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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복된 백성들 (느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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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복된 백성들 (느 11:1-6)

느헤미야 11장은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서 거주할 사람들을 선정하는 과정과 성안에서 살아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참으로 화려했던 도시로 다윗을 거쳐 솔로몬에 이르러서는 세계 전무후무한 문화와 문명을 자랑했고, 뛰어난 건축술과 예술성을 자랑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예루살렘 도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가장 영광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거주하기를 원했던 성이 바로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영광과 영화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한 후부터 폐허가 되어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70년간의 포로생활과 이후 느헤미야가 와서 성벽을 재건할 때까지 140년간이나 폐허가 된 채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흩어졌고, 텅 빈 예루살렘에는 풀과 무너진 벽돌, 옛날 화려했던 잔해들만 나뒹구는 참혹한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 도성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기할 수 없는 거룩한 도성입니다. 왜냐하면 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기로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제사장의 나라요, 왕 같은 족속으로 삼겠다고 하셨으며, 메시아를 보내어 전 세계를 통치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느헤미야를 통해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지만, 당시 백성들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기를 꺼려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성벽이 완성되기는 했어도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살던 이방민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주 공격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예루살렘 도성이 1차 공격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적의 공격 위험이 남아 있는 곳에 살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을 회복시켜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인구 유입정책을 쓰게 됩니다. 본문 1절에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당시 지도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예루살렘 도성에 거주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옛날 중국 원나라의 탕왕이 다스릴 때 이야기입니다. 황제가 되고 난후 7년간 가뭄이 계속되자 한 노대신이 말하기를 “황제님, 이번 흉년을 끝내려면 사람을 잡아 제물로 드려야 됩니다.”고 했습니다. 그때 탕왕이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백성을 잡아 제물로 드리겠느나? 내가 제물이 되겠다.” 

그리고는 곧 탕왕은 목욕재개하고 흰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들에 나가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신이여! 제가 정치를 못하고 백성을 잘 돌보지 못해 이런 가뭄이 생겼습니까? 지금 뇌물과 참소가 성행해서 의인이 고통을 당해 이런 어려움이 생겼습니까? 이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제물로 받으시고 이 백성을 구해주소서!” 그런데 바로 그때 비가 내려 수천리 땅을 적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당시 백성의 지도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예루살렘 도성에 거주했다는 것은 놀라운 헌신과 희생의 모습입니다. 백성의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훌륭한 배경이 뒷받침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학식도 높고, 재력도 있고, 실력도 좋고, 덕망도 있고, 지도력도 훌륭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솔직히 이러한 위치에 있다면 좀 더 편안한 생활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군림하지 않고, 참된 헌신의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삶의 모든 편리를 포기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헌신이라고 합니다. 헌신이란 주님을 위해 내 삶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히 11: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신분과 명예와 권력과 미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주님께 헌신하기로 자원합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훌륭한 학문과 화려한 배경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 같이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주님만을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회복은 바로 이러한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지도자들이 앞서 헌신하는 교회가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희생적이고 헌신된 지도자들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 부흥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 먼저 나서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계속해서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제비 뽑아 백성들의 십분의 일을 예루살렘으로 이주시켰고, 나머지 십분의 구는 자기 원래 성읍에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선택할 때 행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특히 사람의 뜻으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택할 때 제비를 뽑았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땅을 분배할 때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하였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할 때도 사울을 제비뽑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풍랑의 원인 제공자를 찾기 위하여 제비를 뽑아 요나를 바다에 던져 풍랑을 멎게 하였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죄책감으로 자살한 가롯 유다를 대신하여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택하였습니다. 결국 제비뽑는 것은 사람이 후보자를 세웠지만 선택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백성들의 십분의 일을 제비뽑았다는 것은 교회에서 일할 일꾼을 뽑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면 더 많은 시간을 내야하고, 봉사도 남들보다 더 많이 해야 하고, 헌금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가는 오해를 많이 받고 비난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더욱이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면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교육도 포기해야 하고, 안락한 가정의 삶도 포기해야 합니다. 직장도 포기해야 합니다.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하는 순간 포기할 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이 직분을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여러분,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특별히 선택해 뽑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교회직은 명예직이 아닙니다.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 목사가 되는 항존직은 계급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직책을 맡은 것은 고생하는 것이요,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광 받고 박수 받기 위해 제직이 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좀 더 높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 항존직이 된 것도 아닙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교회직분을 맡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황폐한 예루살렘 성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성안에 들어가서 내가 먼저 청소하고, 내가 먼저 가서 집을 회복하고, 내가 먼저 가서 하나님의 집을 섬기겠다는 열정에 불타는 사명감으로 직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비뽑기로 뽑힌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억지로 예루살렘에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살게 되었지만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 성에 살게 되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비록 당장은 힘들고 어려워서 불평이 터져 나온다고 해도 언제인가는 그 예루살렘 때문에 영광과 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지금 당장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늘의 축복을 기대하며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힘써 헌신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도성에 거주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2절에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예루살렘 도성에 거주하기를 자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당시 예루살렘 도성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사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나게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도성을 회복하고, 우리 민족의 부흥을 위한 길이라면 고통도 마다하지 않고 감당하겠다고 자원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훌륭한 신앙의 모델이 됩니다. 교회는 이런 자발적인 헌신자로 인하여 성장합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일을 할 때 물론 선택을 받아 하기도 하지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성도들이 많아야 합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과 교회를 위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심령들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자원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꾼들이 많음을 감사드립니다. 각 분야에서 말없이 헌신하고 충성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교회가 사명을 잘 감당하는 줄 확신합니다.

솔직히 교회 일을 해보면 어느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오히려 조금만 실수하거나 잘못하면 비난을 받고 욕을 먹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정말 후회스러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도 예루살렘 도성에 거주하기를 자원한 사람들처럼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알렉산더 더프 박사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오랫동안 인도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늙고 나이 많아서 고향에 묻히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환영하는 식장에서 그는 인도에 선교사를 보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림 더프 박사는 단상에 서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지원병을 모집할 때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지원했는데, 우리 주님이 선교사를 보내고자 하는데 한 사람의 지원자도 없다니 정말 섭섭한 일입니다. 나는 내 고향 스코틀랜드에 뼈를 묻으러 왔지만, 다시 인도로 돌아가서 저들의 영혼을 위하여 선교하다가 갠지스 강변에 내 뼈를 묻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축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길이 축복된 길입니까? 그 길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 길을 보여주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축복된 길은 아는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축복된 길은 대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탐내는 길은 대개 저주와 심판의 길입니다. 

우리는 좁은 길, 좁은 문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남이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을 자원해서 가는 자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며, 십자가를 지면 잠시 어려움이 있어도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경남 거창에 가면 거창 중·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지방 학교로서 인재를 많이 배출한 학교입니다. 어떻게 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는가 했더니 그 학교 교장이었던 전영창 선생이 그 학교 교정 돌판에 새긴 ‘직업 선택의 십계’가 그 해답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말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전영창 교장은 “불편하게 살아라, 왕관이 있는 곳으로 가지 말고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가라, 네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지 말고 너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고 희생을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교회 역사는 언제나 자원하여 헌신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열리곤 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자원하여 헌신하는 일꾼이 많이 일어날수록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자원하는 자들, 안락함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무너진 조국을 위하여 자기 삶을 던지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있었기에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울 수 있었고, 후손들에게 신앙의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줄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 역사는 새롭게 기록될 수 있었노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자신이 교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무엇을 얻어 누리려는 성도가 되지 말고, 교회를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힘이 부족해도 내가 가진 작은 것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들 중에는 느헤미야와 같이 하나님의 성을 쌓는데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예루살렘성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하나님의 성을 위하여, 그리고 예루살렘성 안에서 사는 데에 인생을 걸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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