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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11> 극심한 생활고에 아내는 결혼반지 팔아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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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과 결혼 이후 나는 전남 여수와 순천 지역으로 내려갔다. 손양원 목사와 약속한 대로 무교회 지역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애양원에서 가까운 곳에 있던 쌍봉면은 당시 여수군(현 여천군)의 무교회 면이었다. 순천에는 평안도 출신 목사님들이 있었다. 숭실대를 나와 미국 컬럼비아신학교에서 공부한 김규당 목사님이 계셨고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남한 팔도에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2개 노회가 있었는데 전남에만 3개가 있었다. 경기노회가 친일 변절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전국교회를 호령했을 때였는데 순천노회만은 신학적 입장이 뚜렷했다. 노회는 1948년 장로회신학교 1회 졸업생부터 강도사 고시와 목사안수를 실시했다. 이런 연유로 순천노회는 48년 이래 6·25전쟁이 끝나는 53년까지 장로회총회와 정통신학 옹호를 주장하는 젊은 성직자들의 아성이 된다.

나는 신학교에서 나름 열심히 공부한 우등생이었다. 조직신학으로 신학적 입장을 정립했고, 신·구약학을 공부하며 성경해석의 원칙을 세웠다. 도시전도와 교회 설립에도 관여하면서 전도에도 자신감이 있었다. 더구나 여수 순천은 유혈사태를 겪은 곳이라 주민들이 쉽게 예수를 믿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서울에서의 경험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나는 면장에게 부탁해 주민들을 마을 정자나무 밑으로 모아 달라고 했다. 30명 정도 모이면 열심히 설교했다. 그리고 예배당으로 정해 놓은 학교 교실로 주일예배에 오라고 했지만 헛일이었다. 주민들은 말로는 “믿어야지요” 하면서도 오지 않았다. 그들은 면 직원이 동원한 군중에 불과했다. 여순사건 이후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세도가 큰 것 같으니 말로는 긍정했던 것이다.

나는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다. 어느 주일 저녁엔 나 자신을 한탄하며 울었다. 그리고 회개했다. 사랑으로 전도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전도를 학문으로 하고 신학교 교과목으로 삼는 일이 민족 교회가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전도학 정립의 꿈을 꾼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후 나는 여수 시내로 집을 옮겨 여수교회 순회전도사로 일했다. 전도비 명목의 돈이 교회에서 지불됐지만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중학생인 여동생까지 단칸방 신혼부부인 우리 내외와 함께 지냈던지라 내 삶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아내는 목공소에서 황토색칠을 한 앉은뱅이책상을 가져왔다. 결혼 후 마련한 첫 가구였다.

1949년의 겨울은 추웠다. 돈도 땔감도 양식도 없었다. 전도비를 미리 달라고 아내를 여수교회 회계집사에게 보내는 일도 계속할 용기가 없었다. 아내는 연일 시무룩했다. 김장철 배추 한 포기 살 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도심방을 다녀왔는데 아내가 없었다. 통금시간이 거의 다 됐을 때 인기척이 들렸다. 웬 남자 소리였다.

“되게도 높은 데 사시는구먼.”

남자가 배추와 무를 지게에 가득 짊어지고 와서 부엌 앞에 내려놨다. 그는 아내에게 돈을 받자마자 떠났다. 차가운 아내 손을 방바닥에 대줬는데 손을 펴지 않았다. 가만 보니 손가락에 있어야 할 결혼반지가 없었다. 아내는 소리 내어 울었다. “당신 반지를 팔았구만….” 나 역시 울었다. “주님, 너무하십니다.” 나는 기도인지 한탄인지 넋두리로 밤을 지새웠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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