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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요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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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요 13:31-35) 

<배신과 부인 가운데 얻게 될 영광>

오늘 봉독한 요 13: 31-35절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하셨던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차라리 부활절 이후보다는 사순절에 다루어야 옳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고별 대화’(farewell conversation) 중에 한 부분인데, 특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 ‘떠나가심’(departure)을 소개하고 있기에 특히 부활절과 오순절 성령강림절 사이에 읽기에 적절한 말씀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할 것을 예고하신 바로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이런 예수님의 예고의 말씀을 듣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오늘 봉독한 요 13: 31절 바로 전에 있는 30절은 때는 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기에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아끼고 사랑하셨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배신할 것을 예언하신 바로 그 날 밤에 나머지 열 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본문 말씀 바로 뒤에는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예언하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이야말로 가장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두 제자의 배신을 예고하신 말씀 사이에 끼어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쓸쓸하고 외로운 밤, 가장 믿었던 제자들이 차례로 배신할 것을 예언하신 그 괴로운 날 밤에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31-32절을 보면 이 쓸쓸하고 외로운 밤, 예수님은 무려 네 번씩이나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믿었던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을 예언하시는 그 중간에, 가장 쓸쓸하고도 외로운 밤에 영광을 받으신다니,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말씀이지요. 

이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또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거꾸로 하나님이 예수님 때문에 영광을 받으셨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친히 예수님께도 영광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과 상호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영광을 받습니다. 거꾸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아드님이신 예수님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하필이면 왜 이처럼 쓸쓸하고 외로운 밤, 가장 믿었던 제자 가룟 유다가 배신하고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는 이 괴로운 밤에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고 베드로에게 부인을 당하시는 것이 어떻게 예수님은 물론이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계획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고 베드로에게 부인을 당해야지만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배신과 부인을 예고하는 밤은 배신과 부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치의 밤이 아니라 영광의 밤입니다!

<새집과 장미가시>

오늘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배신과 부인으로 얼룩져 있는 쓸쓸한 밤입니까? 하지만 바로 그 때가 영광을 받는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남들이 우러러 볼 때가 아니라 외면하고 손가락질 할 그 때가 실상은 영광의 밤입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이 나무 위에 집을 짓는데 좀처럼 부서지지 않는 집을 짓습니다. 심지어 태풍이 불어도 나뭇가지가 꺾였으면 꺾였지 새집은 여간해서 부서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새들은 일부러 바람이 가장 강하게 부는 날 집을 짓습니다. 강한 바람이 불어와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장미의 향기는 꽃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가시에서 난다는 말도 있습니다. 1온스의 장미향수를 얻기 위해서는 1톤의 장미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장미향수는 수없이 가시에 찔리는 고통 끝에 얻는 선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장미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발칸산맥에서 장미를 채취하는 시간은 가장 춥고 어두운 시간인 새벽 2시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든 새벽 2시 한밤중에 장미는 가장 향기로운 향기를 뿜어내는 것이지요!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한밤중에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새들이 가장 강한 바람이 불 때 가장 견고한 새집을 지을 수 있고, 가장 깊고 외로운 밤에 장미가시에서 가장 진한 향기가 나듯이 예수님 역시 배신과 부인을 예고하는 그 외로운 밤에 당신과 하나님이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실 것도 함께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향기도 가장 큰 시련 한 가운데에서 뿜어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척추 장애로 신장이 134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 김해영 씨가 쓴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닌 아버지가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땅바닥에 내던져서 척추를 다쳤습니다. 그래서 키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초등학교를 끝으로 학교공부를 중단했습니다. 고물상을 하던 아버지는 고달픈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고, 어머니는 정신병자가 되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김해영 씨는 네 살 때부터 정신 이상자가 된 어머니 대신 식모살이를 하면서 동생 넷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계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기계편물 부문에 금메달을 땄고 세계적인 편물기술자가 됐습니다. 미국의 명문대학인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했고 지금은 아프리카에 직업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김해영 씨야말로 가장 쓸쓸하고 외로운 밤을 영광의 한낮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배신당하고 부인당할 것을 예언하시는 밤에 영광 받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을까?” 이렇게 푸념하시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이토록 가시가 많은 나무에 어떻게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있을까?” 생각을 바꾸셨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도 장미꽃에 왜 가시가 있을까를 보지 마시고, 어떻게 가시나무에서도 아름다운 장미꽃이 필 수 있을까를 보시기 바랍니다! 배신과 부인의 슬픈 밤 한가운데에서 밝아오는 내일 아침 얻게 될 영광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새 계명인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34-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얼마 있지 않으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하나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새로운 계명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귀가 따갑게 들어온 말입니다. 결코 새로운 계명이 아님에도 예수님은 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인 이유는 먼저 이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전혀 새로운 사랑입니다. 요 13: 1절을 보면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도 있겠지만 죽기까지 희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한다는 말은 성 어거스틴의 해석을 빌릴 경우 두 가지의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마치 우리가 이 세상의 전부요 하나밖에 없는 양 사랑하십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그 바쁜 와중에 수많은 무리들에게 둘러 싸여 계셨지만 언제나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특수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결코 도매금으로 넘긴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사람의 특별한 상황을 헤아려 세심하게 보살펴주셨습니다. 숲만 보는 사랑이 아니라 그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나 풀 한 포기까지 놓치지 않으시고 개별적으로 구체적으로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로, 어거스틴에 따르면 예수님은 누구나 다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피부색이나 민족, 국가, 종교, 지위나 신분과 상관없이 무차별적인 사랑입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 취미가 같고 같은 고향 사람만 사랑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사랑의 화신이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이제 새로운 사랑의 정의(definition)가 된 것이지요.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마땅합니다. 어떻게요? 예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든지 당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계명이기 때문에 새 계명일 뿐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할 때 전혀 새로운 시대와 공동체를 열 수 있기 때문에도 새 계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받은 만큼 돌려주는 사랑을 합니다. 물물교환, Give & Take, 주거니 받거니 사랑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는 이와 같이 편협한 사랑을 뛰어넘어 예수님처럼 자기를 희생하는 무제약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교회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부터 이런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예수님은 멀리 가서 이방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부터 가까운 사람들끼리, 형제자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必要愛(필요애)와 膳物愛(선물애)>

C. S. 루이스는 두 종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필요애’(need love)와 ‘선물애’(gift love)입니다. 필요애는 말 그대로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소유욕 때문에 사람이나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필요애는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하여, 다시 말해 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선물애, 즉 선물을 남에게 안겨주듯이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선물로써의 사랑은 결핍되고 부족하기 때문에 마구 채우려는 사랑이 아니라 내 안에 넘쳐나는 것을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어주기 위해 베푸는 사랑입니다.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욕심 사납게 빼앗아 오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족한 것을 메워주고 보충해주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항상 남에게 선물로 베풀고 나누어주는 사랑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필요애가 아니라 선물애였습니다. 언제나 예수님 안에 차고도 넘치는 생명을 값없이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베푸는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필요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욕심 사납게 빼앗아오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거저 남에게 나누어줘 차고도 넘치게 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내게 가장 중요한 선물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듯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내리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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