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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9> 서대문형무소 인근 복음화 위해 교회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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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8년 5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사형수가 된 아버지가 수감돼 있는 서대문형무소로 면회를 다녔다. 형무소에는 박창건 목사님이 형무소 목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형무소의 교무과 직원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고 아버지의 억울한 복역에 마음 아파하는 형리(刑吏)들도 있었다. 그중엔 훗날 목회자가 된 분도 여럿 있다. 박 목사님은 아버지와 연세가 비슷해 나에게도 각별하게 친절을 베푸셨다.

한번은 박 목사님의 안내로 형무소 소장을 만났다. 소장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의 친절은 생생하다. 소장은 아버지를 자신의 집무실까지 올라오게 했고 차도 대접하며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그런데 소장은 담소를 나누다가 지나가는 말로 이런 얘기를 했다.

“여기 서대문 지역에는 교회가 없어요. 형무소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으면 형무소를 찾아오는 수감자들의 가족들에게도 소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박 목사님과 나는 이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다음 주간, 신학교 학우회 임원들과 논의했다. 그리고 형무소 교무과 직원들과도 얘기했다. 형무소 직원 중에는 황해도 신천 출신 백상건 집사가 있었다. 그는 형무소 옆 200m도 안 떨어진 곳에 신천서부교회 출신 ‘문 장로’라는 분이 살고 있다고 전했다. 박 목사님과 나는 그 길로 문 장로를 찾아갔고, 백 집사는 신천에서 남하한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나섰다.

문 장로는 적산가옥 2층에 살고 있었고 아래층은 용도가 분명치 않았다. 헛간 같은 꽤 넓은 공간이었다. 나는 가마니 10여장을 얻어다가 바닥에 깔았고 30∼40명이 앉을 공간을 만들었다. 나는 찬송을 인도하고 박 목사님은 설교를 했다. 그곳엔 김익두 목사의 지도를 받던 황해도 신천서부교회 장로, 집사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이렇게 교회를 이뤘고 이름은 ‘서대문교회’로 했다.

담임목사는 박창건 목사가, 나는 전도사로 일했다. 문 장로의 2층 집은 얼마 안 가 너무 비좁게 되어 쓸 수 없었다. 주일마다 모이는 신자가 50명이 넘어가면서 새로운 예배 처소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찾은 게 문 장로 집 맞은편에 있던 2층 양옥이었다. 그 집엔 ‘인수학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몇 번 찾아가 물어보니 소녀들에게 직업 교육을 하는 사회사업 기관인데 주말엔 비어있다고 했다. 그 집을 관리하는 주인이 새문안교회의 박 장로라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박 장로를 만나 서대문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박 장로는 흔쾌히 허락했다.

서대문교회 간판은 그다음 주일부터 인수학원 건물에 붙었다. 인수학원은 서대문형무소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박 목사님과 나는 서대문형무소와 서대문교회를 오가며 특수한 목회를 했다. 나는 형무소 교무과장실에서 아버지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뵙고 책도 여러 권 가져다 드렸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며 교훈을 주셨다.

나의 서대문교회 사역은 아버지와 서대문형무소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특별한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었다. 나는 신학교 졸업과 함께 황해도 신천에서 오신 김경하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청빙하고 지리산 밑의 무교회 지역을 향해 정처 없는 나그네 전도사 길을 떠날 때까지 서대문교회에서 일했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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