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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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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4월 15일 설교 이익환 목사


사복음서 강해 20 마음의 부활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눅24:30-35)

 
낙심은 한자어로 떨어질 낙(落)에 마음 심(心)자를 쓴다. 마음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아프다. 힘들다. 기대가 사라진다. 기대를 많이 했다가 그 기대가 사라져버리면 그 기대했던만큼 낙심하는 마음도 커진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이 그랬다. 열 두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 분께 자신들의 기대를 걸었다. 유월절 애굽에서 구원받았던 역사를 기념하는 날 그들은 모세 이후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선지자가 바로 예수가 아닐까 기대했다. 이분을 통해 로마의 압제에서부터 출애굽과 같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길 바랬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땅으로 떨어져 깨져버렸다. 그들이 따르던 예수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무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죽었다. 그들은 더이상 예수의 제자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다시 부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바로 그 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간다. 오늘은 그 길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세 명의 마리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였다. 이 부부가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것 같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은 바로 글로바와 그의 아내 마리아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듯했다. 가면서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기 시작했다. 예수님 얘기를 하고 가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누가복음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지 못했다고 한다.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한다.


예수님이 이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네신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글로바가 대답한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이 뻘쭘하셨을 것 같다. ‘다 아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무슨 일이냐’고 되묻는다. 글로바의 대답을 들어보자. 눅 24:19-24,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도 이들의 떨어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천사들이 나타나 그가 살아나셨다고 하는 소식도 그들의 낙심된 마음을 일으키지 못했다.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이 비었음을 확인한 사실도 그들의 절망을 돌이키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치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눅 24: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의 설명에 이들의 마음이 불붙기 시작했다.


도대체 예수님은 구약성경 중 어느 구절을 설명해주신 걸까? 대표적인 말씀이 이사야서 53장이 아닐까 한다. 사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여기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구약의 예언대로 고난 당한 것이라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자였다. 결코 유약하게 고난 받는 종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가르쳤던 메시아관 때문에 그들은 메시아가 이미 왔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유대인 랍비들은 기독교 교회가 이사야서 53장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중세 때 랍비 라쉬의 해석을 따라 기독교인들의 해석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즉, 이사야 53장에서 고난의 종으로 묘사된 ‘그’는 ‘예수’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이다. 유대민족이 하나의 단위로 간주되기 때문에 3인칭 단수 ‘그’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의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이 상하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이 채찍에 맞으며 고난당한다는 것이다. 성경적인 해석이 아니라 참으로 유대중심적 해석이다.


예수님은 두 제자들에게 설명을 마치고 작별하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예수님을 강권했다. ‘날도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물고 가시라’고 초청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그 때 비로서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다. 그들이 강권하지 않았다면 이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눈이 밝아진 동시에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신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여기서 마음이 뜨겁다는 말은 원어로 마음에 불이 붙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서, 이미 그들이 길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에 불이 붙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낙심했던 마음이 부활을 경험한 것이다.


그들은 그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열한 제자와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자신들이 경험한 일들을 보고한다.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에 이어 예수님 부활의 두번째 목격자이자 증인이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마음에 불이 붙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고전 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우리 중에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설교를 듣다가, 아니면 성경을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의 영이 성경을 이해하도록 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의 온도를 측정해보기 바란다. 내 마음이 뜨겁지 않다면 이유는 하나다.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에 대해 내 생각과 선입견을 내려놓지 못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옆에 계서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우리의 눈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눈을 뜨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성경을 봐야 한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 나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요 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예수님을 만나고 안 만나고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게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을 뒤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고전 15:20-2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인류의 조상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했다. 아무도 그 사망권세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 그러나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뒤집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더이상 죽음을 숙명으로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의 미래를 이렇게 전망한다. 고전 15:51-58,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는 살면서 힘들어질 때가 있다. 낙심되어 죽고 싶을 때가 있다. 사망권세가 우리를 쏘며 찌르기 때문이다. 소망을 잃을 때마다 우리는 두 제자들처럼 엠마오로 내려간다. 이전에 주님 안에서 가졌던 뜨거운 마음을 잃어버리고 엠마오로 내려간다. 엠마오로 내려갈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마음의 부활이 필요한 것이다. 마음의 부활을 경험할 때까지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와 동행을 요청해야 한다. 만약 엠마오 두 제자들이 강권하여 예수님을 초청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눈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이 떡을 떼어 축사하시는 시간까지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동행을 알아보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낙심의 문제를 극복하게 된다. 마음에 불이 붙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래야 부활의 증인으로 살게 된다. ‘인생이 그렇지 뭐’하며 운명론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라고 외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주님께 우리의 마음이 불붙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뜨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야 우리의 비전과 삶에 목적에 대해서도 열정을 가질 수 잇는 것이다. 바라기는 2017년 이 부활절에 마음의 부활을 경험하게 되길 축원한다. 여러분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동행하는 삶이 시작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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