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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눅 1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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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눅 17:1-10)

◈ 믿음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지식적인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지식 뿐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이 중요합니다. 감정과 의지가 뒤따르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특별히 지성인들의 믿음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알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가르치라고 하면 잘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믿음이라는 것은 지식뿐입니다. 가슴이 싸늘합니다. 그래서 가슴이 뜨거운 사람을 보면 광적인 신앙이라고 비판합니다. 자기만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 속에 뜨거운 가슴이 없습니다.

둘째, 감정적인 믿음입니다. 
믿고 의지하는 감정은 있는데, 지식도. 의지도 없는 믿음입니다. 
믿고, 죄 사함 받고, 감격하고 축복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이런 뜨거움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조그마한 환난이 닥쳐와도 금방 쓰러지고, 언제 믿었냐 싶게 그 믿음이 사라지고 마는, 유감스러운 믿음입니다. 

셋째, 고민하는 믿음입니다. 
믿고 싶어하고, 믿어야 될 줄도 알지마는 믿어지지 않아서 고민하는 유형입니다. 
한 평생 믿음 얻기를 추구하고 사는 구도자입니다. 믿고 싶어하는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영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몇 년을 믿었다고 해도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그저 믿어야 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항상 그 자리에 맴도는 믿음입니다. 

넷째로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때로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믿어집니다. 
의심할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그냥 믿어집니다. 이 믿음은 사랑입니다. 이 믿음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정의 문제도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마음속에서 믿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게 하십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아주 좋은 여건에서도 믿음없이 살고 한 평생 의심하며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 살면서도 든든히 하나님을 믿고 평안하게 사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믿어지는 믿음이 복된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우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를 복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고 나면 이해가 됩니다. 믿고나면 감격도 기쁨도 있습니다. 
이 믿음 위에 여러분 인생의 집을 잘 건축하시기 바랍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1-4)

☞ 죄짓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죄짓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실족케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나 신앙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실족케 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언제든지 실수와 허물을 범할 수 있기 때문. 
① 우리는 말과 행실을 잘못하거나 부주의하게 함으로써 다른 영혼을 실족케 할 수가 있다. 
② 우리 그들이 연약한 성도 앞에서 육신적이고 세속적으로 살아 갈 때에 실족하게 할 수 .
③ 우리 믿음과 생활이 일치하지 못할 때 연약한 성도들이 실족할 수 있습니다. 
④ 언행을 함부로 함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도! 심지어 주의 종들이라 할지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어린양을 실족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용서받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연약한 자 하나를 실족케 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연자 맷돌은 "나귀 맷돌"로서 곡식을 찧거나 가루로 만들 때 사용하는 것으로 돌리는 맷돌보다 몇 배는 더 큰 것입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던져지면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물개라 할지라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하라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 지도자들이나 믿음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다 죽어야 할 것입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말씀은 그만큼 이 죄가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죄를 큰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실족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두 번째 ☞ 3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내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우리는 믿음이 약한 지체가 실족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들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범했는데도 무조건 너그럽게 봐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다른 곳에서 이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살후 3:10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

살후 3: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자와는 사귀지도 말라"

딛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은 한 두 번 훈계 한 후에 멀리하라"고 하셨고, 그런 사람은 
"집안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1:10)고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시골에 있던 어떤 교인은 여호와의 증인이 왔는데 고생하신다고 하면서 차나 한 잔마시고 가라고 했다가 저한테 혼 난 일이 있습니다. 
경계하라는 말은 책망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형제가 죄를 범할 때 이를 묵과해 버린다면 그 형제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반복해서 죄를 범하게 될 것이고, 결국 실족하게 될 것. 

그러므로 죄를 범할 때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되게 회개하도록 책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깨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책망은 수술과 같아서 근본적으로 사람의 영적 생명을 살립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옳은 책망이라도 그 사람이 받아들이게 노력해야 합니다. 

☞ 형제가 책망을 듣고 회개하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는 무한정, 무조건 용서입니다. 

4절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이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도 행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하루에 단 한 번, 아니 1년에 한 번도 용서하기 힘듭니다. 
용서하는 척하며 이해하는 척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루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아침 8시에 내게 죄를 범하고 난 후 조금 있다가 이를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관대히 용서해 줍니다. 그런데 10시쯤 되어 또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또 회개했습니다. 두 번째는 그럴 수 있겠지 하고 용서해 줍니다. 그런데 점심때쯤 되어 또 죄를 범한 후 곧 회개했습니다. 그러면 삼 세 번이라는 생각으로 용서해 줍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염치없이 뻔뻔스럽게 용서해 달라고 하면 용서할 수 있겠냐?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반복해서 죄를 범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나쁘다는 판단이 앞섭니다. 이 인간은 더 이상 안되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마다 하루 일곱 번씩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용서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면 ①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많은 죄를 용서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용서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②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회개한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자를 내가 미워하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형제를 미워하거나 정죄할 권리를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 같이 허물이 많고 감정적이고 교만하고 속이 좁은 사람들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태산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께 간구 했습니다. 5절에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믿음을 더해 달라는 요구는 
적절한 요구였습니다. 다른 어떤 덕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라는 것을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 그 동안 제자들이 지켜 본 주님은 믿음이 있으셨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장례 치는 것을 보시고, "상여를 멈춰라."하시고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십니다. 자기에게 찾아오는 환자들을 다 돌보십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안수하시며 고치셨습니다. 영적으로 갈등하고 허덕이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에 찾아가셔서 "돌을 옮겨 놓으시오."하시고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소리를 치십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것은 깜짝 놀랄만한 일입니다. 
만일에 '나오라'고 했는데 안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망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주님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하소서. 주님이 가지신 그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믿음을 더 하소서' 이 말씀은 언뜻 듣기에는 지금 믿음이 있는데 더 믿음을 달라는 것처럼, 믿음을 좀 더 크게 해달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원문에 보면 이것은 양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질적인 것을 말합니다. 
있는 믿음을 더 키워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새로운 믿음, 새로운 종류의 믿음, 새로운 지혜의 믿음, 바로 주님의 그 믿음을 우리에게도 달라는 간구입니다. 

정말로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을 크게 마음먹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리라 결심하지만 막상 당사자의 얼굴을 보거나 목소리만 들어도 미운 감정이 솟구치지 않습니까? 
다 잊었다도 생각해도 가끔 생각하면 화가 나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치 절망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향해 부르짖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6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은 너희도 예수님처럼 원수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며 사는 일은 태산과 같은 큰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어도 능히 용서할 수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 복음서에서 겨자씨 한 알은 작은 것을 이야기 할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겨자씨가 얼마만한가 하면 연필을 종이에 꾹 눌렀을 때의 크기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은 작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믿음만 가지고 있어도 온전한 믿음이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니 제자들은 약간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만한 믿음이야 나도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용기가 생기시기를 바랍니다.
이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은 100% 의심 없이 믿는 순수한 믿음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히 믿고 순종하는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믿음은 

1. 자기를 바로 아는 믿음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국어를 배웠으면 주제파악을 잘 해야 하고, 산수를 배웠으면 분수를 알아야 되고, 지리를 배웠으면 위치를 잘 알아야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위치가 어디인지 자기 분수가 뭔지 자기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아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할 때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인정하시고 높여 쓰시는 줄로 믿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충성스러운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은 새벽부터 밭에 나가 하루종일 충성스럽게 밭을 갈고 양을 쳤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삼복 더위에 밭에 나가 뙤약볕에 일하고 오는 것과 같습니다. 
배가 고프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한편 주인은 에어컨을 틀어 놓고 냉커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형편이 이렇다면 주인이 수고한 종을 맞이하여 주고 상을 차려 대접해 주고 편히 쉬라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할 자가 누가 있겠냐고 하십니다. 도리어 주인은 종이 오자마자 숨돌릴 겨를도 없이 너는 물길어다가 저녁 식사를 차려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주인이 먹을 때에 같이 앉아 먹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다 잡수실 때까지 곁에 서서 시중 들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종의 위치였습니다. 

당시 종은 노예로서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 했습니다. 종은 하루종일 허리가 빠지도록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집에 와서 쉬고자 하지 않습니다. 또 죽도록 충성했다고 해서 주인에게 칭찬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교만해져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또 주인이 수고했다는 소리하지 않는다고 마음이 상해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종은 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합니다. 
종은 어디까지나 종입니다. 종이 변하여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종이란, 그 몸도, 재능도, 시간도, 생명까지도 주인에게 속했고,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은 자기를 절대 포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역사 합니다.

◈ 엘리사의 명을 들은 나아만에게 자기라는 교만이 살아있는 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나와서 자기 상처 위에 안수기도를 안 해준다고 노하고 있는 동안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기라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요단강에 몸을 담갔을 때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속에 아직도 포기되지 못한 자신 때문에 생명력 있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 자신을 절대로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내가 누구인지 / 나의 부족함은 무엇인지/ 를 바로 아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2.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종은 소극적으로는 자기를 절대 포기해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주인에게 절대 복종하여야 합니다. 
주님 말씀대로 절대 순종해야 믿음을 얻습니다. 그래야 믿음을 보게 됩니다. 믿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유명한 파스칼에게 그의 친구가 "나도 자네처럼 믿음을 갖고 싶네. 그래서 자네처럼 살고 싶네."라고 했습니다. 파스칼은 "여보게, 먼저 나처럼 살아야하네. 그러면 나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될 걸세."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출 3:10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로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 -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로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셔도 막무가내로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모세가 앞에 홍해가 막히고 뒤에 추격해오는 애굽 군을 보고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애굽기 14:13)" 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이런 믿음이 어떻게 생긴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던 중에 생긴 것입니다.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던지라 하셔서 던지니 뱀이 되었고, 다시 명에 따라 집으니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또 손을 품에 넣어라 하셔서 그리 했더니 문둥병자의 손이 되고 다시 명에 의해 품에 넣었다 꺼내니 깨끗해졌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모세는 놀라운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 기드온은 겨우 삼백명 밖에 되지 않는 용사를 거느리고 수만을 헤아리는 미디안의 군대와 맞서 싸워야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싸워보나마나 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과 삼백 용사가 이겼습니다. 실력이 뛰어나서 이기 것이 아닙니다. 
나팔이나 항아리와 횃불이나 함성 때문에 이긴 것도 아닙니다.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던 기드온의 생명력 있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 믿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본문 9~10 "명 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 지니라."
사례 받을 생각을 말라고 합니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믿음이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충성도 열심히 합니다. 헌신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언덕에서 넘어집니다. 그 마지막 언덕은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칭찬 받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믿음이 곤두박질 칩니다. 믿음이 땅에 떨어집니다. 낙심합니다. 심지어 섭섭하다고 드러내어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종이 하루종일 밖에서 일하고 돌아온 다음에 또 시중들어야 합니다. 그랬다고 사례받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을 뚝 떼어 버려야 믿음이 자랍니다. 
사람들은 몰라주어도 주님이 아시면 됩니다. 주님께 열심히 충성 봉사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재능도, 시간도, 생명까지도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과 같은 심정으로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괜찮습니다. 세상의 상급보다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시며 열심히 믿음의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에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참 믿음은 자기가 종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를 절대 포기하는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의 상급을 소망하는 믿음입니다. 
참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말씀을 온전히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의 눈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우리에게 주님의 믿음을 주옵소서.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소서
주님 믿음으로 사는 우리가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심인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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