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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좋은 부모가 되자 (잠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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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부모가 되자 (잠 1:7-9)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귀한 곳은, 가정이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자녀들, 형제자매들이 살고 있고, 마음껏 편히 쉬고, 생활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정을, 이 땅의 천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오늘은 전국의 모든 교회가 ‘어린이 주일’로 지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어린이의 존재와, 양육 문제를 생각하면서, 어린아이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는, 주일이 되기를 바란다. 옛날에는 어린이 주일을 ‘꽃주일’이라고 했다.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들여다보라! 

거기에 티와 거짓이 있는가? 아이는 너무 밝고 아름답기에, 이러한 꽃은 없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꽃 중의 꽃이다. 아름다운 꽃 어린아이를, 주일날 하나님께 바쳤기에, ‘헌아식’이라고 했다. 침례교는 유아세례가 없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이, 침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막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따라서 이렇게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침례를 베풀지 않는다. 유아 세례를 베풀지 않지만, 그 대신 헌아식을 한다. 


헌아식을 할 때는,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했다. 

(1) 그 어린아이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하겠다.’는 다짐이다. 그 어린아이에 대한 양육 책임이, 부모님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다짐을 해야 한다. 

(2) 이 어린아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아이로 키우겠다.’는 약속이다. 이 아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을 심어 주는, 양육을 하겠다는 부모님의 다짐을, 하나님과 많은 성도들 앞에서 약속이다. 

(3) 이 어린아이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아이로 키우겠다.’는 서약식이다. 이것이 헌아식을 하는 목적이다. 우리 아이가 커서, 하나님 앞에서 잘 키우겠다는, 부모님의 뜻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부모님에게 고마움을 갖겠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아이로구나! 멋있게 살아야지!” 

이 사실을 알고, 깨닫게 되면, 평생 어떻게 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그런데 요즘 부모님은 이렇게, 마땅히 할 일에는 무관심하고, 엉뚱한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잘못된 방향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애정을 쏟는다. 

이 시대는 자식 때문에, 부모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어떤 장관은 자식을, 특례 입학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어떤 분은 자식과외비를 대려고, 자기 몸을 파는 사람도 생겼다. 자식 때문에 ‘대통령 하야’까지 나왔다. 

옛말에 ‘무자식이 상팔자’라 했는데, 그 말을 정말 실감할 수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 관심을 갖고, 애정을 쏟았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나, 자식에 대한 애착은 다 있다.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희생한다. 맹자어머니는, 비교가 안 될 정도다. 

그러나 과보호한 자식에 대한 애착이, 사랑에서 나온 애착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적이지는 못하다. 자식 키우는 일이, 졸업장을 따고, 돈이나 부동산이나 물려주려는 것만 인식하면, 잘못된 생각이다. 이를 위해 부정을 저지른다면, 더욱 더 성경적일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양육해야 하나? 

1. 경건한 자식으로 길러야 한다(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תי󰚄א󰙟, 가장 처음)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야, 참인간”이라는 말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지식이 처음 시작…”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데서, 지식이 시작되는가? 하나님을 경외함과, 지식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는다. 그래서 유대인 속담에 ‘허리를 굽히면 진리를 줍는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복종하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먹힌다. 요즘은 바르게 가르치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그렇다. 

‘미련하다’(에빌, לי󰕱󰔤)는, ‘우둔하고, 고집 센 사람’을 말한다. 미련한 사람의 특징은, 고집이 세다. 아닌데도 맞는다고 우긴다. 절대로 자기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따라서 교육을 하려고 해도, 배울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자식을 키우는데 있어서, 경외하도록 해야 한다. 

이 시대의 특징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없는 세상’이다. 부모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생님도, 어른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난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 되었다. 누구도 무서울 것이 없는 세상은,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렇게, 거칠어졌고, 포악해졌고, 삭막해졌다. 신앙인의 교육 제1조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데, 제일의 목적이 있다. 그래야 자식들이, 세상을 경건하게 살아가게 된다. (창39장)의 요셉을 보라.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 온갖 유혹을 받는다. 

그런데 집요한 유혹을 뿌리치며 (9下)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라고 말했다. 집요한 유혹을 이길 수 있던 힘은, 의지가 주는 힘도 아니고, 양심이 주는 힘도 아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지식의 근본’이라 했다. 

근본을 가르침이, 기독교 교육이고, 부모님이 할 일이다. 요즘 ‘육아 교육’에 대한 책이, 잘 팔린다. 그런데 아이들도, 보육 책을 사간다고 한다. 책을 사가는 아이에게 ‘너는 이 책을, 왜 사가니?’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영악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지금까지, 제대로 양육 받았는지 알고 싶어서요.” 지혜의 왕 솔로몬은, 모든 낙을 다 누린 후 (전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런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고 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꾸짖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마음대로 살다가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과외공부보다, 예능교육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로, 교육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가장 영광스런 길이다. 


2. 경건한 부모가 되어야, 복된 자녀가 된다(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부모가 먼저, 경건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라는 말이다. 부모가 경건해야, 가정이 경건하고, 자녀들이 모두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 시대는 경건이 없는 시대다. 가정에도 경건이 없고, 사회에도 경건이 없고,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경건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창5장)에는, 아담에서부터 노아의, 족보까지 나온다. 이 족보를 보면 ‘낳았고’란 말과 ‘죽었더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나고 죽는 것은, 우리 인생이 피하지 못할, 운명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성경은 유독, 한 인물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인다. 바로 에녹이다. 에녹은 타락하는 시대에 살았지만,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올바른 삶을 살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믿음으로 성결하게 살았던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복을 누렸다. 또 (28-29)에는 노아와 같은, 위대한 후손을 얻게 되니,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우리가 놓치면 안 될 중요한 인물이 또 있다. 그는 (창5:3)에 나오는 ‘셋’(놓다, 보존하다.)이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셋은 인류최초의 순교자, 아벨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다. 그런데 셋은, 참 경건한 자였다. 당시 가인의 후예들은, 방종과 타락의 길을 가다가, 하나님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셋의 후예들은, 경건의 길을 갔다. 그래서 (창4:25-26)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했다. 셋의 후예들로부터,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했다. 가인의 족보는 불경건한 핏줄로 이어졌지만, 셋을 통해서 형성된 족보는, 참으로 경건한 핏줄이 되었다. 이처럼 부모의 신앙과 삶이, 후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다. 

(수7장)에 ‘아간’이 나오는데, 전쟁 중에 빼앗은 전리품 중에, 외투 한 벌과 은금을 몰래 숨겼다가, 자기민족을 패배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기가족을 몰살시킨 장본인이다. 그의 조상은, 며느리와 부도덕한 관계를 통해 낳았다. 아간은 바로 그 후손이다. 

(출20:5)에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했다. 우리 부모의 잘못 때문에, 피눈물 흘리며, 탄식하는 자식이 생긴다면,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와 자녀의 신앙은 어떤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진실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있는가? 하나님을 소홀히 하고 있다면, 이미 잘못된 실패의 길로, 들어섰다고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를 보면, 믿음의 부모가 오히려, 자녀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교육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데, 자녀들 앞에서, 오히려 그 눈을 가리고 있다. 그래서 중고등학생이 되면, 당연히 교회 출석을 중단하는 것으로 여기고, 주일 성수를 못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런 신앙교육을 시켜 놓고, 나중에 후회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어떤 청년이 서울대학병원에서,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식구들과 의사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이때 아들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버지 감사합니다. 열심히 가르쳐 주셨기에, 서울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다 아버지의 은혜다.”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아들은 힘겹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졌을 때,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건져 주셨고, 4년 전에, 제 이름이 서울대학 게시판에 붙었을 때, 아버지는 저를 얼싸안고, 기뻐해 주셨다. 모든 것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나에게, 죽음에 대해, 말씀해 주지 않았나요?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왜 한 번도 말씀해 주지 않았습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가야만 하는데 모든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 이 말을 끝으로, 아들은 눈을 감았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는, 어떤 자녀의 성공도, 의미가 없다. 다른 것이라면, 혹시 양보할 수 있어도, 하나님을 양보하면, 안 된다. 다 있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인생 실패자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자랑스러운, 믿음의 부모인가? 우리의 집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는, 믿음의 집을 세우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믿음을 지키고, 그 믿음을 자녀들에게, 제1의 유산으로 물려주기 바란다. 그때 우리 자녀들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것 이다. 이런 복이 넘쳐나기를 바란다. 


3. 어떤 경건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는가?(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부모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면, ‘아름다운 관과 금 사슬과’같다고 했다. 아름다운 관과 금사슬은, 영화와 존귀를 상징한다. 

면류관을 쓰고, 찬란한 금목걸이를 한 사람은, 존귀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이처럼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치면, 자녀들은 존귀하게 된다. 어떤 부모든지, 자기 자녀가 명예롭게 되기를 원하기에, 사랑이 담긴 말을 자녀들에게 해준다. 

부모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면, 그 말씀이 자녀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그들을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자라나도록, 인도해 줄 것이다. 또한 자녀들도, 부모님이 가르쳐 주는 말씀을, 면류관과 금목걸이처럼 존귀하고, 귀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부모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녀들은, 존귀하게 되고, 부모님의 말을 멸시하는 자녀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영광스런 자식들이 되도록,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어떤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가?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순종해야 한다. 

(1) 신앙생활에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주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찾아가는 신앙의 모습이, 부모에게 있어야 한다. 주일은 만사를 제쳐놓고, 깨끗한 옷차림으로 하나님께 나와, 엄숙하게 예배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자라나는 자녀와 자손들은, 이러한 부모님의 모습을 통해서, 알게 모르게, 깊은 영향을 받게 된다. 슈바이처 박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나는 어렸을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서, 예배에 참석하는 동안에, 그 엄숙한 분위기에서, 경건을 배웠다.”고 말했다.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자. 

(2) 생활에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가정에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모습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곳에, 경건한 삶이 나타나고, 경건함이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내려가게 된다. 

요즘 아이들의 언어가, 왜 욕으로 점철되었는가? 그 이유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거친 대화 내용이, 어린아이들의 대화에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이 있는 집안에서, 경어를 쓸 줄 모르니까, 밖에 나가서도, 경어를 제대로 쓸 줄을 모르고, 제대로 인사할 줄 모른다. 

그래서 가정 안에는, 경건이 있어야 한다. 벽에 붙어있는 그림 한 장에도, 장식해 놓은 장식물과, 오고가는 대화 한마디 속에도, 경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본이다. 

(3) 일하는 모습 속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열심히 일을 할 때라고 한다. 열심히 일을 하면 살 때, 그 곳에는 부정도 없고, 문제도 없다.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부정을 저지를 여유도 없고, 문제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부모가 일하는 곳에, 성실함이 없다. 어느 청소부에게, 대학 다니는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언제나 자기 아버지가, 청소부인 것이 창피하고,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열심히 자기가 맡은 일을 했다. 어김없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일하러 나간다. 

어느 날, 밤새도록 열이 나서 앓다가, 새벽이 되었는데, 또 일어나서 일을 나갔다. 안타까워 함께 따라 나선 아들은,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눈여겨보는 동안, 일하시는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청소부인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고백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장성한 아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정말 존경스러운 모습으로 비춰졌다면 그만 아닌가? 부정한 짓을 하더라도, 돈만 많이 주면 존경하는가? 부모는 자식이 크건 작건, 항상 영향을 끼치는 스승이고 교사이다. 신앙생활에서 경건을 심어주어야 할 뿐 아니라, 경건한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일하는 모습 속에서도, 경건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때 경건은 대를 잇는 가문이, 경건한 자손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다. 특별히 헌아식이 있다. 부모가 먼저 자식에게 모범이 되어, 하나님의 복이 생활 속에 나타나고, 가정 속에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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