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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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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4)

애통하는 인생들

사람은 태어나면서 즉시 울기 시작합니다. 갓난아기의 울음은 유일한 언어입니다. 배고프면 웁니다. 오줌을 싸도 웁니다. 몸이 불편하면 웁니다. 뭔가 요구 사항이 있으면 울면 됩니다. 어린 아기의 울음은 무엇을 요구한다는 표시일 뿐 그 이상의 깊은 뜻은 없습니다. 

갓난아기는 생후 3개월이 지나면서 눈물샘이 열립니다. 눈물은 하루 1ml에서 1.2ml씩 나옵니다. 눈물은 병균을 막아주고 먼지를 씻어냅니다. 눈물의 분량으로 보면 노인보다 젊은이에게 많고, 남자가 여자보다 많습니다. 큰 슬픔을 당하면 눈물이 정신없이 나옵니다. 학자들도 그 까닭을 잘 알지 못합니다.  
  
눈물과 울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 슬픔의 동기는 다 다릅니다. 왜 슬퍼할까?  슬픔의 동기는 대개 주변의 일과 자신과의 마찰에서 옵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 가까운 사람과 이별할 때, 병들거나 뜻하지 않은 시련이 올 때, 실패와 좌절 앞에서 웁니다. 불만이 누적되거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절망감 속에서 웁니다.  
  
애통 자체는 별로 좋은 일은 아닙니다. 애통하면서 좋아하는 사람, 애통하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 애통하면서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울지 않는 인생이 행복합니다.  


복 있는 애통

그런데 복이 있는 애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 슬퍼하면 복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애통(penqou'nte")이란 보통의 울음이 아닙니다. 초상집에서 우는 것처럼 슬프게 우는 울음입니다.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애통하면 복이 될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허물을 탄식하고, 자신의 죄를 통탄하는 슬픔입니다. 즉, 회개의 슬픔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통탄하고 크게 울어야 될 것은 바로 죄악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바로 죄에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삶을 병들게 합니다. 함정과 올무에 걸리게 합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립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불안에 빠뜨립니다.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아갑니다. 죄야말로 인생에 가장 무서운 원수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죄는 손님으로 들어오고, 그런 다음에는 죄는 친구가 되어 당신과 서로 알게 되고, 당신과 서로 좋아하게 된다. 죄는 당신을 섬기고 당신에게 기쁨을 약속한다. 그러나 죄는 종에서 주인이 되고, 그 주인은 폭군이 되며, 그리고 그 폭군은 파괴자가 된다. 죄는 언제나 자유로 시작하여 파괴와 노예로 끝낸다.” 

하루살이는 범이 무서운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짧은 날을 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의미를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범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얼마나 오래 사는지? 영생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죄를 우습게 여깁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통탄하고 크게 울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간 훌륭한 성도들은 다 죄에 대해서 크게 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가장 크게 운 사람입니다. 그는 충성스런 신하의 아내를 가로챘습니다. 그것도 아주 사악하게! 그 신하를 전쟁터에 맨 앞에 세워서 전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고 선지자를 보내셔서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즉시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물론 왕권을 앞세워 강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를 선택했습니다. 

시편 51편은 그 때에 회개하며 지은 시입니다. 그는 요란하게 자신의 회개를 선전하지 않았습니다.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슬퍼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51:14-17) 

베드로 사도 역시 크게 운 사람입니다. 그는 한 때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닭 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목 놓아 울었습니다. “내가 주를 부인했도다! 내가 감히 주를 부인했도다!” 크게 울었습니다. 

어떤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백성을 속이고 늑탈하여 재산을 모은 부정한 관리였습니다. 그렇다고 누가 재산 내놓으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는 성전 문을 들어서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내가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께 복을 구한단 말인가?” 그는 감히 앞자리로 가지 못하고 뒷전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이 세리의 기도를 받아주셨습니다.  
  
회개의 울음은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회개의 울음이 없습니다. 애통을 거부합니다. 애통하기보다는 오히려 하찮은 웃음을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비참한 눈물로 끝납니다.  
  
섹스피어의 비극 중에 리어왕이 있습니다. 리어왕은 브리튼의 왕입니다. 그에게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고네릴인데 올바니 공과 결혼했습니다. 둘째는 리이간인데 코온윌 공과 결혼했습니다. 셋째는 코델리아인데 미혼입니다. 리어왕은 80세가 넘어 왕국을 상속시키고자 했습니다. 세 딸을 불러 사랑을 시험했습니다. 누가 더 아버지를 사랑하는가? 그 분량에 따라 영토를 주려고 했습니다. 첫째가 말합니다. “나는 내 목숨보다도 더 아버지를 사랑해요!” 왕은 기뻐하면서 나라의 3분의 1을 줬습니다. 둘째도 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비하면 다른 사람의 사랑은 죽음과도 같아요” 

왕은 역시 기뻐하면서 나라의 3분의 1을 줬습니다. 셋째가 말합니다. “나는 다만 딸로서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왕은 매우 서운해 하면서 다시 말해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길러주시고 사랑해주셨으니, 저도 그와 맞먹을 만큼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복종하고 사랑하며 누구보다도 존경합니다. 하지만 언니들처럼 이 세상에서 아버지만 사랑한다고 큰소리치지는 않겠습니다. 만약 언니들이 아버지만 사랑한다면 시집은 왜 갔겠습니까? 제가 결혼을 하게 되면 제 남편은 반드시 제 애정의 반을 요구하겠지요. 만약 아버지만을 사랑하려면 언니들처럼 결혼은 할 수 없을 겁니다.” 

왕은 노발대발 했습니다. 나머지 왕국도 첫째와 둘째에게 나눠주고 셋째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첫째와 살다가 푸대접 받고, 둘째에게 갔다가 거기서도 푸대접 받고, 마침내는 쫓겨나 거지 신세가 되고, 정신이상이 되어 죽고 맙니다. 

첫째와 둘째는 동시에 한 남자를 사랑하다가 언니가 동생을 독살합니다. 언니 역시 옥살이를 하다가 목숨을 끊습니다. 잠깐의 웃음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 이렇습니다.
  
솔로몬은 웃지 말고 울라고 합니다. 진정 울 줄 아는 사람이 마침내 웃는 사람이 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전 7:2-6) 지혜로운 여인은 오늘의 웃음보다는 후일에 웃는 길을 택합니다.(잠31:25)  
  
오늘 내 자신을 돌아보세요. 일부러 자신의 죄를 외면하고 웃으려 하지는 않나요? 자신의 죄를 돌아보며 크게 울어보세요.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정도로 크게 울어 보세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잘나서 산 줄 알고, 하나님 은혜를 망각한 것을 애통해야 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해서 저지른 거짓과 불의를 슬퍼해야 합니다. 나 하나 안녕을 위해 타인의 범죄를 수수방관한 것을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역사 앞에 저지른 범죄를 적당히 얼버무려 넘기려는 자신을 통탄해야 합니다. 눈곱만한 선행 하나로 태양빛 같은 하나님의 의를 업신여긴 죄를 통회해야 합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울어라! 크게 울어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 4:9)   


애통은 인생의 중요한 삶의 과정

애통은 한 순간의 슬픔이나 후회가 아닙니다. 삶의 중요한 과정(process)입니다. 팔복의 내용들을 보세요. 심령 가난, 애통,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하는 일,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것. 어느 하나도 한 순간의 통과의례가 아닙니다. 마음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야 되는 과정입니다. 마치 곤충의 탈피와 같은 과정입니다. 곤충들은 애벌레에서 성충이 될 때에 껍질을 벗습니다. 매미나 잠자리를 보세요. 땅속이나 물에서 나와 풀이나 나무에 매달려 온 몸이 마르기를 기다립니다. 등이 갈라지고 껍질이 벗겨지기까지 아주 힘든 과정을 겪습니다. 자칫하면 천적에게 잡혀 먹힐 수도 있습니다. 탈피의 순간에 재빨리 날아올라야만 합니다. 위험과 고통의 시간이지만 이 시간을 겪어야만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잠자리, 여름을 시원하게 하는 매미 소리는 다 이런 힘든 탈피를 통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애통의 과정을 통과해야 복된 결과를 얻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과만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 천당”이 전부가 아닙니다. 천당에 이르기 위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과정을 일평생 거치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기독교는 결과만의 종교가 아닙니다. 과정의 종교입니다. 삶의 사소한 부분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아픔의 과정 없이 기쁨을 얻으려 합니다. 과정 없이 얻는 기쁨!  얼마나 솔깃합니까?    
  
어제 류현진 선수가 7승을 달성했습니다. 샌프란시코 자이언츠를 10대 2로 이겼습니다. 6과 3분의 2 이닝동안 4 피안타 3 탈삼진 볼넷 4개 2 자책점으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총 107개의 공을 던져서 65개의 스트라이크를 잡았습니다. 6월 한 달 내내 quality start(6이닝 3자책점 이내)를 하고도 한 게임도 이기지 못하다가 결국은 승리를 따냈습니다. 이런 결과를 그냥 뉴스를 보고 알면 별로 짜릿함이 없습니다. 시종 그 경기를 지켜봐야만 그런 기쁨을 얻습니다. 

저는 류현진 선수의 경기를 9회 끝날 때 봤습니다. 인터넷으로 간간이 보다가 이길 것 같으면 마무리 부분을 봅니다. 야구는 경기 시간이 워낙 길어서 다 보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그것이 제가 끝 부분만 보는 이유는 아닙니다. 경기를 지켜보면서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이 마음에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냥 쭉 이기든지, 아니면 확 지든지 하면 일찍 마음을 정하는데, 이길 것 같다가 지면 가슴이 철렁 합니다. 모든 운동 경기가 그렇지만 이길 때의 기분은 짜릿합니다. 모든 스트레스가 확 날아갑니다. 그런 기분을 맛보려고 열심히 경기를 지켜보는 겁니다. 저처럼 다 이길 때쯤 바라보는 것은 짜릿한 감동이 없습니다. 과정을 지켜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정 없는 기쁨은 신통치 않습니다. 힘들어도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을 지켜봐야 제대로 된 기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과정 없는 기쁨, 과정 없는 위로는 큰 감동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과 위로를 얻는 심령의 법칙입니다.  
  
애통과 눈물이 없으면 위로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의 정신병이 뭔지 아세요? 애통이 없는 겁니다. 눈물을 지불하지 않고 기쁨을 얻으려 하니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앓고 있는 우울증 증세가 뭡니까? 울지 않는 겁니다. 눈물의 정서가 없습니다. 그냥 싫고, 그냥 배타적일 뿐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해산의 고통을 싫어하고 기르는 아픔을 싫어합니다.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기쁨을 얻을 리 만무하고, 위로 받을 곳이 없고, 안정된 삶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진정한 아픔을 겪지 않은 위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위로가 있다

애통하는 자가 받을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죄를 슬퍼하는 자를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죄에 대한 애통은 영혼의 위로를 가져옵니다. “위로”(parakalevw, 파라칼레오)란 말은 곁으로 부른다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파라클레토스(paravklhto", 위로자)는 그리스도의 별명이며(눅2:25), 동시에 성령님의 별명입니다.(요14:16)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부르시기 때문에 얻는 위로입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하는 위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얻는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안심이 되는 위로입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해결된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위로는 약간의 위로는 될 수 있어도 안심할 정도의 위로는 못 됩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욥이 재앙을 당했을 때 세 친구가 위로 차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비참한 욥의 모습을 보고 며칠 동안 말도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한 말이 욥을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았는가? 욥은 이런 친구들을 “번뇌하게 하는 위로자”(욥16:2)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불안은 문제에서 오는 것이고, 그 문제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되고 따라서 문제가 해결되고 마음의 평안이 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healing이요 치유입니다. 

요즘 healing이 유행입니다. 본래 힐링은 예수님만이 주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마4:23,9:35) 첫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셋째는 모든 병을 고치는 일입니다. 육신의 병도 고치셨지만 주님은 마음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육신의 병은 마음의 병을 고칠 때 따라옵니다.

예수님이 중풍 병자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작은 자여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 만병의 근원은 영혼의 병에 있습니다. 영혼의 병은 회개로써 치유됩니다. 주님을 믿고 회개할 때에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병을 고침 받습니다. 오늘 바로 이런 치유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3-16)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1-3)  

오늘 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심령의 위로를 받으세요. 애통은 전 생애를 통해서 항상 이루어야 될 과정입니다. 반드시 거쳐야만 결과물이 나옵니다. 애통하는 것을 피하지 마세요. 죄에 대해서 기꺼이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세요. 회개 하세요.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이 곁에서 위로하시는 짜릿한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전 생애를 통해서 이런 삶의 과정이 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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