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강림] 성령충만을 받자 (행 2:42-47)

첨부 1


성령충만을 받자 (행 2:42-47)

혹시 비빔밥을 좋아하십니까?
각종 나물과 밥을 고추장에 비벼 먹는 비빔밥은 불고기나 갈비만큼 이곳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한국 음식입니다.

그런데 이 비빔밥에 꼭 빠져서는 안 될 양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빔밥을 더욱 맛있게 하는 참기름입니다.

마켓에 가면 여러 종류의 참기름 브랜드가 있습니다.
왕 표다, 종가 집표다, 아씨 표다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브랜드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참기름을 선전할 때 쓰는 말이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순” 참기름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브랜드의 참기름은 그냥 참기름이 아니라 순수한 참깨만을 짜서 만든 참기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순 참기름”이라는 말은 순수하지 않은 참기름이 많이 있다는 말을 뜻하기도 합니다. 불순물이 첨가된 참기름이 많기에 자신들의 참기름은 “순수한 순 참기름”이라고 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침부터 고소한 참기름 이야기를 하느냐고요?
그것은 참기름도 순 참기름이 있는 것처럼 교회도 순수한 모델이 될 만한 원형적인 교회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순수한 모습의 모델이 될 만한 원형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2절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서 먼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즉, 그들의 신앙생활은 말씀을 배우는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말씀 배우는 일에 목말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건강한 현상입니다.

오늘날 성령을 체험하고도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배우지 않고, 말씀 없이 어떤 영적인 체험만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과 함께 하지 않는 이러한 성령 체험은 뿌리 없는 단순한 감정적 흥분 상태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고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이란 뿌리도 열매도 없는 그저 잎만 허수아비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언제나 말씀 묵상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든든한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이렇듯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을 체험한 뒤에 주님 앞에서 든든하게 서가기 위해서 사도들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들로부터 어떤 말씀을 배웠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그들이 배운 말씀 커리큘럼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도행전의 내용과 특별히 베드로와 스데반설교를 통해 미루어 볼 때 그들이 무엇을 배웠는지 어림짐작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구약 성경의 말씀을 배웠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구약 성경을 여러 번 인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그들은 자신의 설교에서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그리고 구약 성경과 성령의 사건을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들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모든 예언과 말씀을 체계 있게 배웠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배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가르쳤던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성령의 사건에 대해 분명하게 배웠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도들은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오순절에 임한 성령사건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수한 모델이 될 만한 원형적인 교회인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렇듯 말씀을 체계 있고 심도 있게 배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소망합니다.
여러분들 또한 그들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 있게 배우시길 소원합니다.
진리에 대한 강한 목마름으로 진리를 알아 자유하시길 소원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이단들이 와서 도전한다 할지라도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그 도전을 담대히 막아내고, 분명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시길 축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직 일대일 제자양육에 임하지 않으신 분들은 4주 과정을 마치시고 양육을 받으시는 주님의 은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순수한 모델이 될 만한 초대 교회는 말씀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성도 간에 서로 교제하는 것에도 힘을 썼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세워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제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세워 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삼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다 달랐을 것입니다. 
환경도, 배경도 달랐을 것이며, 배움의 정도나 빈부의 차이, 그리고 나이의 차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름다운 교제를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게 가능할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온전히 하나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소원합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능력으로 우리가 온전히 한 몸을 이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수한 모델이 되는 초대 교회는 말씀과 교제에 힘쓰면서 서로 떡을 떼었던 교회였습니다. 
즉, 그들은 영적인 일에만 너무 편중되어 집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먹는 일과 같은 물질적인 일은 완전히 없애고 오직 기도하고 말씀 듣는 일에만 열중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순수한 모델이 되는 초대 교회의 균형적인 모습을 잘 알지 못하는 주장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서로 물질적인 떡을 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초대 교회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께 떡 떼며 주님의 몸을 세워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먹는 것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하는 좋은 도구입니다.
이렇게 함께 먹음으로서 관계는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을 세우기 위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서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분명 교회의 아름다운 일면입니다.

여러분!
순모임을 하실 때 함께 무엇이든 나누어 드시기 바랍니다.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적으로 가볍게 나눌 수 있는 것으로 서로 나누어 드시면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시기 바랍니다. 순수한 모델이 되는 초대 교회는 말씀과 영적이고 육적인 교제에 힘을 쓰면서 동시에 기도에 전념했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성령의 교제를 나누고, 음식을 나눈 후, 그들은 언제나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개인적인 기도도 했겠지만 중보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같이 모여서 아픈 자들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 그리고 가르침을 주는 지도자들과 공동체와 나라와 민족과 세계 복음화를 위해 그들은 전심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들의 생명줄입니다. 
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쉬면 안 됩니다.
음식과 물을 먹지 않고는 우리의 몸이 생명을 이어나갈 수 없듯이 기도를 쉬면 우리의 영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를 놓지 않는 영적인 철인이 되 시길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고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서로 영적인 교제와 아울러 떡을 떼는 물질적인 교제와 함께 늘 기도에 힘썼던 초대 교회처럼 우리 교회와 우리 교회의 순모임이 순수한 교회의 모습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생활양식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넘어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43절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단순한 무서움이 아닌 경건을 내포한 경외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19절에 보면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두려워함은 단순한 무서움이 아니라, 신령한 두려움 즉, 경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두려움을 당시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모습을 보고 느꼈던 것입니다.

경외함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경외함은 내게 없는 어떤 것이 다른 사람에게 있기에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즉, 나하고 똑 같은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인데, 나하고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 그 사람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이 바로 경외함입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저렇게 살 수 있지?
어떻게 저 사람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매일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지?”

경외함을 느낄 때에 우리는 부러움과 도전과 신선한 충격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그 사람을 닮고 싶어 하고, 배우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 대해서 경외함을 느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보고 이 세상이 이와 같은 충격을 받고 있습니까? 
교회를 보고 세상이 이렇게 놀라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은 경외감을 일으키는 교회일 것이기에 우리는 스스로 자문을 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며, 가진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이자 교회의 일원이기에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마땅히 그런 경외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보여주는, 그래서 경외심을 유발하는 교회의 모습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초대 교회처럼 말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가난과 박해의 터프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일으킬 만한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록 우리의 삶이 복잡하고 힘들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던져 줍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은 16장 18절에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교회의 순수한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예언하시고 약속하신대로 베드로는 많은 난관과 시련을 뚫고 성령을 받아 수 천 명을 회개케 하는 대 사도로 쓰임을 받아 교회를 세우는 선두주자가 되었습니다.
즉, 베드로가 성령으로 인하여 일으킨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태어난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태어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말씀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의 교회는 먼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교회는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 수 있는 바로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의 교회의 성도들은 이 세상과 땅에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음부의 권세가 어쩔 수 없는 하늘에 속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 땅에 있지만 하늘과 교통하고 있고, 이 땅에 있지만 하늘의 능력, 하늘의 권세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교회가 드디어 이 땅 가운데 나타난 것이 사도행전 2장에 있는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두려워했을까요?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이길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존경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는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단 자기가 이길 수 없는 존재를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당황하고, 놀라면서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은 도무지 이길 수 없었던 이기심과 욕심을 초대 교회는 이겨낸 것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44-45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 속에 있는 이기심, 욕심은 원죄와 연결되어 있는 죄의 본성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뿌리가 깊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교묘하고 은밀하게 숨기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 하면서 무조건 몽땅 자기 손으로 움켜쥐려는 대놓고 이기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양보하는 척하면서도 뒤통수를 쳐서 실속을 모두 챙기는 교묘하고 교활하게 이기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겉으로는 착한 척하면서도 남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위장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정도만 다를 뿐이지 우리는 모두 자기만 아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들입니다.

실존주의 사회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현대 사회가 갈등과 혼란에 빠지는 이유를 모든 현대인들이 너무나 이기적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누구보다 나누어주며 이타적으로 살려고 애를 썼던 윌 하이트라는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고 두렵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견딜 수 없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갔다. 그러자 성령님께서 ‘네가 겪고 있는 심한 두려움은 너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의 증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이기심과 욕심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무지 이길 수 없는 본성적 죄성입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이기심과 욕심을 초대 교회는 넉넉히 이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기심은 극복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곳에 속한 사람들이기에 이기심을 이겼는가?”라고 질문하면서 초대 교회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초대 교회 사람들은 물건을 나누어 함께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이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성령의 임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은 나누어 쓰고 모든 재산을 함께 공유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초대 교회의 모습은 사도행전 4장32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자기 물건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교회의 역사상 지금까지 많은 단체에서 이런 공동체 생활을 꿈꾸어 실행해 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는 초대 교회의 이러한 모습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이 땅 가운데 살면서 이기심과 욕심을 이기는 일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일 일 것입니다. 아무리 실패했다 해도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초대교회의 능력 있고 아름다운 모습을 실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시도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제일 먼저 가정 공동체 속에서 이 이기심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이기심으로 인한 갈등, 부모 자식 간의 이기심으로 인한 갈등들이 사라지고 해소되어 작은 하나님 나라가 가정 안에서 실현되길 소원합니다.

그런데 이기심을 이기는 일은 성령이 함께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의 가정 안에 성령이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서 이기심 대신 서로에 대한 사랑과 섬김으로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모든 가정이 되 시길 축원합니다. 46-47절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세상 사람들은 이기심을 이긴 교회를 보고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해서 모이기를 힘쓰되,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던 교회를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강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저마다 타고난 죄 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은 언제나 죄가 만연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질투하고, 험담하고, 미워하고, 싸우는 모습을 우리는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모임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이러한 일반적인 모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즉, 그들의 모임은 일반적인 모임과는 달리 매일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들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의 섬김과 교제로 넘쳐나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스터리였습니다.
이 얼마나 강력한 도전입니까? 그러므로 저는 소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이 초대 교회와 같은 모습이길 소원합니다.

초대 교회의 모습과 같이 우리 교회가 이기심을 이기고, 항상 모이기를 힘쓰되 언제나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배우고 닮고 싶어서 하나둘 제 발로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길 축원합니다. 아멘!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교회의 순수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성령을 받아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히며, 영적인 교제와 물질적인 교제를 나누며, 언제나 기도에 전념했던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졌습니까?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두려운 경외감을 일으키는 모습으로 비쳐졌습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가 왜 그런 경외감을 일으켰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이기심과 욕심을 이겨내어 서로 나누고 공유하며 지냈으며, 세상 사람들의 모임과는 달리 모이면 언제나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과 섬김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능력 있는 모습의 초대교회가 있게 된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던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으로 인하여 초대 교회는 순수한 모델이 되는 교회의 모습으로 오늘 날의 교회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동일한 성령님으로 인하여 우리 교회는 초대 교회와 같은 능력있고 아름다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무엇 보다 성령 충만함을 구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교회와 가정, 그리고 내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 있고 아름다운 성전이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지금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오늘도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고,교회와 가정과 성도님들 각각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경험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