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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지어져가는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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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4월 1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복음서 강해 18 함께 지어져가는 성전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막 11:15-18)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에는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루살렘에 가셔서 예수님이 가장 먼저하신 일은 성전에 가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다. 성전뜰에 있었던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신 것이었다. 예수님은 왜 상을 엎으셔야 했을까?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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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해마다 유월절이면 세계 도처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왔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5만이었는데, 순례객들은 대략 2백만 정도였다고 한다. 그들이 오는 목적은 한가지였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성전세를 내야 했고, 제사에 필요한 동물을 구입해야 했다. 성전세는 반 세겔이었다. 지금 이스라엘 돈 반세겔이면 150원정도다. 150원만내고 성전에 들어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당시 반 세겔은 노동자 이틀치 일당에 해당된다. 최저시급으로 계산하면 이틀에 10만원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반 세겔씩 20세 이상의 남자 50만명에게 받는다고 치면 5백억원이다. 엄청난 수입원이다. 당시 성전세를 거둬들이는 기관은 대제사장을 위시한 산헤드린 공의회였다. 당시 대제사장은 로마총독에게 막대한 뇌물을 주고 그 자리를 유지했다. 탐욕으로 시작한 자리는 더 큰 탐욕을 추구하게 만든다. 대제사장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통용되던 동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두로에서 제작한 성전세용 화폐를 만들어 반드시 환전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당한 환율을 적용하여 폭리를 취했던 것이다. 환전소와 제사용 동물시장은 원래 감람산 쪽에 있었다. 그런데 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많아지자 대제사장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또 다른 시장을 성전 이방인의 뜰에 개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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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세용으로 제작된 두로화폐


이방인의 뜰은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 출입이 허용되었던 곳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 기간동안 이 곳에서 25만 5천마리의 어린양이 거래되고 희생제물로 바쳐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성수기에는 평상시보다 가격이 16배 올랐다고 한다. 여기서 벌어들인 돈은 장사꾼들과 성전권력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당시 민중들은 이러한 현실에 다들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권력자들이 만든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행동하신 것이었다.


막 11:15-17,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물론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지다. 그러나 성전이 지어진 것은 애초부터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만민을 위한 비전이 담겨져 있었다. 이사야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사 56:6-7,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예수님 당시 만민이 기도하라고 마련된 이방인의 뜰에서 이방인들은 기도할 수 없었다. 성전권력가들의 탐욕에 의해 그곳이 돈을 바꾸고 동물을 파는 시장터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할 장소가 강도의 소굴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강도의 소굴이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서에서 표현된 말이다.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도둑의 소굴’이라는 말은 멸망 직전 남유다의 신앙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을 들어보자. 렘 7:8-10,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일상생활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았으면서 성전에 와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안심하는 백성들을 질타하는 말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생활에서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다른 우상들을 섬기면서 성전에 들어와 성전세 내고 제사드리면 ‘나는 구원받은 백성이다’라고 안심했던 것이다. 잘못된 구원의 확신이다. 이처럼 성전이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주면서 온갖 가증한 일을 하는 강도의 소굴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것이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기 전, 그리고 AD70년 로마 디도 장군에게 멸망하기 전 예루살렘 성전의 상태였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가? 강도의 소굴과 같은 증상은 없는가? 삶이 따르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나와 헌금내고 예배드리며 나는 구원을 얻었다는 잘못된 확신가운데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성전은 왜 필요했을까? 사실 태초에 성전은 필요하지 않았다. 에덴동산 그 자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였다. 하나님의 임재가 늘 있었던 곳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곳에 늘 샬롬이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삶의 만족을 추구한 결과 낙원을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샬롬이 막혀버렸다. 갈등과 전쟁과 죽음이 반복되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후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그리고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약속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담처럼 점차 하나님 아닌 것에서 삶의 만족을 구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셔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신 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면서도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주고 있는 당시 성전시스템을 뒤엎으신 것이다.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기시고 대속의 피를 흘리셨다. 그리고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여셨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직접 이루신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이 성전의 개념은 바뀐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곧 성전이라고 말한다.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신자는 개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인 성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개념이다. 성전의 제일 가는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다. 하나님의 임재가 막히거나 떠나면 성전은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바울이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있다. 그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기호에 따라 당짓는 일이 있었다.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행위로 본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도 권면한다. 엡 2:19-22,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개인주의 사회에서 신앙도 점점 개인주의화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내가 편한 영역 안에서만 신앙생활하려고 한다. 좀처럼 공동체로 엮기는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왜 공동체가 중요한가? 우리가 서로 마음으로, 삶으로 연결될 때 그곳이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표현한다. ‘함께 지어져 간다’는 말은 헬라어로 ‘쉰오이코도메오’이다.  ‘쉰’이 ‘함께’, ‘오이코도메오’가 ‘지어져간다’는 뜻이다. 완성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완전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함께 지어져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함께 지어져가는 성전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지어져 가는게 쉬운일인가? 결코 쉽지 않다.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과 한 가정을 세워가는 것도 쉽지 않다. 하물며 나와 기호도, 성향도 다른 사람과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다. 왜일까? 우리 각 사람이 주안에서 함께 성전이 되어가라고 부르심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좀 괜찮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공동체를 찾는다. 그런데서는 기꺼이 몸을 세우는 일들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흔히 그러한 사람들은 또 다른 이유를 대면서 몸을 세워가는 일을 그만 둔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다.


지난 주간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아내와 동시에 빌립보서 2장 말씀을 생각했다. 지금 우리 교회에게 필요한 말씀인 것 같다. 빌 2:1-5,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말씀으로 우리 각자가 자신을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공동체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을 힘쓰지 못하고 있다면 이유는 하나다.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호의 차이, 의견의 차이, 생각의 차이는 두 사람 이상이 모인 모임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차이가 예수님 안에서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샬롬을 누리기 위해서는 함께 성전된 자로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을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가능하다. 내 기호, 내 감정, 내 상처보다 예수님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 마음에 순복할 때 우리는 서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관계 속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나보다 주인되신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내 권리, 나의 옳음을 입증하려는 마음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이 중요하기에 내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남을 낫게 여기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권한다. 롬 15:5-7,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우리는 지금 함께 지어져가고 있다. 혹 지금 내가 피하는 사람은 없는가? 벽을 느끼지만 그대로 내버려둔 채 지내는 관계는 없는가? 돌아봐야 한다.


계 21:22-23,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이 보았던 환상처럼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서 시작될 새예루살렘에서는 성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곧 성전되시기 때문이다. 이 때가 오기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예수님의 형상을 마음에 새기며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둥근 돌로, 어떤 사람은 각진 돌로, 모양은 다 다르지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우리 모두 서로 겸손히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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