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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단의 위에 서 있는 교회 (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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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위에 서 있는 교회 (계 2:12-17)


요한계시록 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사단의 위

사람들은 흔히 집터라는 것을 봅니다. 요즘은 대부분 아파트라서 그런 것을 따지는 경향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집터가 좋다 안 좋다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합니다. 물이 스며 나오거나 바람이 거센 곳은 살기 힘듭니다. 따뜻하고 기운이 좋은 곳을 선호합니다. 명당자리나 풍수지리설이 이런 이유로 여전히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명당자리라고 하여도 만약 이곳이 지각이 수시로 흔들리는 지진대이거나 지반이 꺼지는 곳에 위치해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일본 사람들을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시로 발생하는 지진 때문입니다. 자기 집과 건물의 기반이 흔들리는 것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사고나 비바람은 막거나 견디면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서 있는 기반이 흔들리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축복 받았습니다. 제 평생에 지진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버가모 교회가 위치해 있는 집터가 좋지 못합니다. 그 기반이 좋지 못합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서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13)  사단의 왕좌가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위기와 유혹이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곳입니다. 버가모 지역을 사단의 왕좌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곳이 우상 숭배가 극성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버가모 지역은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으로 유명합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치료의 신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치료를 바라고 몰려들었습니다. 버가모는 아시아 지역에서 오래된 전통 도시였고 이곳에서 본격적인 황제 숭배가 시작되었습니다. 황제의 신전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고 장엄한 건축물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제우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등이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와 우상 제의로 넘쳐나던 곳이 바로 이 버가모였습니다. 

좋은 전통과 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자산입니다. 모르는 사이에 그 전통이나 유산의 힘이 우리 행동이나 인격에 영향을 비칩니다. 가만히 있어도 아름다운 향내가 납니다. 그러나 그 기반이 이처럼 악하고 더러운 곳에 있다면 부지불식간에 그 악한 것에 오염이 되기 마련입니다. 안간 힘을 써도 어느새 그 악한 기운이 사로잡고 있습니다. 버가모 성도들은 죄의 유혹이 끊임없이 밀려들기 때문에 늘 각성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자리 잡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기반도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질 중심의 기반입니다. 인간을 영악하게 만들고 무정하게 만듭니다. 사랑보다는 이기적이며 몰인정하게 만듭니다. 탐욕과 방탕을 자극하는 곳입니다. 현대 교회도 각성해야 이 죄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유혹과 위기가 많은 곳입니까? 아니면 편안함과 복이 넘치는 곳입니까? 오랜 세월 신앙이 없는 가정이었거나, 우애나 전통이 없었던 가정은 힘이 듭니다. 그 기반으로부터 불평이 올라오고, 무질서가 올라오고, 다툼과 저주가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5-6) 악은 악으로 쌓이고 선은 선으로 쌓입니다. 

오래 세월 쌓인 악과 잘못된 습관이 자자손손 영향을 미칩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선을 쌓는 가정에 천대의 은혜를 받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왜 성격이 나쁘고 감사가 없는지 너무 자기 탓을 하지 마십시오. 그 집안이 쌓아놓은 열매입니다. 내가 왜 성격이 좋고 일이 잘 풀리는지 하며 자기를 자랑하지 마십시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입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 은혜의 권좌 위에 선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지반에서 선하고 복된 기운들이 솟아오르기를 바랍니다. 내 대로부터 그렇게 선한 역사가 일어나는 가문이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솟는 곳입니까? 평안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과 새 힘이 솟는 곳입니까? 아니면 힘들고 시험이 들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만드는 곳입니까? 교회의 기반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성도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결집된 곳에서 성령의 에너지가 차고 넘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성령의 보좌 위에 든든히 서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라는 기반이 든든히 서야 여러분의 인생이나 가정의 기반도 든든해집니다. 

니골라당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권좌 위에 있다 보니 유혹이 이제는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말았습니다. 14절입니다.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5절 말씀입니다.“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은 민수기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는 원래 모압 왕 발락의 사주를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이 이를 돌이켜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발람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또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여 바알브올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그 제의를 따라 행음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처럼 니골라당이 버가모 교인들을 유혹하였고 그 유혹에 빠진 자들이 있었다고 주님은 경고합니다. 

니골라 당의 정체는 알기 어렵습니다. 대체적으로 초기 영지주의적 경향을 띤 이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14절에 나와 있는 대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침투한 세력에 대해서도 이세벨의 무리라고 하면서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계2:20)고 비난하였습니다. 행음은 윤리적인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혼합주의나 우상숭배를 할 때 일컫는 표현입니다. 초대교회는 매우 경건했습니다. 노골적으로 이런 육적인 음행을 주장했다면 그것에 동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 또한 그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가 있었다면 교회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버가모는 우상 숭배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나온 음식들이 많았습니다. 고대에는 축제도 많았는데 이 축제에서 나온 음식은 대부분 이교 신들에게 제의를 드리고 난 것들이었습니다. 축제나 제의는 고대 사회의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기독교인이 이런 축제에 참여하거나 또 시장이나 친구 집에서 이런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느냐는 문제가 붉어졌던 것 같습니다. 초기 영지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이런 육적인 문제에 대해서 매우 자유스러운 태도를 보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음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인정했습니다.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라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딤전4:4) 그래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당시 시장에는 이런 음식들이 많이 나왔고 그것에 개의치 않고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니골라 당은 아마 이런 자유와 지식을 주장했던 듯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자유함을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경고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8:1)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런 지식이 있지만 만약 그것 때문에 형제를 실족케 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3절입니다.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나 교회의 형편에 따라서 적용을 달리 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좀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합니다. 버가모와 같은 도시에서는 우상숭배와 관련하여 더 철저한 싸움이 필요합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온 예루살렘 결의와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행15:29) 요한의 싸움은 왕이 하사한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았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싸움과 유사합니다. 우상에 대한 거부가 우상의 제물에 대한 거부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인간은 죄악과의 싸움에서 자신할 수 없습니다. 죄악은 멀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인간의 내면의 자유만 가지고 우리는 우리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육적인 경계와 채찍과 훈련이 없이는 우리 내적인 자유도 보장하지 못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허용하다가 우상에게까지 먹힐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음식을 자유롭게 먹어도 좋다는 말씀도 있고 가려서 먹어야 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별 관계없이 어떤 음식도 먹지 않습니까? 여기서 어느 말씀을 지켜야 하느냐를 따지면 어떤 결론도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요한 것이 성령의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이 교회를 통하여 그 시대에 필요한 윤리와 말씀들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시대에는 우상의 음식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육체에 대한 규율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이들 니골라 당은 나중에 결국 부활도, 종말도 부인하고 영지주의 이단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물론 우상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대 사회에서 모든 사회 활동을 단절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줄 것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던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주기 위하여 몰래 싸두었던 귀한 음식을 내어놓듯이 그렇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마지막 종말 때에 일어날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우상의 음식을 거부한 그들에게는 하늘의 양식을 먹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만나는 천국에서만 먹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만나를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에, 불의한 일을 따르지 않다가 우리는 손해가 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순간에도 결코 굶기시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땅의 양식이 그치는 곳에 하늘의 양식이 임할 것입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 이 니골라당과 같은 세력이 교회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5절입니다.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니골라 당은 밖에 있는 적이 아니라 안에 있는 적입니다. 이들이 만약 우상숭배 하라고 하거나 음행을 하라고 했다면 아무도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악을 사주할 정도로 악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악의 위험성은 그들이 교묘하다는 점입니다. 어떤 때는 충성된 일꾼처럼, 어떤 때는 사랑의 사도처럼, 어떤 때는 진리에 대해서 매우 해박한 사람처럼 행세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 예수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12)로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날카로운 칼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 칼이 무력을 의미합니까? 16절입니다.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입의 검이라고 합니다. 입은 곧 말씀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이 검입니다. 말씀이 무기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 교묘한 이단들은 하나님 말씀으로 대적하십시오.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지, 이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교회인지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하십시오. 저 사람이 목사이니까 장로이니까 이런 타이틀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가 오래된 교회니까, 정통 교회니까도 아닙니다. 악은 언제든 틈을 타 비집고 들어옵니다. 가만 놔두면 독버섯처럼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개혁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의 검을 주셨습니다. 우리 자신들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디바의 충성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충성된 증인의 삶을 산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13절입니다.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아마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이 황제숭배라는 것이 단순히 황제 개인의 영화와 숭배를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은 황제숭배를 통해서 로마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 시민이면 누구나 1년에 한 번씩 황제 신전에 가서 가이사에게 분향을 하고 “가이사는 주시다”고 고백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 의식을 마친 자에게는 이 식을 마쳤다는 증명서가 교부됩니다. 황제 의식을 행한 자는 이제 자기가 믿는 신을 마음대로 섬길 수 있습니다.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재판정에 끌려가서도 가이사는 주라는 고백을 하면 살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만이 그들의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안디바는 아마 이런 황제 숭배나 황제에 대한 신앙고백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신실한 증인 한 사람만 있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버가모 교회가 칭찬받는 이유는 이처럼 충성된 증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주님은 예수님만을 주라고 고백하는 충성된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고백하십니까? 알라도 주님이 아닙니다. 부처도 아닙니다. 공자도 아닙니다. 어떤 신도 주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여기에서만 그쳐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야 합니다. 국가도 주님이 아닙니다. 민족도 주님이 아닙니다. 이념이나 사상도 주님이 아닙니다. 가장 강력한 적인 맘몬도 우리의 주가 아닙니다. 우리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시대에 안디바처럼 충성된 종은 누구입니까?

황제 숭배를 마친 사람들에게 증명서를 줍니다. 이 증명서는 매매나 어떤 특권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만이 매매를 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업이나 공무상에 불이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자에게, 또 그에게 충성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증명서가 있습니다. 17절입니다.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이 흰 돌이 바로 증명서입니다. 주님의 백성이라는 증명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호패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호패를 보면 이 사람이 양반인지 평민인지 이름이 무엇이고 언제 태어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신분증을 발급해주십니다. 거기에는 우리에게 새로 주어진 이름도 새겨져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자랑하는 증명서는 무엇입니까? 학벌입니까? 신용카드입니까? 아니면 내 신분을 드러내주는 어떤 클럽이나 모임이나 어느 교회 출신이라는 타이틀입니까? 우리의 자랑이나 기쁨이 주님께서 내게 발급해 주신 흰 돌의 신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위에 기록된 자신의 새 이름을 보며 기뻐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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