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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력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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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욕망

    

 

본문: 9:7-16

 

 

다윗 왕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엄청난 고난을 겪습니다.(삼하15:1-18)

북한에서는 권력투쟁으로 인해 죽은 자가 허다합니다.(권력의 신격화)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좋은 일이 많다는 것을 본능처럼 알고 있습니다.(지배의 욕구)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언어를 습득하면서부터 그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질주하며 어느 만큼은 그것을 얻습니다. 그런데 권력은 그 속성상 폭력을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들은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자애로운지 또는 효용성이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태조 이성계의 드라마를 이루고 있는 구성도 권력입니다. 그걸 보면서 이 시대의 정치도 과거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고요. 그런데 정몽주처럼 권력에 동의하지 않을 때가 있죠. 그러면 권력은 가차 없이 그에게 폭행을 가합니다. 그렇다고 권력의 폭력적인 속성이 권력에 저항하는 이에게만 대항을 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권력은 항상 폭력의 대상을 찾아 배고픈 하이에나 같은 것입니다.

사회가 이렇게 권력을 지향하고 있으면 폭력은 일상이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온갖 폭력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권력지향적인 사회라는 방증입니다. 어떤 경우 폭력은 상냥한 얼굴로 포장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른바 달콤한 폭력입니다. 아마 교회에도 은폐된 폭력이거나 달콤한 폭력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달콤한 폭력이나 쓴 폭력이나를 막론하고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그게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폭력이 쌓이다가 발산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희생양입니다. 달콤한 권력의 하수인인 동시에 자기도 권력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호시탐탐 내 권력을 받아 줄 만만한 존재를 늘 물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만한 대상이 포착되면 감춰뒀던, 그동안 당하고만 살던 자신의 폭력성을 끄집어내서 야수처럼 돌변하여 다른 대상을 공격해댑니다. 교회에서도 갈등이 발생하면 얌전하게 기도만 하던 사람들이 쌍권총을 찬 황야의 무법자가 되는 걸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희생양의 대상이 반응하면 더욱 크게 눈을 부릅뜨고 공격을 합니다. 이렇게 온갖 층층의 권력이 가지고 있는 폭력의 내재성을 모두 다 받아 줘야 하는 사람들이 사회 안에 존재합니다. 폭력성의 노리갯감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체적으로 극심하게 가난하거나,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정상적이지 않는 분들이 그런 계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배제된 사람들입니다. 세상 밖으로 쫓겨난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폭력은 누구도 눈치 채기 어렵습니다. 또 때로는 그걸 눈치 챈다고 해도 은밀하게 폭력을 당하는 그 사람의 아픔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당한 학생들을 두고 어느 권력을 가진 목사가 말했다는 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가지 배를 타고 가니 그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냐.” 이런 게 폭력입니다. 돈 조금 덜 가진 사람을 깔아뭉개고 멸시하는 감정과 언어의 폭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천연덕스럽게 지껄입니다. 그걸 듣고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다. 폭력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도 일종에 무의식의 동조입니다. 간접적인 폭력인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희생양-폭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권력 메커니즘에 관한 일들은 초대교회 시대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러한 권력의 폭력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반응했으며, 우리에게 어떻게 반응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 헌정사(憲政史) 70년에 11명의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이 중 9명이 비운(悲運)의 대통령이었고 2명만이 온전했지만 이들 역시 평탄치 않은 말년을 보냈습니다. 초대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혁명에 밀려 하야하고 망명지에서 별세했습니다. 윤보선은 내각제의 대통령으로 5·16 쿠데타로 물러났고, 최규하는 말 그대로 '임시 대통령'이었습니다. 박정희는 장기 집권 끝에 부하에게 총 맞아 사망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퇴임 후 감옥살이를 했으며 노무현은 퇴임 후 자살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는 임기 중 탄핵으로 파면되었고, 이명박도 옥중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단순히 비운으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비정상이며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 정치제도에 질병적 요인이 있는 것 아닌가 여겨집니다.

 

본문은 사사 시대의 위대한 영웅 기드온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벌어진 사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 이야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와 더불어 교회학교 어린이들에게 아주 사랑받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겨우 삼백 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적진에 접근한 기드온의 용기는 장엄한 느낌을 자아내기까지 합니다. 그의 부하들은 한손엔 항아리에 숨긴 횃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나팔을 든 채 적진에 은밀하게 접근하여 일시에 항아리를 깨뜨리고 나팔을 붊으로써 적들을 교란시켰습니다. 자중지란에 빠진 적들은 서로를 죽였고 기드온의 용사들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기드온은 이후에도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했고 백성들은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그 청을 뿌리칩니다.

"나는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아들도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8:23)

'오직 주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이 고백이 이스라엘의 청년기라 할 수 있는 사사시대의 에토스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자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가나안의 토착신인 바알을 섬기기 시작했고, 야훼 하나님은 잊혀졌습니다. 위기가 해소되자 슬그머니 다산과 풍요의 신에게로 돌아섰던 것입니다. 그들은 타자들을 진심으로 환대하며 살라는 야훼 하나님의 요구보다는 자기들의 욕망의 부름에 충실했습니다. 환대란 무엇입니까? 다른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기의 안일한 평안이 방해받는 것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변덕스럽습니다. 서경과 중용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위태롭고, 참을 지키려는 마음은 희미하니,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하나로 모아, 오로지 그 중정을 꼭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게 마련이고, 그 순간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그 총명하고 신심깊던 기드온도 어느 순간 자기 성공에 도취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왕이 되어달라는 청은 단호히 뿌리쳤지만 거의 왕적 존재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아내가 많아 친아들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아비멜렉은 권력욕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로부터 상당히 따돌림을 당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세겜에 터잡고 살던 외가에 가서 자기 꿈을 실현할 지지기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후, 그곳에서 얻어낸 돈으로 건달과 불량배를 고용하여 자기를 따르게 합니다. 아버지의 본가가 있는 오브라에 가서 그는 자기의 배다른 형제들을 한 바위 위에서 다 도륙했습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처럼 잔혹합니다. 살아남은 것은 막내아들인 요담뿐이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세겜에 있는 돌기둥 곁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이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한 이들이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과 밀로의 온 집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실의 절반만 반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세겜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한 이들은 그 성읍의 유력자들이었습니다. '밀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뭘 말하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고대 그리스 도시의 아크로폴리스와 비슷한 것으로, 도시 안에 돋우어 올린 지면 위에 건축한 성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이들은 세겜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친족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아 그를 지지한 것입니다. 벌거벗은 이익만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득권자들의 탐욕과 한 야심가의 정치적 야망이 결합되어 그러한 참극이 빚어진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요담은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을 향해 외칩니다. 그게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리심 산은 요단강 서쪽에 있는 산이지만, 그 지리적 위치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큰 산입니다. 그리심 산은 에발 산과 더불어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선포되었던 곳입니다. 요담은 상징성이 큰 그곳에서 세겜 성읍 사람들, 곧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했던 유력자들을 향해 우화 하나를 들려줍니다. 우화는 나무들이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길을 나섰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나무들은 먼저 올리브 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 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올리브 나무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부탁하지만 거절당하고, 포도나무에게도 부탁하지만 역시 거절당합니다. 기름을 내고, 달고 맛있는 과일을 맺고, 포도주를 내는 등 각자에게 맡겨진 아름다운 일을 포기한 채 다른 나무들 위에서 거들먹거릴 수 없다는 것이 이 세 나무의 공통된 대답이었습니다. "내가 어찌……다른 나무들 위에서 날뛰겠느냐?" 그 나무들은 자기들에게 품부된 역할을 벗어날 생각이 없습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 가서 "네가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라"라고 제안합니다. 가시나무는 망설임없이 그 청을 받아들이겠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나의 그늘 아래로 피하여 숨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가시덤불에서 불이 뿜어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살라 버릴 것이다"(15). 이 대목은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폭력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는 사람들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유혹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기의 의지를 누군가에게 강제할 수 있다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매우 달콤한 유혹임이 분명합니다.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에게 자기 그늘 아래로 피하라고 말합니다. 가시나무 그늘 아래 머무는 자는 날카로운 가시에 찔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멜렉은 높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 자기 형제들을 도륙했습니다.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입니다. 그러나 세겜의 지도자들은 그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자기들의 특권을 잘 지켜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랄 뿐만 아니라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땀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생명이 자기 몫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고, 모든 피조물들이 조화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정치의 본질도 그러합니다. 정치인들은 대개 특정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권자들의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불의한 이해관계에 따라 결합한 권력은 언제나 파국을 맞게 마련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제일 먼저 등을 돌린 이들은 그를 왕으로 세웠던 세겜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내전 끝에 아비멜렉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망대 위에 있던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절명 상태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나무들 위에 거들먹거리던 가시나무가 피할 수 없었던 운명입니다.

 

1762513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영조가 조선을 통치하고 있었을 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팔일 만에 굶어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세자의 부친이었던 영조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아들을 살해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당시 정치적인 큰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노론의 압력을 받은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명을 내려 자결토록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감금하고 그 안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열 한 살이었던 정조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영조는 사도세자를 끝내 뒤주 안에서 꺼내주지 않았다. 뒤주를 자물쇠로 잠그고 못질을 하여 아무도 열 수 없도록 했고, 먹을 물과 음식을 완전히 차단하여, 사도세자가 갑갑한 뒤주 안에서 굶어죽도록 방치했던 것입니다.

정조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고 왕이 되었을 때, 신하들 앞에서 한 말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것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피 맺힌 한 문장의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노론파 신하들이 불안과 공포로 몸을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조가 친 아들 사도세자를 죽였지만, 영조가 죽은 후에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불안한 마음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언제 어떤 일로 또 다시 피바람이 불어와 자신들이 정치적인 희생물로 사라지게 될 건지 알 수가 없었던 탓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친아들을 죽이기까지 온갖 욕망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 권력입니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권력을 얻기 위하여, 피를 흘리고 죽거나 혹은 반정을 일으켜 권력을 잡기도 했었다. 하지만 모든 인간들은 한 줌 흙먼지로 돌아가고야 맙니다. 왕도 장군도 위대한 학자나 천재적인 예술가와 종교지도자도 때가 되면 숨을 거두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권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자다가 깬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은 것이 물질이고, 명예이며, 권력이자 인간사의 희로애락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욕망이나 감정에 치우친 삶이 아니라, 언제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순수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신앙적인 삶의 답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신학자 클라크(James Clarke)는 정치인을 정치가(statesman)와 정치꾼으로 불려지는 정략가(politician)로 나누었습니다. 정략가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오로지 다음 선거를 생각합니다. 말로는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하는 국민의 복리증진, 이른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자신과 다른 집단이 권력을 잡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합니다. 정권을 잡기 위한 갖가지 이슈를 만들어 '밀어내기(push)''끌어당기기 (pull)'를 통해 편을 가르고 차기 선거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 불리기에 몰입합니다.

술 중독에 걸리면 음주가 생활을 위한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버리듯 권력 중독에 걸리면 모든 것을 권력 회득에 초점을 맞춥니다. 패거리나 시정잡배들처럼 옳고 그름은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결정되고 사고는 흑백 논리의 감옥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순수를 잃어버리고 늘 저의가 무엇인지 추측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자기 합리화를 꾀합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회에 사는 정치 소비자들은 늘 정치 중독자들을 욕하면서도 정치 게임을 즐기며 자신도 모르게 정치 논리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신앙인은 권력 중독으로 신앙의 양심을 마비시켜서는 안됩니다. 권력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10:45)”라고 말씀했습니다.

 

권세욕은 교만이나 자부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권세욕은 질투와 마찬가지로 가장 나쁜 죄악입니다. 권세욕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죄악 속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권세욕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에 반기를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듯이 우리도 권세욕으로 인해 예수님께 자리를 비어드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았을 경우, 그것이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책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죄악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우리가 이런 지배욕에서 벗어나려면 첫째 성령께서 당신이 모르고 있는 지배적인 성향을 드러내 주시도록 간구하십시오. 둘째, 당신이 지은 나쁜 죄를 뉘우치고 담대하십시오. 셋째, 가시관을 쓰신 겸손하신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나는 당신 곁에 머물며 이제부터는 당신의 그 겸손하고 온유한 자리를 택하겠습니다. 나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밖의 어디서나 다른 사람에게 나의 지위와 권리를 나누어주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은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에서 언젠가는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담 자손으로서 우리 모두가 권세욕의 죄를 지어야만 하듯이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겸손한 성향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겸손으로부터 얼마나 찬란한 권세가 나타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잠언의 내용을 보면 권력욕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조항에 다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한 눈, 거짓된 혀, 무죄한 자 의 피를 흘리는 손,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 하나님은 인간이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권력은 잠깐 대여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공의롭게 사용하면 축복을 받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인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만일 직장에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오면, 하나님이 그렇게 얻어지는 권력을 축복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우리가 고상하고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 방법이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반대로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공정하고 정직하게, 인내로써 화목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능력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인생 말년에 카프리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공포 정치를 하다가, 주후 37년 그 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파면당한 뒤, 로마로 돌아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기록합니다.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필립은 모두 백성의 저주 속에서 살다가 그들의 자식 대에서 헤롯 왕조가 소멸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는 [예수전]을 쓴 르낭의 지적처럼 '온 인류로부터 저주받은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 모두 일인자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듯이 보였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에서 지니고 누렸던 것 중 그 어느 것도 비참한 최후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의 공통된 최후입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죽음이 덮쳤을 때, 죄 문제의 해결 없이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세상 권력이나 부귀영화가 결코 우리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모두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잠시 채워 주는 수단은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 코끝에서 호흡이 멎은 이후를 결코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자신에게는 믿을 구석이 전혀 없기에 예수님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최후에 웃습니다.

* 기도: 우리를 구하시려고 섬기러 오신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세상권력의 허무함을 배웠습니다. 헛된 권력의 욕망에서 벗어나 우리가 지혜로워 지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내 것인 양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거만하지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고 낮아져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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