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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고난 뒤의 영광 (막 9: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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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뒤의 영광 (막 9:1-13)

운이 좋아 어떤 문제를 맞추었다 할지라도 실력으로 맞힌 것이 아니면 응용문제가 나올 때 당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시험을 치렀습니다. 문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며 예수님의 정체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헬라어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입니다.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메시아라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어떤 메시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 이내 실수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할 수난, 즉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처음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자마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책망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랬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이번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당합니다. 그의 본 실력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제자도를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고난 받는 종으로 소개하실 뿐 아니라 제자들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죽임을 당함, 다시 살아남,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제자들은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제자훈련 과정은 계속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해도가 더 높아지기 원하십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9:1) ‘권능으로 임하는 것’에서 ‘임하는’은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처음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이미 임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계시의 사건입니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이라는 것은 물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엿새 후에 예수님은 바로 그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오르십니다.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 너머에 영광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몸소 버리셨던 영광의 일부를 잠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였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들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계시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사용하십니까? 

1. 시각적인 방법(9:2-6)

1)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됩니다.

누가복음 9:28-29에 의하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시자마자 기도하십니다. 반면에 제자들이 깊이 졸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이 조는 모습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반복됩니다. 졸다가 깨었는데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장면을 인하여 깜짝 놀랍니다. 영

광스러운 모습으로 바뀐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입으신 옷이 광채가 납니다.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다니엘이 예언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단 7:9) 

세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2)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 뿐 아니라 그 곁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더욱 놀랐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위대한 민족 지도자입니다. 그는 출애굽 전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였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제사는 장차 예수님이 어린양과 같은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예표합니다. 출애굽을 통하여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였듯이 예수님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사로잡힌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졌습니다. 

엘리야가 갈멜 산 위에서 드린 희생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돌이키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과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불살랐습니다. 이 장면을 본 백성들은 일제히 엎드리면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외쳤습니다. 엘리야가 우상숭배에 빠진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려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죄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 받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누가복음 9:31을 보면 그들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별세’에 해당되는 헬라어가 ‘exodus’입니다. 

exodus에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떠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간 종살이 하였습니다. 심한 노역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린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떠났습니다. 

exodus의 두 번째 의미는 떠나기는 떠나되 갈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나면서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을 소망 중에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광야 사십 년을 지내는 동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는 대로 행진하였습니다. 구름이 멈추면 그들도 멈추고 구름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은 구약에서 메시아의 구원에 대한 예표나 예언들이 예수님의 별세, 즉 십자가의 고난에 의하여 성취될 것을 말합니다. 


2. 청각적인 방법(9:7-8)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제자들이 산에 머물기 원하였을 때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전에 언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까?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셨을 때입니다. 

이때를 회상하면서 베드로는 베드로 후서에서 적습니다.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1:16).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메시아요 하나님을 대리하는 통치자, 즉 이스라엘과 열방의 왕이심을 확증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옆에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제는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내용보다 더 앞서고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제넘게 어떻게 해보자고 자기의 생각을 제안합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자고 제안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의 앞에서 벌어진 광경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심히 무서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말합니다. 아직도 이해가 부족하기에 예수님을 여전히 랍비라고 부릅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5절) 

베드로가 범한 실수는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을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자리에 두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불과 엿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을 하나씩 짓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위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던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레벨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모세와 엘리야가 훌륭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견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민족지도자나 선지자나 위대한 선생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와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2)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도록 권유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를 말한 것은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난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의 마음에는 십자가의 고난보다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말씀하실 때도 예수님을 꾸짖으며 만류했던 베드로가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 고난을 당하셔야 함을 깨닫지 못하고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하면서 초막을 짓겠다고 합니다. 초막을 짓자는 제안은 예수님께서 산 아래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간접적인 제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십자가를 통한 인류의 구원계획을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워 막으려고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마가복음 1장 1절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합니다.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실하게 계시합니다. 모세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고,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나타날 선지자로 기대되었습니다(말 3:1, 4:5). 

이들이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말한 것은 현세 너머에 영원의 세계가 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언급하시면서 어찌 하나님이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느냐고 하셨습니다(마 22:32).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은 모세와 엘리야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와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지금도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로서 예수님과 더불어 변화산에서 대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더라도 고난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단순히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되살아나실 것을 보여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고난의 종으로 오셨다는 것과 십자가 수난 후에 부활하셔서 새 생명 속으로 자기 백성들을 이끌어 주시는 영광스런 메시아라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십니다. 


거듭된 수난의 예고(9:9-13)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본 것을 당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 말하지 않도록 당부하십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할까?” 

제자들은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이 이미 와서 고난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요한이 보여준 고난의 길을 간다고 하시면서 다시 한 번 당신이 받으실 수난에 대하여 언급하십니다. 변화산에서 보여준 영광은 고난 이후에 주어짐을 제자들이 깨달아야 했습니다. 

엘리야가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한 것처럼 인자도 이와 같이 고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에 헤롯 안티파스가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았다가 세례자 요한이 그 문제를 지적하자 그를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예수님도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는 겁니다.

변화산의 영광은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자들에게 임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변화산 사건은 제자들이 가졌던 가장 놀라운 체험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를 목격했고 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광채를 발하셨고 구름이 제자들을 덮었으며 하늘에서는 신령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무도 황홀한 나머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베드로가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경이로운 변화산의 무대가 갑자기 막을 내립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9:8) 그토록 가슴을 벅차게 했던 모든 장면들이나 인물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변화산 무대에 나타났던 모세와 엘리야도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들러리에 불과했습니다. 광채가 나신 분은 예수님이었지 모세나 엘리야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때로 본체 되신 예수님보다 오히려 반사체에 더 관심을 두려할 때가 있습니다. 모세나 엘리야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져 주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자칫 빠지기 쉬운 세상적인 성공이나 안락함의 유혹을 뿌리치고 내 생각과 삶의 우선을 주님께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변화산에 올라가 신비한 체험을 하면서도 인간적인 생각이 앞설 때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우리도 자칫하면 제자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고난의 길을 건너뛰고 안락과 영광의 삶만을 추구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실 때도 제자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육신만 피곤에 지쳐 잠을 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도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영혼이 잠들면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겪는 순간에 변화산 경험은 제자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혹시 제자들처럼 영혼이 잠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사순절 기간에 우리의 잠자는 영혼이 깨어야 합니다. 영혼이 잠들어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게 될 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해 밝은 눈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2)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난의 메시아를 대변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영광의 메시아를 대변합니다. 그런데 순서가 있습니다. 고난이 먼저 있고 나중에 영광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변화산은 내려와야 하는 산입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비한 체험을 한 제자들은 흥분하여 그곳에 계속 머물기를 구했습니다. 변화산에만 머문다면 십자가가 있을 수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영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세도 엘리야도 예수님의 길을 막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면 제자들도 예수님과 더불어 변화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은 소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를 불러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함입니다. 내가 본 모세와 엘리야 때문에 내가 지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초막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변화산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3)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당신이 당할 수난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주여 그리 마옵소서’ 하면서 예수님을 꾸짖었던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또 한 번 막습니다. 이때“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립니다. 예수님은 모세나 엘리야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는 분이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중심원리로 삼으며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이 앞서고 희생 없이 주의 일을 하려는 유혹을 받을 때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희한한 체험을 하면 신앙생활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은 주님께서 필요에 따라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구한다고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약속된 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알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열매를 거둡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약속되어 있기에 현재의 고난을 넉넉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그날에 믿는 자에게는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한 열매에 따라 상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한 자들은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벧전 4: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변화산의 영광이 언제 입혀집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라는 선언과 확증을 받는 때는 언제입니까?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후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입니다. 그러려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이 고난에 동참한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선언합니다. 

그 흔적은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당한 고난의 흔적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대적자들로부터 위험을 당하고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으며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 그 모든 표시가 예수의 흔적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도 전혀 희생하지 않는다면 예수의 흔적이 생기지 않습니다. 주님을 인하여 고민하고 씨름해야만 예수의 흔적이 생깁니다. 주님을 위하여 시간, 달란트, 물질을 사용할 때 예수의 흔적이 생깁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려면 ‘나의 변화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현실의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이기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경험하셨습니다. 

그 주님은 장차 이 세상에 영광의 주로 다시 오십니다. 그 주님을 본받아 주님께 초점을 맞추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많이 가지며 어느 때보다 의미있는 사순절을 보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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