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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없다고 울지 말라 (계 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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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없다고 울지 말라 (계 5:1-10)

사람이 없다고 야단들입니다. 딸을 가진 부모는 신랑감이 없다고 야단이고 아들을 가진 부모는 신붓감이 없다고 야단들입니다. 부모끼리 만나서 흥정을 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애들끼리 만나게 하니까 진전이 없습니다. 성경 식으로 부모가 만나서 아들 하나를 드릴 테니까 딸 하나를 달라 이런 식으로 흥정을 하는 시대가 더 효과적일지 모릅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야단들이고 젊은이들은 취업할 데가 없다고 야단들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야단들입니다. 유능한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만 자질문제 때문에 낙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차 나라를 위하여 큰 뜻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좀 일찌감치 세금도 제때에 내고 본인도 군대에 갔다 오고 자식도 군대에 보내는 게 옳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하는 사람을 찾기가 그렇게 없다는 얘기입니까.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솝우화를 보면 주인이 종에게 목욕탕에 가서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라고 합니다. 종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주인이 좋아서 가보니까 한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우글우글해요. 화가 나서 돌아와서 종에게 왜 한 사람이 있다고 그랬느냐고 했더니 종이 말하기를 ‘목욕탕 가운데 큰 돌이 놓여 있는데 아무도 그 돌을 치우려고 하지 않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을 옆으로 치우는 것을 보고 사람다운 사람이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문학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고 수십 년 전에 미국에서 어느 공터에 한 여성이 피살당했는데 그 공터 옆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여성이 소리를 지르는데도 그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어느 누구도 나와서 돕지 않고 어느 누구도 경찰을 부르지 않고 결국 그 여자가 거기서 피살당했습니다. 이것을 유명한 제노비스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사람이 많지만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이에요. 

교회에서 일할 사역자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신학교는 많고 신학생들 많고 목사 되겠다는 사람 많아요. 그러나 정작 자질을 갖춘 사람을 찾아보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어이가 없을 정도에요. 도대체 신학교가 많다는 사실이 뭘 뜻하는 것인지, 신학생이 많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것이 거품에 불과한 것인지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성도님들도 비슷한 고민을 경험하셨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찾을 때 사방에 있는 게 교회에요. 서울 시내에 교회보다 많은 게 없어요. 그러나 다닐만한 교회를 찾아보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많은 사람들이 브랜드를 좇아가겠습니까. 대형교회 · 유명한 교회 · 알려진 교회, 브랜드를 좇아가는 이유가 그래도 브랜드 값을 하지 않겠느냐, 알려졌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이 숫자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숫자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과거에는 여의도 집회에 몇 십만 명이 모였다더라, 세계 오십 개 대형교회 중에 반이 한국에 있다더라, 이런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뭔가 상승세를 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 누가 요즘에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사람을 많이 모아놓고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시류를 읽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찍이 오병이어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조용히 빠져나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능력을 경험했지만 그 효과가 미미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들이 기적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그건 예수님이 원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기독교인들이 많다는 사실에 큰 기대를 걸면 안 됩니다. 숫자에 기대를 걸면 안 됩니다. 고기를 많이 잡은 건 맞아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물을 내렸더니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은 맞지만 그 고기 중에 먹을 만한 고기가 없고 내놓을만한 고기가 없고 팔만한 고기가 없어요. 그렇다고 고기를 안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숫자에 너무 기대를 많이 걸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에 기독교인들이 많은 이유가 한국인들의 특별한 기질에 좌우되는지도 몰라요. 한국인들이 유행에 민감하고 우르르 쫓아가기를 좋아하고 전통적으로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고 아니면 서양문물을 선호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부어주신 은혜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숫자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숫자가 우리를 미혹시킵니다. 숫자가 많다는 사실이 질이 높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닌데, 숫자가 많다는 사실이 그 중에 쓸 만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닌데, 숫자가 많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숫자가 많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만큼 죄인이 많다는 뜻입니다. 

고장 난 인생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입니다. 고독한 사람이 많다는 얘기에요. 자기의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갈급한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에요. 마음에 평강이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에요. 예수님이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많은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지만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제외하고. 병에서 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얘기냐.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제자가 될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직 그들은 인생의 해결할 문제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어요. 예수님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많다고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세상의 비판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이 모양이냐?’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래요. 아마 짐승이 예수님을 믿으면 안 그럴 거예요. 나무와 풀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안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뭘 하든지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은 무얼 하든지 그것을 버립니다. 사람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러느냐 묻는 사람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일뿐입니다. 왜 그 진리를 깨닫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까. 왜 제대로 된 기독교인들이 없냐고 묻는 분들에게 제가 여쭙고 싶은 것은 ‘제대로 된 다른 사람들은 많습니까? 정말로 친구가 될 만한 사람들이 몇 명 있습니까? 정말로 신뢰할만한 사람이 세상에 몇 명 있습니까? 그런 사람을 보여주면 저도 제대로 된 기독교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방법이 없으면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겠습니까. 다른 길이 있다면 다른 길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기독교와 불교와 유교를 비교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구덩이에 빠졌는데 공자님이 지나가다가 그것을 보고 야단쳤습니다. 구덩이 조심하라고 했지. 왜 그런 거 하나 조심하지 못하고 빠져서 야단이냐. 그리고 갔습니다. 석가모니가 지나가시다가 보고 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빠져나오라고. 그런데 예수님은 지나가시다가 그걸 보고 당신이 내려오셔서 사람을 건져주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야단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빠졌는데 야단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말해 주는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해도 안 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친히 건져 주시기 전에는 구덩이에서 나올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나오지 못하고 예수님 의지해서 나온 사람에게 뭘 기대하려고 합니까. 우리의 문제는 기독교식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불교식으로 요구하고 유교식으로 야단친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만이 아실 문제이지만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를 기억하신다면 별로 기대도 하지 않으시고 별로 실망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인간을 잘 알고 많이 경험하셨어요. 아담과 하와, 노아의 홍수, 노아의 아들들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함 같은 사람이 나오지를 않나, 또 이삭의 아들이 다 좋을 줄 알았는데 에서 같은 사람이 나오지를 않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주면 나을 줄 알았는데 그들이 사십년 동안 불평하고 불신하지를 않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나을 줄 알았는데 그들이 바알 신을 섬기고 우상을 좇지 않나, 왕을 세워주면 나을 줄 알았는데 사울왕 같은 사람이 나오질 않나, 심지어 다윗의 자손은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솔로몬의 말년을 보세요. 

성경말씀을 통해서 얻는 교훈이 있다면 사람은 사람일뿐이라는 사실이에요. 과거에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은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습니까. 이것은 인생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이미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합니다. 이 문제를 놓고 애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애통해 본 경험이 없으시다면 오늘 본문을 실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근자에 일어나는 일들, 당황스러운 일들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볼 때 남의 일로만 여기는 게 아니고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심지어 기독교에 대하여 실망스러운 마음이 드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적이 없다면 본문 말씀을 실감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 오른손에 일곱 인으로 봉인한 책이 있는데 그것을 능히 열 사람이 없어서 요한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천하에 사람이 없어요. 의인이 없어요. 합당한 사람이 없어서 요한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먼 미래의 환상이 아니고 현재의 상황을 하나님이 상징적인 언어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라고 해서 반드시 미래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상황을 상징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뜻하는 것은 장구한 인류의 역사를 통해 그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하나님 오른손에 있는 책을 열기에 합당한 사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실망이요, 역사에 대한 실망이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당혹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5절에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이게 누굽니까.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기었으니’ 유일하게 이 책의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분이 예수님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마지막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아담과 하와 이후로 사람 농사를 해서 딱 한 명을 건졌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입니다. 겨우 한 명을 건졌다는 얘기냐. 한 명이 어딥니까. 한 명을 건졌기 때문에, 그 한 명 때문에 우리가 살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만일 그 한 분을 건지지 못했다면 인류는 멸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 이기신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울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울지 말라’ 누가 이 말을 했느냐. 하나님이 울지 말라고 하신 게 아니고 스물 네 명의 장로 중의 한 사람이 울지 말라고 했어요.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그 말은 교회 지도자들이 양들에게 이 사실을 말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장로들이 이것을 말해야 됩니다. 

성경 구절에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구절도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울지 말라고 했어요. 지금이 그럴 때에요. 낙심하면 안 되고 동요하면 안 되고 냉소적이 돼서는 안 됩니다. 믿을 사람 한 사람도 없다 이런 식으로 냉소적으로 되면 안 됩니다. 언제 우리가 다른 사람 믿었습니까.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 합니다’ 만일 예수님 이외에 의지할 사람 있으면 그 사람 의지하면 됩니다. 

만일 예수님 이외에 누가 다 이루었도다 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의지해도 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천하에 우리가 구원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을 믿었을 것이지만 냉소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정죄하는 것은 예수님보다 낫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예수님도 하시지 않고 하나님도 하시지 않는 일을 사람이 한다면 자기가 하나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자기가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는 것을 사람이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적어도 믿는 사람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처한 상황을 예수님이 예견하지 못하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충분히 예견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에게 ‘울지 말라’ 울지 말고 예수님을 경배하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인봉을 뗄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 한 분이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금대접을 가졌는데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리고 그들이 찬양합니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배요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요 우리가 최후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근거가 됩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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