐야 하나

- 박창진 목사(부산 온종합병원 원목)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

민주주의에서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인간의 개성이 존중되고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인간다운 삶과 인간적인 욕구를 추구하며 사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인간다운 삶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적이다. 인간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다운 삶과 인간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것과의 경계선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인간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것임에도 인간다운 삶으로 받아들이고 용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은 이전 시대와 달리 동성애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 동성애가 다양한 삶의 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고 죄라고 말하면 편협하고 잘못된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죄가 아니라며 인정하고 수용하면 인간을 존중하는 관대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동성애는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비정상적인 변태 섹스의 한 유형으로 말할 수 있는 경우이다. 다른 경우는 정신적, 심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동성 간에 각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신실하게 생활하면서 서로 사랑하여 부부됨을 추구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달리 평가가 필요하지 않다. 사회적으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후자는 성경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성경적인 깊은 성찰이 없이 정죄하는 것은 제고되어야 한다.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가 동성애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한 예이다. 에이즈는 동성애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생기는 질병이다.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진술

성경은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죄의 경향성을 언급하며 동성애를 여러 죄악들과 함께 다루고 있다(로마서1:26-32).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 수군거림과 중상과 신을 미워함과 불손함과 오만과 자랑, 악을 꾸밈과 부모를 거역함과 우매함과 신의가 없음과 무정과 무자비. 동성애는 죄악들의 나열과 달리 구분하여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한 행태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마음 상태로 내버려 두시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다. 그에 대한 심판은 죽음인데, 이런 일을 하면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 인간들을 두둔한다고 정죄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 죄로서 동성애를 언급한다(고린도전서6:9-10). 교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하며 씻기고 거룩하게 되고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한다. 곧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음에도 이전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신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물론 어쩌다가 한번 그러한 죄를 범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습관적인 경우를 가리킨다. 그 자체가 생활인 경우이다. 이처럼 성경이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는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그때와 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노예 제도가 용인되었지만 시대의 흐름과 함께 타파되는 것과 같은 원리로 동성애가 그 당시에는 죄이지만 현대에는 아닐 수 있을까? 동성애와 관련한 오늘날의 관대함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가 아니다. 노예 제도 폐지와 같이 교회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한 형태이다. 오늘날은 동성애와 함께 취급된 여러 죄와는 다르게 취급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동성애에 대한 관용은 성경적인 원리가 바르게 적용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김강일 님은 ‘하나님은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다’(http://v.daum.net/link/11457350)고 주장한다. 

그는 레위기18:22, 20:13이 동성애를 말씀하고 있음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율법에 의하면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옛 언약의 백성들에게 동성애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은 분명하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 있어서 옛 언약의 하나님 명령이 취소되거나 하나님의 뜻이 바뀌었다고 진술하고 있지는 않다. 동성애와 관련하여서 그 어디에도 그러한 내용은 없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용법을 보면 율법을 더 강화하신다. 살인을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만이 아니라 분노하고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까지 살인에 포함시키신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어떠하셨을까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신약 성경에 동성애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고 말한다. 신약 성경에서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 내용으로 동성애를 가리키는지 아닌지를 가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가운데 로마서에서는 남자가 순리로 성 관계를 가지는 것을 버리고 역리로 사용한다고 기술했다. 무엇을 가리킬까? 그 당시에는 동성애가 없었다면 모를까 구약 시대부터 있었던 동성애가 그 당시에는 없었을 리가 없다. 동성애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바울 사도가 뭘 가리키려고 했는지는 명백하다. 그는 ‘버리고’라는 표현을 앞세워 원래부터 동성애인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어떤 신학자의 주장을 수용한다. 순리대로 이성애를 하다가 그것을 버리고 동성애로 옮긴 경우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이 처음부터 동성애를 추구하지 않는 현실에서 이성애를 버리는 것으로 동성애를 표현하였다는 것으로 봄이 더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동성애가 죄라는 전제하에서 그 설명에 있어서 이성애를 '떠나서'라는 표현을 한 것이지 원래부터 동성애였다면 죄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전 6:9의 경우-남색-는 동성애와 이성애의 항문성교 모두에 적용되며, 그것은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이용하고 모독하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이성애에서도 그 당시에 항문성교가 일반적이었다는 뜻이 된다.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남색이 동성애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로 여겨진다. 

그는 “동성애는 이성애와 마찬가지로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으로 가치중립적이다. 성이란 것은 개인에 의해서 좋은 목적으로 또는 나쁜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동성애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성애가 가치중립적이라면 율법에 의해서도 정죄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구약에서 정죄되었다는 말은 그것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동성애가 가치중립적이면 이성애를 떠나서 동성애로 간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마서를 그의 주장과 같이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죄라고 진술하고 있다면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뜻이 된다. 

성경은 동성애를 가치중립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가치중립적으로 보는 것은 성경의 진술의 결과가 아니라 현대인의 관점을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수용하였기 때문일 뿐이다. 동성애에 대한 현대인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잘못이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경향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보셨는데, 신약 시대에 와서 그것이 변하였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인간다움과 거리가 먼 동성애

동성애는 인간다움과도 거리가 멀다. 인간다움은 인간이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인간다움은 하나님을 배제하고서라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대상에 따라 구분된다. 동성 간의 사랑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된다. 이성 간의 사랑은 부부됨을 추구할 수 있으며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함께 복되게 살아가는 것을 지향한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자녀를 낳고 가족을 이루어서 삶의 전수를 통한 인류의 존속을 추구하는 것이 핵심적인 사안이다. 동성애는 두 당사자가 아무리 멋있는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서로를 위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이와는 무관하다. 

어떤 이들은 동물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동성애를 말하며 인간에게서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 자체로 동성애가 인간다움과 거리가 멀다는 반증이다. 인간을 동물의 수준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본능을 따라 사는 동물과 인간을 동일한 가치와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 인간에게 있어서 동성애는 동물들의 본능적 행동과 같은 수준의 것이다. 본능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지만 본능이라고 하더라도 통제해야 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는 합당치 않은 것이다.

편리성의 추구인 동성애

동성애는 어떤 의미에서 편리성의 추구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험난한 길이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표현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한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 함께 생각을 공유하며 상대방을 세워주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오늘날 그렇게도 많은 부부들이 이혼하는 것은 그에 대한 반증이다. 

그런데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함께 살면서 서로를 배려하며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훨씬 쉽다. 자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부부되어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에 비하여서는 아주 쉽다. 자신의 몸을 통하여 자녀를 낳고 자녀를 기르는 과정도 생략되니 더욱 그렇다. 그렇게 함께 멋있는 사랑을 하였다고 하여서 그것 자체로 감탄과 존경을 보낼 수는 없다. 과연 그들이 이성과 결혼하였다면 그렇게 감탄할 만한 삶을 살았을까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성과 결혼하였더라도 그렇게 감탄한 만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굳이 동성애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동성애는 쉽고 편리한 길을 택하여 걸어가고 있는 것이면서 창조 질서에 대한 거부이다. 부부됨이 이성 간에 서로 사랑하여 한 몸을 이루고 출산을 통하여 삶을 전수하며 인류의 존속을 꾀하도록 한 창조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거부는 아님

동성애에 대한 거부가 곧 동성애자에 대한 거부는 아니다. 이는 구분되어야 한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과 동일한 원리이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 대하여 정죄하지 않으셨지만 간음 자체는 정죄하셨다. 그 여인에게 다시는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 여인이 자신의 생활을 위하여 계속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시면서도 그 여인을 품으셨다고 주장하며 동성애자들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전혀 정당한 근거가 없는 추측을 앞세워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는 태도이다. 정반대로 그 여인은 예수님의 보호를 은혜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을 수도 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떠난 이후에 어떻게 살았던지 상관없이 간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 유효하다. 동성애자들을 품는 것과 동성애를 거부하는 것은 온전히 예수님의 본을 따른 성경적인 것이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도 아니다. 소수자이기에 차별을 받아서도 안 되고 반대로 우대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적 원리를 따라 그 사안을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때로 심판은 신께 맡기고 우리는 함께 서로를 인정하며 살아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심판이 신께만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다. 동성애에 대한 거부는 그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바를 전달하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에 말하는 것이다. 동성애자로 살다가 최종적인 심판대에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신의 심판을 받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심판대에서 슬피 울면서 “왜 우리에게 동성애의 결국에 대하여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과 밖의 차이

이는 어디까지나 기독교의 입장이다. 기독교 안에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입장이다. 동성애를 허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말하는 거짓말은 수용되지 않아야 한다. 신앙적인 관용인 양 말하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기독교 밖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어야만 하는 입장은 아니다. 기독교 밖에서도 절대적으로 통용되도록 만들어야 하는 입장은 아니다. 다만 민주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의 입장으로 밝히는 것이다. 찬성하는 입장을 자유롭게 밝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법적으로 동성애 금지가 수용되기를 바라면서 정당한 절차를 따라 노력해야 하는가? 그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고 강제적으로 금지시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신자라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의 입장을 밝히고 의식을 일깨우는 정도로 그쳐야 하는 것 같다. 

반면에 차별 금지법에 대해서는 반대하여야 한다. 동성애를 강단에서 죄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기독교 밖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따라 동성애가 죄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기독교 내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 밖의 입장이나 기독교 내의 입장에 대해 각기 자기주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교회는 동성애자들을 경원시하지 않아야 한다. 거짓말하는 자와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특별히 더 큰 죄가 되는 것처럼 말하며 동성애자를 적대시하지 않아야 한다. 그들을 품고 서로 교제하며 위하여 기도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이성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 돌이킬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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