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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대 희망 절대 긍정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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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희망 절대 긍정 (마 15:21-28)

1.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리고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축복의 말씀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며 사는 것이 사람의 근본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런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명으로까지 정한 것을 보면, 부모 공경하는 일이 쉽지 않고,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이기에, 계명으로까지 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누구나 쉽게 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계명으로까지 정하기야 하겠습니까?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지간히 우상을 잘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라는 계명이 있음에도 이렇게 우상을 좋아하는데, 이 계명이 없었다면 어떠하였겠습니까? 이처럼 사람이 너무도 이기적이어서 자기 낳은 부모조차도 공경하지 않을 수 있기에, 하나님께서 계명을 정하여 사람의 도리를 다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2. 저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앞에 늘 죄인이 됩니다. 누구든지 부모님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 것입니다. 나 하나 살기가 바빠서 제대로 효도 한 번 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될 것입니다. 평생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할지라도, 모시는 과정에서 못마땅하게 여기고, 속상하게 생각한 것들로 인하여, 이 날이 돌아오면 마음이 편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기 위한 것일까요? 연세 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하는 존재인가요?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싶겠습니까? 우리들도 나중에 모두 부모가 될 터인데, 자식에게 짐을 지우지 않기 위하여 “나는 부모가 안 될 거야” 라고 할 수 있는가요?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거기에 보람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3.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 모두는 정신분석학자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고통의 원인을 ‘억압’으로 보고,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억압을 다른 방식으로 ‘전이’시키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모두 정신분석학자라 불러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고통의 밑바닥에는 여러 종류의 억압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 억압 감정들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숨어 있다가, 우리의 형편이 꼬이게 되거나 부정적이게 되면, 폭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 고통과 아픔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혜는 이 억압감정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기에 성경에서도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로 떠 넘겼습니다. 이것을 전이시켰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바친 짐승이 죽고, 그 피를 뿌릴 때에, “내 죄로다.”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죄책감을 떠넘겨버리는 것입니다.

프로이드는 우리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것이 ‘성적억압’이라고 하였는데, 저는 한국인의 대표적인 억압감정은 ‘가부장적 권위의 억압’이라 봅니다. 자녀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아버지의 권위로 인한 억압감정이 있고, 아내들에게는 무조건 남편 말을 따라야 하는 남편의 권위로 인한 억압감정이 있습니다. “애들은 어른들이 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고 나가 놀아라.”고 하였습니다. 아내들은 시집을 오면서 “여필종부”여야 했습니다. 가부장적 권위 앞에 늘 기가 죽어야 했습니다. 충분한 사랑을 공급받으면서 자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춘기 때가 되어, 자기 세계가 형성이 되면서 어른들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고, 합리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기 쉬웠습니다.

4. 그러다가 청년이 되고, 사회인이 되면서,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억압감정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절대로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새로운 인생관을 정립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출세하여 부모를 이겨보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와 상관없는 인생을 살겠다고 멀리멀리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고들이 순기능으로 작용을 하면 치유가 되지만,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 됩니까?

삶이 고달프고 노력들이 헛되게 되면, 억압 감정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와서 역기능으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더욱 부모를 탓하는 꼬인 인생이 되기도 하고, 사회에 불만을 토로하는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태어나기를 잘못 태어났다면서 조상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냉철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짐을 지우고자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식들에게 억압감정이 남도록, “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느냐?”면서 부모 제일주의를 주장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효도는 유교에서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성경에서도 강조하고 있으니 우리 기독교도 효도의 종교라고 말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부모가 될 것이고, 또 부모가 되었고, 누구나 부모로 살 것이기에, 부모의 삶이 얼마나 귀한 것임을 알아, 부모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세상에 기쁜 일이 많지만, 내 자식 잘되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힘들어하는 것을 지켜보는 부모마음보다 더 아픈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부모 되어 느끼는 마음이 이러할진대, 우리를 바라보았던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5. 오늘 말씀은 한 어머니의 숭고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딸이 귀신들렸습니다. 흉악하게 살아갑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습니다. 엄마는 딸 때문에 하루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누구를 만나 이야기를 해도 마음은 늘 아파하는 딸에게 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귀신들린 딸을 가진 한 엄마의 삶 속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엄마의 삶 속에는, 부모의 삶 속에는, 도무지 포기할 수 없고, 도무지 양보할 수 없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자식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는 일만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6. 오늘 말씀은 Affirm이 Inform이 되어서 Confirm이 되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엄마의 마음을 Affirm하게 하는 한 가닥의 희망은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으로 오신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자식으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면서 늘 속상해 하던 엄마의 마음에 깃든 한 가닥 긍정적인 희망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엄마의 마음에 깃든 이 희망, 이 긍정적인 마음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절대 희망이었습니다. <절대희망>인 것은 예수님을 향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고,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희망의 제곱으로 <절대희망>인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기회를 만날 수 없다는 면에서 절대희망인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면에서 절대희망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하늘이 준 희망과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땅의 희망이 한꺼번에 만나는 자리이기에 절대희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소리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목에서 사람의 이목을 상관하지 않고 소리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이 소리는 자신의 아픔을 외치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하늘 소망이 자신에게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부르짖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는 절대 희망의 외침인 것입니다.

7. 그런데 예수님께서 못 들은 체하시는 것입니다. 23절의 말씀을 보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거절입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여자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거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며 도와달라고 합니다. 여자는 예수님만이 희망이었기에 절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세 번째 거절입니다. 세 번이면 포기할 만도 할 터인데, 여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여인의 모습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요? 도대체 이 엄마의 마음속에는 어떤 정보가 입력되었기에 결코 물러서지 않는 것인가요? 엄마에게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자료가 Inform되었습니다. 엄마의 마음에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Form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Inform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절대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긍정의 자세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치사하더라도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하여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절대긍정의 마음인 것입니다. 절대긍정은 절대희망을 이루기 위한 길이요, 방법이요, 도구인 것입니다. 엄마는 예수님의 3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한 번도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자식을 살리는 일에서만큼은 결코 부정적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식을 향한 엄마의 마음은 절대 희망이요, 절대긍정인 것입니다. 어찌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8. 예수님은 이러한 믿음을 너무도 귀하게 보았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 딸이 낫기 시작하였습니다. 엄마의 뜻이 받아들여지고, 예수님의 축복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 일이 Confirm이 된 것입니다. Confirm이란 말은 ‘함께 단단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한 여인의 절대 희망과 절대 긍정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케 하였고, 예수님께서 축복의 말씀을 하심으로 딸의 병이 낫기 시작한 것입니다. Confirm이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Affirm이 Inform이 되어 드디어 Confirm이 되었습니다.

정말 예수님께 희망을 품은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희망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인 방법으로 접근한 것이 유효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희망과 궁극적인 긍정을 주는 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내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Confirm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주님의 부활인 것입니다.

9. 오늘 우리는 한 엄마 속에 있는 절대희망과 절대긍정을 보면서 우리 속에도 절대적인 희망과 긍정이 있음을 Confirm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서로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희망을 품고 늘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에 두 가지의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부모로 인한 억압의 고통이 있다면 자식을 사랑함으로 억압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녀를 향한 무한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때에 지난날의 억압으로 인한 고통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죄책감으로 인한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누구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앞에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부모가 되어 우리의 부모가 우리를 사랑했던 그 마음으로 우리의 자식들을 사랑하게 될 때에, 무거운 마음의 짐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10.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두운 우리 마음에 한 가닥의 긍정적인 희망을 주시려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을 치유하시고, 희망적인 인생을 사게 하심을 믿을 때에 우리는 부정적인 마음에서 긍정적인 자세로 돌아서게 됩니다.

절대 희망을 가지고 절대 긍정으로 사는 사람을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렇게 살 때에, 하나님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고, 인생의 고통을 이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고 고백하는 Confirm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들에게는 부정적인 것도 있고, 억압적인 것도 있고, 죄책감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없애고자 하여 없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여 우리가 바꾸어야 할 것들입니다. 부정은 긍정으로 바꾸고, 억압은 희망으로 바꾸고, 죄책감은 사랑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머니 주일을 맞아서, 한 엄마의 숭고한 삶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Confirm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희망, 절대긍정으로 살아, 어둠을 이겨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선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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