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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이홍렬 <1> 데뷔 40년 눈앞… 지금도 남 웃길 때 제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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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많은 사람 앞에서 이 네 글자만 이야기하면 대번에 웃음이 빵 터진다. “귀, 곡, 산, 장”.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분들일수록 더욱 효과만점이다.

이 콩트를 처음 했던 게 1993년이다. 어느덧 25년이 지났다. 이응주 MBC PD가 당시 ‘오늘은 좋은 날’ 프로그램을 같이하자고 했다. 귀곡산장은 그중 한 코너였다.

귀곡산장 주제가를 기억하는가. 오랜만에 어깨를 들썩이며 같이 한 번 불러보면 좋겠다.

“망태 망태 망망태. 망구망구 망망구. 우리는 산장지기. 괴상한 노인. 망태, 꺼지지 않는 불꽃. 망구, 밤에 피는 장미. 누구든지 환영해요. 귀곡산장. 간이 커도 와우. 겁 많아도 와우. 기절 안 하고 못 배기는 귀곡산장. 뭐 필요한 거 없수? 없음 말고…. 뭐 필요한 거 없냐니까. 없음 말랑께롱께롱께롱!”

이 PD가 9인조 가수 ‘작은 별 가족’의 강인구씨에게 부탁해 만든 주제가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망태 할아버지 역을 맡은 임하룡씨와 서로 박자가 틀린다며 티격태격했던 기억이 난다. 임하룡씨는 언젠가 내게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 “사실, 그 할머니 내가 하고 싶었어.”

처음 코미디언의 꿈을 품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당시에는 개그맨이라는 직업이 없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다른 사람을 웃기는 일에 몹시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 학기 초, 반 편성을 마친 뒤 새 담임선생님이 앞으로 매주 분단 이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그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왼쪽으로 이동하나요. 아니면 오른쪽으로 이동하나요.”

그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너만 이쪽으로 가. 우리는 다 저쪽으로 갈 테니까”라고 외쳤다. 아이들은 폭소하며 자지러졌다. 학기 초라 그랬는지 선생님 눈에는 그게 그리 웃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선생님께 불려 나가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이상한 건 아이들이 배를 움켜잡고 웃는 모습이 눈앞에 선해 맞는데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나는 선생님이 뭔가 말씀하시면 재치 있게 맞받아치는 아이가 됐다. 운이 좋은 날은 선생님도 같이 웃었다. 물론 운이 없는 날에는 비 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 맞았다. 그때 내게는 벌을 받느냐 안 받느냐보다 아이들이 웃느냐 웃지 않느냐가 더 중요했다.

당시 일기장을 보면 사흘에 한 번씩은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서울 남영동에 자리한 성남극장, 금성극장에 극단이 찾아오면 어떻게든 가서 봤다. 구봉서 서영춘 송해 남보원 등의 코미디언을 보면 가슴이 떨렸다.

사실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코미디언 등용문이 없던 시절이라 신문 기사에 실린 극단 단원 모집을 볼 때마다 응시했다. 연예계와 가까울 것이란 생각에 무작정 다방 DJ 보조로 일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9년 3월 당시 TBC 동양 라디오로 데뷔했다. 이후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홍렬쇼’ 등 여러 프로그램에 나와 국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사랑해주신 분들과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다.

이제는 굳이 분장하지 않아도 귀곡산장 망구처럼 금방 흰 머리가 자란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코미디가 좋다. “정말 코미디를 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정리=구자창 기자

약력=△1954년 서울 출생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홍보대사(1998년∼) △1979년 TBC동양방송 라디오로 데뷔 △예능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홍렬쇼’ 시트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 출연 △서울 온누리교회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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