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참된 헌금 (막 12:41-44)

첨부 1


참된 헌금 (막 12:41-44) 

  
돈 소리만 들으면, 긴장하는 분들이 있다. 또 ‘교회에 가면, 돈 이야기만 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저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저는 헌금 설교를 잘 하지 않는데, 칼빈은 “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해서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라고 했다. 
또 웨슬리도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돈의 씀씀이를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이, 제일 먼저 변화가 있어야 할, 삶의 영역 중의 하나가, 돈의 사용처이다. 

경제생활은 우리의 가치관이, 가장 민감하게 반영되는 영역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여, 드리고 싶을 때, 헌금생활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4개의 뜰로 이루어졌다. 맨 바깥쪽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다. 
말 그대로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는 뜰이다. 그 안쪽에는 여인의 뜰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남녀 유대인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방인은 들어갈 수 없다. 여인의 뜰 안쪽에는, 남성의 뜰이 있었다. 유대인이라도, 여성들은 들어가지 못하고, 남성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성전 맨 안쪽에는, 제사장의 뜰이 있었다. 그 곳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 헌금함은, 여인의 뜰에 비치되어 있었다. 이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만, 헌금을 하라는 말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자들은, 헌금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입구에는, 헌금함이 13개나 있었다. 또 다양한 헌금의 목적에 따라서, 헌금함이 구분되기도 했다. 13개 중에서 9개는, 제사의 종류에 따라서, 각종 제물을 구별하고 있었고, 나머지 4개는, 독특한 용도에 따라 구분되었다. 

성전 보수를 위한 헌금함, 성전 수리를 위한 헌금함, 구제를 위한 헌금함, 그리고 자유 헌금함도 하나 있었다. 헌금함은 본래 놋쇠로 만들어졌고, 돈을 넣는 곳이, 나팔 모양이었기에, ‘나팔궤’라고도 불렸다. 

1. 예수님은 헌금을 드리는 모습을 보신다(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 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예수님은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셨다. 예수님은 헌금함 반대편에 앉으셨다. 
예수님은 성전 헌금함에, 돈 넣는 모습을 보셨다. 보았다는 미완료시제로, 계속 지켜본다는 말이다. 즉 사람들의 헌금하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많은 돈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셨다. 또 예수님은, 혼자되어 가난한 여인이, 적은 돈을 헌금함에, 넣는 것도 보셨다. 

오늘 여기 오신 분들 중에도, 헌금을 하신 분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맞은편에서, 우리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다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당시는 지폐가 없던 때라, 놋쇠로 만들어진 헌금함에, 사람들이 동전을 넣으면,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으면 대충, 얼마쯤 넣었는지, 듣는 사람들이 다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함에, 많이 넣는 것을 보셨다. 이 때 ‘넣다.’의 동사는, 현재형이다. 돈을 한번만 넣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계속 넣었다. 부자들은 인색하지 않았다. 넉넉하게 돈을 넣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헌금하는 모습을, 일일이 모두 지켜보셨다. 어떤 형편으로 헌금을 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헌금했는지 보셨다. 성경은 헌금을 드릴 때, 주님이 보실 때, 감동된 헌금도 있었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헌금, 주님의 마음을, 분노하게 만드는 헌금도 있었다. 
이 여인의 헌금은,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예수님을 감동시켰다. 예수님은 헌금만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지켜보신다. 설교자는 설교를 하면서, 성도들을 본다. 어떤 사람은, 무심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 있다. 

똑같이 설교자를 쳐다보는데,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 아무 감동도 없이 앉아있는 사람, 인상 쓰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다 보이는데, 하나님이 예배자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부자들은 들어가면서, 많은 돈을 넣었다. 아마도 자기를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동기를 품고, 헌금함 속에 많은 돈을 집어넣었다. 많은 돈을 넣었기에, 헌금함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무척 크고 요란하다. 그래서 어깨를 펴고, 성전 안으로 들어간다. 

여러 사람들이 이렇게 돈을 넣고서,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여인이 등장한다.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렙돈’은 유대인들의 화폐 단위로, 가장 작은 단위의 돈이고, ‘고드란트’는 로마 사람들의 화폐 단위로, 가장 작은 단위의 돈이다. 
유대와 로마 단위를 모두 기록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대상으로 쓰여 진 복음서였기에, 두 화폐 단위를 다 썼다. 렙돈은 레피스(얇다)는 말에서 왔다. 얇은 동전이어서, 헌금함에 집어넣을 때, 틱하며, 소리도 잘 나지 않았다. 

라틴어 고드란트는, 1/4이라는 뜻이다. 한 고드란트는 한 앗사리온의 1/4이다. 한 앗사리온은, 참새 두 마리 값이다(마10:29). 참새 한 마리에, 두 고드란트, 렙돈 4개다. 한 앗사리온은, 한 데나리온의 1/16이었다. 그 당시 한 데나리온은, 일꾼이나, 군인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해보자. 한 데나리온이 하루 일당이니까, 계산하기 좋게, 8만원으로 생각하고 계산해 보자. 한 앗사리온은, 한 데나리온의 1/16이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5,000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한 고드란트, 즉 두 렙돈은 얼마인가? 5000의 1/4이니까, 1,250원이다. 

그러니까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1,000원 조금 넘는 돈을, 헌금함에 넣었다. 헌금을 드릴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문제가 생긴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문제는,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드렸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가난하게 살아가는 여인임을 아셨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었음을 아셨다. 그녀의 수중에 있는, 생활비 전부였음도 아셨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신 사랑하는 하나님께, 자기의 정성을 다해 드릴 수 있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감격으로, 헌금을 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 관한 모든 것을, 낱낱이 다 아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모든 것도, 빠짐없이 다 아신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가 어떻게 예배하는지, 지켜보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도, 낱낱이 다 지켜보신다. 풍랑에 빠져 갈 때에, 지켜보는 분이다. 질병이 오랜 줄, 아신 분이다. 

큰 어려움에서, 작은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경제 문제에서, 영적 상태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지켜보는 분이다. 헌금을 드릴 때도, 다 쓰고서 못 드리는지, 아예 없어서 못 드리는지도 아신다. 정말 가슴으로 드리는지, 형식으로 드리는지도 아신다.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마음도 아신다. 
삭개오가 누구인지 알고, 그 이름을 부르셨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키는 분이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해치 못하도록,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는 예배자,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2. 희생이 담겨야 참된 헌금이다(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성전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함께 섞여 예배하는 곳이다. 
부자들이 먼저 나와서, 헌금을 드렸다. 자랑스럽게 쩔그렁하고 넣었다. 회중석을 한번 둘러보았는지 모른다. 이 여인은 두 렙돈을 들고, 부끄럽고 떨리는 손으로 넣었는지도 모른다. 툭하고 떨어지는 그 소리가, 초라하게 들렸을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경멸하듯 보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네가 평생을 헌금해도, 내가 한 번 헌금한 것보다 못하다.”는 표정으로, 불쌍히 여겼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말씀을 했다. 많은 부자들이 낸 헌금보다,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더 많다고 했다. 참으로 희한한 말씀이다. 사람들은 헌금한 액수를 보고 놀란다. 
그러나 예수님은, 헌금한 사람들의 마음을 보신다. (행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땅 판돈 얼마를 감추었다. 얼마였기에 큰돈을 감추지 않았다. 바친 돈이 훨씬 큰돈인데, 잘못 드리는 바람에 죽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가, 왜 모든 사람들보다, 많이 넣었다고 했는가?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은 그녀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그녀는 헌금의 정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헌금의 정신은 무엇인가? 

(1) 하나님만 의식하며 드리는 헌금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면, 올바로 드릴 수가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 의식하고 있어야 올바른 헌금이 될 수 있다. 내 헌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 앞에 내 최선을 드리고, 하나님께 내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면 된다. 참된 헌금은,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의식의 결정체가, 나의 헌신이어야 하고, 우리의 헌금이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내 최선을 드리고, 내 사랑과 믿음을 고백하면 된다. 

(2) 희생정신이 깃들은 헌금 

제물은 희생의 제물이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가리켜, 희생제물이라고 하였다(제바흐, ח󰔨󰖂). 진정한 헌금은, 헌금을 드리는 사람의, 희생의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이 여인의 경우, 1,000원 조금 넘는 정도의 돈이, 생활비 전부였다. 저는 그녀가 두 렙돈 중에서, 한 렙돈만 드렸어도, 주님은 만족했을 것이다. 한 렙돈만 드렸어도, 재산의 반을 드렸으니, 칭찬받을 일이다. 그것도 대단한 일이고,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한 렙돈을 드리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드리고 싶었다. 이것이 희생이다. 이 희생이야말로, 성경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선배들의 전통이었다. 다윗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인구를 조사함으로,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된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기 위해, 나단 선지자는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으려고 한다. 아라우나는 이런 말을 듣고,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소서, 번제에 대하여, 소와 땔 나무를 다 내놓았다. 

그러자 다윗은 그냥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한다. (대상21:25-27) “그리하여 다윗은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값을 치르지 않고는,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수 없다. 제물에는 나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땀과 정성, 희생이 들어있어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이것이 다윗이 보여준 모범적인 태도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이런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을 지켜 왔다. (고후8장)에서도, 마케도니아 교회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마케도니아 교회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기근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했는데 넘치도록 했다. 바울은 이 일로, 큰 감동을 받았다. 
(8:2-3)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힘대로만 한 것이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하였다. 이것이 희생이다.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 앞에 드렸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사람이고, 복음을 아는 사람이며, 성령체험한 사람이라면 희생이 들어가야 한다. 참된 헌금 정신에는, 희생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3) 전체를 드리는 헌금 

참된 헌금은 전체, 혹은 전부를 드리는 정신에 근거한다. 쉽게 말해 진짜 헌금은, 다 드리는 것이다. 어떤 분은 드디어 교회에서, 내 재산을 다 요구하는구나, 하고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여러분에게, 다 드리라는 말이 아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것과, 내 것을 구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전체가 다 주님의 것이다. 돈만 아니라,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것이다. 시간도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독생자를 주실 정도로, 사랑하셨다. 독생자를 주는 사랑은, 자기의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다 주고 싶어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헌금이다. 

3. 헌금에 대한 새로운 가치(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말씀에 주의를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난 후,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고, 예수님의 의도도, 충분히 납득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예수님이 뜻하신 바를, 잘 깨달아 알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말씀의 중요성을 밝힌 후에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가난한 과부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헌금함에 넣은, 돈의 액수를 정확하게 다 알고 계셨다. 우리가 보기에는, 여러 부자가 헌금함에 많이 넣었다. 과부는 불과 두 렙돈을 넣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과부가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했다. 부자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다. 따라서 비록 그들이, 헌금함에 많이 넣기는 했지만, 그들의 수중에는, 여전히 많은 것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전부를, 헌금함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넣었다. 따라서 비록 과부는, 두 렙돈 밖에 넣지를 않았지만, 그의 수중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다. 

비율적으로 생각해보자. 부자들은 가진 것의 일부를, 헌금함에 넣었다. 아직 그들에게는 남은 것이 많았다. 여인은 가진 것의 전부를 넣었다. 이제 여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니 비율적으로는 과부가 더 많이 넣은 셈이다. 
두 렙돈이 우리 주님의 손에 드려졌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정한 헌신을 촉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며 확장하는 데 있어, 놀랍게 쓰임 받는 도구가 되었다. 우리의 두 렙돈은 어디 있는가? 우리의 작은 재능, 작은 계획, 시간이, 주님 앞에 드려져,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