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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군의 여호와께서 연회를 베푸시리니 (사 2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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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군의 여호와께서 연회를 베푸시리니 (사 25:1-12)


미국에 살고 있는 한 친구의 딸이 몇 년 전에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제게 청첩장은 보내지 않고 그냥 직접 전화를 하면서 '몇 날 몇 시에 어디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 딸이 자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저 아버지와 어머니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자기 결혼식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거북하다고 해서 청첩장을 돌리지 않았네."라고 해명하면서, "그래도 석 목사한테는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아서..."라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다행히도(?) 그 친구의 딸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필라경향교회의 김동관 목사님께 부탁해서 제 대신에 결혼식에 참석하고 축의금을 전달하도록 했었습니다. 
나중에 김 목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을 때에 제가 "결혼식에 갔을 때 지정석이 없어서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물어 보았는데, 왜냐하면 그런 미국식 결혼식에서는 신랑신부에게서 정식초대를 받은 후에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낸 사람들만 피로연에서 자기 이름표가 붙어 있는 좌석에 앉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신부의 아버지의 친구'라고 해서 그냥 갈 수도 없는 그 자리에 '신부의 아버지의 친구의 친구'뻘인 김 목사님이 가셨으니 당연히 자리가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김 목사님 역시 다행히도(?) 그처럼 정식초대를 받지 못하고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위한 테이블 하나가 따로 준비되어 있어서 별 문제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여튼 우리나라의 결혼문화와는 아주 다르게 미국에서의 결혼식에는 그처럼 '신랑신부를 직접 알고 있는 사람'만이 초대되고 또한 참석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관례로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친히 베풀어 주시는 한 잔치에도 바로 그런 원칙이 적용됨을 보여 줍니다. 
6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연회'란 바로 장차 예수님 재림 후에 열리게 될 '천국의 혼인잔치'를 가리킵니다. 
그 잔치야말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초대받을 수도 없고 또한 자기 마음대로 참석할 수도 없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신 말씀을 통하여 과연 어떤 사람만이 그 '여호와의 연회'에 정식 초대와 영접을 받을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금세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절대주권자로 알고 고백하는 자만 천국잔치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 기록하기를 "1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조국 유다가 격동기를 통과하는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본문 이전까지에 기록된 이사야의 예언은 당시 유다가 처해 있던 복잡하기 짝이 없던 국제적 혼란과 불안하기 짝이 없던 국내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은 선지자로서 자기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던 이사야 선지자 본인의 심령에도 말할 수 없는 압력과 고통을 주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확고부동한 신앙을 자신의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신앙이 그처럼 외부로부터 그를 짓누르는 엄청난 정신적 압력 속에서도 그의 심령을 지극히 평화롭게, 지극히 건강하게 지켜 준 근원이었던 것입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신앙은 곧 모든 것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완벽하게 다스리며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고 고백하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사"란 '놀라운 일'이라는 뜻으로서 사람은 결코 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적적인 일들을 오직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즉 당신께서 만세 전부터 예정해 놓으신 그대로 이루어 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주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행하고 계시는 일들은 결코 '우연'이나 '임기응변' 따위가 아니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주권적 행사일 따름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소위 '현대 종교인'들은 하나님에게서 이 '절대주권'을 벗겨 내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적적인 능력, 무한하신 지혜, 예정과 섭리 등을 다 빼 버리고 지극히 평범한 존재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면 하나님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란 무슨 덕담이나 해 주는 '늙은 서당 선생'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신앙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하나님이 어떤 절대주권자이신지를 두 가지로 가르쳐 줍니다. 
우선 2절과 3절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해 줍니다. 
기록하기를 "2주께서 성읍으로 무더기를 이루시며 견고한 성읍으로 황무케 하시며 외인의 궁성으로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영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읍으로 무더기를 이루시며", "견고한 성읍으로 황무케 하시며", "외인의 궁성으로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영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등등 강한 부정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지혜와 능력으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가운데 하나님 역시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존재인 줄로 오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계획하고 행하려 하는 일까지도 당신의 뜻과 반대되는 경우에는 마음대로 막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못하게 하셨기' 때문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제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없게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래야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줄 알게 되며, 자기만 알고 있던 '포악한' 자들이 절대주권자를 "경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자기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됨으로써 비로소 사람과는 달리 '전능하신 절대자'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4절과 5절은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분 역시 하나님이심을 증거해 주는데, 기록하기를 "4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충돌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며 환난 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5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같이 주께서 외인의 훤화를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리움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폭풍"과 "폭양"이라는 대표적인 천재지변이 나오는데 이 둘 다 '사람으로서는 대처할 길이 없는' 재앙들입니다. 
본문에서는 "포학자의 기세"와 "외인의 헌화"를 바로 이것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며 악한 자가 권세를 잡게 되면 그 밑에 있는 "빈궁한 자"는 "성벽에 충돌하는 폭풍"을 맞은 사람처럼 그저 당하기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외인' 즉 이방인들이 침략해 올 때에 그로 인하여 "환난 당한" 자들은 내리쬐는 "폭양"을 피할 길 없는 사람처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약자들에게 "보장"이 되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왜냐하면 온갖 자연적 혹은 인위적 재앙들이 덮쳐 올 때에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고 "그늘"이 되어 주실 수 있는 절대주권적인 능력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빠져 나갈 길이 없는 폭풍우 한가운데서도 '피신처'가 어디 있는지를 아시고 정확하게 그리로 이끌어 주는 것이라든지, 마른 땅에 땡볕까지 뜨겁게 내리쬐는 가운데서도 그저 '구름'의 위치만 조금 바꾸어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아주 간단한 일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 즉 '사람이 못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시고' 또한 동시에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능히 도와주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높이고 그 성호를 '찬송'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야 그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여호와의 연회'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만을 전 인류의 역사와 자기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섭리하며 주장하고 계시는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믿는 것, 바로 이것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는 자'들로부터 듣고 싶어 하시는 참된 신앙고백입니다. 
오죽하시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의 제일 첫 계명에서 바로 이 신앙을 요구하시고 거기에다 또 둘째 계명까지 동원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사람도 자기를 바로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사람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식이 자기를 부모로 공경해 주는 것, 스승에게 있어서는 제자가 자기를 가장 훌륭한 스승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가장 기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자가 당신을 절대주권자로 경외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 더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그냥 '대충 형식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을 유일무이한 절대주권자로 높이 받들어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인류 역사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오직 당신께서 정해 놓으신 뜻대로 하시는 분이다.'라고 100퍼센트 그 주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모든 행사가 오로지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시는" 일이라고, 즉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시는 일이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불의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그 하시는 일 전부를 오직 당신의 '선하신' 의도에 따라 이루고 계시는 것 또한 뜨겁게 찬송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만스러운 것이 있지만 마지못해 그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절대주권을 발휘하고 적용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방법과 결과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잘 하신다'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지극히 당연한 본분인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을 뿐 아니라 절대주권자로서의 당신을 어떻게 경외해야 할지도 잘 알고 또한 그대로 준행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지극히 사랑해 주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는 데서만 그치지 아니하고 그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 받들면서 그 성호를 찬양하고 그 주권에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성도를 당신의 천국잔치로 기꺼이 초청해 주시는 것을 깨닫고, 금세의 역사와 인생에서 벌어지는 만사를 전적으로 홀로 주장하는 여호와만이 곧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내세의 영생을 주시는 구원주로 믿고 의지하는 자만 천국 잔치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6절 이하 8절의 말씀에 "6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8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끝나게 되는 시기, 즉 종말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베풀어 주실 큰 연회, 즉 저 천국에서 열리게 될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대하여 예언해 주는 말씀입니다. 
"기름진 것"이란 고기에서도 최상의 부위를 가리킵니다. 
요즘은 콜레스트롤을 걱정하면서 기름기 있는 음식을 피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소위 '꽃등심'처럼 기름이 적당히 섞인 부분이 가장 맛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3장 3절과 4절에도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제사를 드린 사람이 제물의 일부를 먹을 수 있었던 '화목제'를 드릴 경우에도 "기름"이 붙어 있는 부위들만큼은 반드시 모두 다 하나님께 화제로 태워서 바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오직 당신께서만 받으셔야 했던 것을 이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오히려 베풀어 주시는 연회이니 그 얼마나 극진하고도 풍성한 잔치가 되겠습니까?
사실상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음식물도 천국잔치 자리에서 성도들이 먹고 마시게 될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처럼 그저 '제일 기름진 것'과 '최고급의 포도주'라고 표현하고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릴 구원의 잔치는 그저 먹고 마시는 즐거움만 있는 곳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7절에 보면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장애물들이 다 제거되고 완벽한 교제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스스로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는 무지의 '면박'으로 덮여 있었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통은 죄악이라는 '휘장'으로 막혀 있었지만, 이런 모든 것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이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사귈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8절에서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고 약속되었습니다. 
그 천국잔치에서 누리게 되는 최고의 기쁨은 바로 '사망'이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이야말로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원인이며, 죄인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수치"의 저주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의 연회에 초대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 사망 대신에 영생을 주실 것이니 실로 '모든 눈물이 씻기며 최악의 수치가 제하여지는' 행복하기 짝이 없는 잔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그처럼 모든 것이 풍성하고 한없는 기쁨만 넘치는 그 멋진 잔치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어지는 9절부터 12절의 말씀이 증거해 주기를 "9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10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의 초개의 밟힘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11그가 헤엄치는 자의 헤엄치려고 손을 폄같이 그 속에서 그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 교만과 그 손의 교활을 누르실 것이라 12너의 성벽의 높은 보장을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그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라고 고백할 줄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을 친히 뵙게 될 날을 기다리되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기다린 사람만이 그 '여호와의 연회'에 앉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바로 하나님을 '구원주'로 믿는 신자를 가리킵니다. 

10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그처럼 구원받게 된 신자들과는 정반대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고 살던 교만한 인생이 하나님께로부터 심판받게 될 장면을 대표적인 불신 민족 "모압"을 통해서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거름물" 속에 섞이게 된 "초개" 즉 지푸라기의 꼴은 그 얼마나 비참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 아래 "밟힐" 불신자들의 꼴이 바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름물' 속에 빠져서 "헤엄치려고 손을 펴는" 것은 그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 치게 될 모습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허우적거리는 "그 손의 교활"마저 "누르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일단 하나님의 영벌 심판을 받게 되면 다시는 벗어날 길이 없으며, 그처럼 자기 스스로의 힘만 의지하던 자의 '손'은 세상에서 "성벽의 높은 보장"을 자랑하던 그 '교만'한 마음과 함께 영원한 저주에 빠지게 될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와 역사의 마지막 날에는 '천국잔치'에 들어가는 구원인과 '영벌'에 떨어지는 불신자들과 철저하게 나누어지게 되는데, 한 가지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그 구원의 잔치에 참석하게 될 대상을 두고 6절에서는 "만민을 위하여"라고 했으며 7절에서는 "모든 민족"이라고 했으며 8절에서도 "모든 얼굴에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문자 그대로만 본다면 마치 '온 세상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실 성경의 이런 말씀 몇 군데를 근거로 해서 소위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원이란 결코 온 세상사람 모두에게 주어지는 일반적,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함을 입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수적, 제한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마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본문의 전후문맥을 함께 읽어 보아야 합니다. 
이 구원의 잔치는 바로 당신을 알지도 경외하지도 섬기지도 않았던 불신자들을 완전히 심판하신 이후에 벌어지는 잔치입니다. 
즉 '여호와의 연회'에 들어가게 될 성도들과 '거름물 속에서 초개의 밟힘 같은 영벌의 저주'에 떨어지게 된 악인들이 이미 완전히 갈라져 있는 때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제 '만민', '모든 민족', '모든 얼굴'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상은 오직 교회와 성도밖에 없습니다. 
마귀의 백성들은 다 지옥에 떨어지고 사탄의 나라는 철저하게 분쇄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무슨 '백성'이나 '나라'라고 불릴 수가 없는, 이미 심판주의 발에 밟혀서 꼼짝 못하게 된 비참한 존재 외에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최후심판이 끝나게 되면 '나라'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천당밖에 없고 '백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대상은 바로 구원받은 성도밖에 없기 때문에, 그 천당 백성이 곧 '만민'이며 '모든 민족'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신자를 구원해 주실 한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고 간절히 '기다렸던' 성도만이 천국의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오직 교회가 곧 영원한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며 오직 그 구세주를 믿는 성도만이 영원한 천국백성이 될 것을 확신하는 구원 신앙을 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굳게 지킴으로써, 저 천국에서 베풀어 주실 '여호와의 연회'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교제하며 모든 사망권세를 완전히 이기는 궁극적인 구원에 다 함께 참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사야 선지자는 이처럼 '당신의 기사를 그 정하신 뜻대로 행하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또한 이방 민족들은 자신의 '손'만 의지하는 교만에 빠져 있는 가운데 오직 택함을 입은 참 이스라엘 백성만은 '우리의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고 고백했습니다. 
바로 그 신앙이 이사야 선지자로 하여금 그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한 격동기 한가운데를 살면서도 그의 마음을 지극히 평안하게 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에만 몰두하게 되면 더욱더 염려만 커지고 갈수록 초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럴 때마다 참된 신자는 '여호와께서 나의 인생과 전 역사를 전적으로 주장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시다.'라는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자신의 생활 주변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재난과 질고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마치 '거름물 속의 초개'같이 비참하고도 무기력한 존재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민을 위하여 약속해 주신 구원을 더욱 굳게 소망함으로써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을 그런 '절대주권자'로 경외하고 그런 '구원주'로 의지하는 성도만을 '모든 인생의 눈물을 씻겨 주시고 죄인의 수치를 제하여 주실' 저 영화로운 천국잔치로 초청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잔치에는 반드시 그 '잔치의 주인'을 아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잔치'에도 그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초대될 수 있고 참예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인생의 '폭풍과 폭양' 중에도 당신의 전지와 전능으로서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감사와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사람, 자기 속의 '교활과 교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는 달리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완성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곧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교제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금세의 역사 속에서 오직 당신께서 창세 전부터 뜻하신 그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써 기사를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내세에서 바로 그런 참된 신앙인만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함으로써, '기름진 것과 맑은 포도주'로써 예비되어 있는 저 영화로운 '여호와의 연회'에 꼭 함께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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