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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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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 1:24)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3년간 에베소에서 선교하는 어간에 세워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우지는 않았고, 에바브라의 전도사역에 의하여 세워졌을 것입니다(골 1:7~8, 4:12~13). 에바브라는 골로새 출신으로(골 1:7) 라오디게아나 히에라볼리에도 복음을 증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골 4:13). 바울은 이러한 에바브라를 늘 높이 평가하고,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칭찬하면서(골 1:7),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명예로운 영예를 부여할 정도였습니다(골 4:12). 
그러한 골로새 교회에 이단이 들어와 이신득구의 진리를 흐리게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단 사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골로새서에 나타난 몇 가지 기록들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① 유대교의 의식주의일 수도 있었습니다. 할례(골 2:11, 3:11), 음식에 관한 규례나 절기(골 2:16~17) 등일 수가 있습니다. ② 거짓 철학이었습니다. 이른바 자신들의 경험(골 2:18)과 사람의 유전(골 2:8)에 근거한 영지주의(Gnostics) 사상일 수도 있습니다. ③ 금욕주의(Asceticism)였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엄격한 육체의 규율을 가하여 육체의 욕망을 억누르게 하는 사상일 수도 있습니다. ④ 아니면 천사숭배 사상일 수도 있습니다. 천사숭배 사상은 유대교 일파인 쿰란(Qumran) 공동체의 영향을 받은 종파의 사상으로 사람들은 현세에서 천사들과 연합하여 교제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천사가 중보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예수 중보는 필요 없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이러한 골로새 교회에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고 중보자이며,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의 구세주임을 밝히 드러내고자 함이 영감의 골로새서 기록의 목적이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교회적 선교사명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을 의미함인가?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속죄적 고난이 불충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남은 고난은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서 보충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카톨릭의 ‘은공의 저장’이란 교리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천부당만부당한 해석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은 죄인을 위한 예수의 속죄적 고난을 가리킴이 아닙니다. 죄인을 향한 예수의 속죄적 고난은 이미 예수 자신께서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그가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속죄성취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을 가리킵니다. 교회를 위한 고난이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는 수고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수반되는 온갖 고난을 의미합니다. 

Ⅱ.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함에서 일어납니다.

본문 골로새서 1장 24절은 다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1장 16절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1장 17절에 말하기를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1장 18절은 ‘교회의 머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1장 19절과 2장 9절에는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을 그 몸에 지니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1장 20~22절에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시는 ‘유일한 중보자’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에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였습니다. 23절에는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5장 30절에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는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교회’ 그 자체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화신(化身)입니다. 부활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오늘 지상에 자기의 화신으로 나타낸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우신 교회입니다. 교회의 교회된 영적인 본질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가 교회의 머리요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몸에 붙어있는 지체라고 하였습니다.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머리요 몸인 예수에게 연합한 무리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하러 모이는 장소와 건물은 교회 자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당, 교회당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가시적 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예배당, 교회당은 이 세상과 구별됩니다. 그 이유는, 이 집은 그리스도를 머리와 몸으로 하는 그에게 연합되어 있고, 거룩한 무리들(성도)이 모이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며 고난을 당한다 함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영광이 됩니다. 그리스도인 된 자가 교회를 떠날 수 없음이 바로 머리와 몸에 붙어있는 지체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적 관계입니다. 교회의 교회된 정체는 바로 그리스도 자신의 화신이라는 사실입니다.

Ⅲ.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우리의 육체에 채워져야 합니다. 

다시 우리 본문 골로새서 1장 24절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곧 우주적 복음전도사역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한 사실입니다. 여기 ‘채운다’는 말은 ‘꽉꽉 채움’, ‘가득히 채움’, ‘빈틈이 없이 채움’, ‘넘치도록 채움’, ‘모자람이 없이 채움’을 가리킵니다. 다른 말로 ‘충만’을 뜻합니다. 

(1) 이것은 시간적 충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출생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이 주께 받은 시간 전부를 뜻합니다. 전 존재적 시간이 그리스도의 복음증거를 위하여 전용됨을 뜻합니다. 

(2) 내용적 충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서 얼마를 살 것인가 하는 유한의 시간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생존의 시간 안에 우리 삶의 내용도 받았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식으로, 여러 활동 무대에서 여러 유의 각이한 달란트(재능)를 받아서 살아갑니다. 혹자는 농부로, 혹자는 어부와 광부로, 혹자는 교육가로, 혹자는 정치가로, 혹자는 사업가로, 혹자는 문화예술가로, 아니면 다양한 삶의 활동들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모든 생존의 내용들, 삶의 내용들은 교회를 섬기는 수단으로 꽉 차버려야 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됩니다. 

(3) 목적적 충만입니다.
바로 바울의 영감이 이 위대한 사실을 어느 곳에서든지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6절에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7~8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부분이 아닌 전부를 말합니다. 시작과 진행과 마침 전부를 뜻합니다. 나의 나된 전 존재적 삶이 교회를 위한 삶으로 가득 채워져 버림을 가리킵니다. 바로 교회 충만의 삶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고 하였습니다(골 1:7). 바울 자신은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골 1:23).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골 1:25). 
그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가리켜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골 1:26). 또 ‘비밀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골 1:27).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그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들에게만 나타나고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골 1:26). 
  
그래서 사도는 그 구원의 예수를 ① 전하고 ② 각 사람에게 권하고 ③ 가르쳐서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구원인으로 세우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골 1:28). 
이 일을 위해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하였습니다(골 1:29). 전력투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가리켜 그 수고, 그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몫에 태인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체험적 삶을 가리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또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몸에 충만하게 하는 충성과 봉사의 기회로 선용해야 합니다. 여름어린이성경학교와 S.F.C. 모임들, 청년회 모임들, 각 기관과 구역의 모임들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곧 복음전파운동을 내 몸에 채우는 축복의 여름 행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구령운동, 개척교회운동, 신학교운동, 세계선교운동, 학원복음화운동, 기독교복지운동 그리고 기독교 문화매체운동, 헌당운동 등은 우리 경향이 받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이 모든 것들로 내 육체를 충만케 해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세계화운동입니다. 이 예수세계화운동이 바로 우리 경향인이 짊어진 십자가입니다. 
  
교회는 존재하는 역사세계 가운데 그 구심력입니다. 지구가 공간을 주기적으로 자전하는 데는 그 구심력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계역사가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진행되는 세계역사의 중심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운동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역사는 구속사입니다. 그 구속사를 전개하는 위대한 현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지구촌의 역사를 가능케 하는 동인(動因)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전투하는 선교 단체로서 교회가 그 사명을 다하는 날에는, 역사와 지구의 종말이 오기 때문입니다. 
  
14만 4천인이라고 하는 택자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은 교회운동을 진행시키고 계십니다. 유대인의 충만한 수(롬 11:12) +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 11:25) = 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롬 11:26) = 14만 4천(계 7:4, 14:1) =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계 7:9)의 수로 채우기 위하여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볼 때 교회야말로 역사중의 역사요, 역사의 알맹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요, 삶의 총체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생명이 나옵니다. 자기희생을 통하여 영광의 결실이 옵니다. 이것은 자연계나 영계에 공통된 천정의 법칙입니다. 바로 구원의 법칙, 생명의 법칙, 곧 십자가의 법칙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진 본질적 의미와 내용이요, 사명이요, 목적이요, 의무요, 특권이요, 영예요, 영원한 기업이 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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