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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약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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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약 4:7-12)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여,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은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리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자기 형제자매를 헐뜯거나 심판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율법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율법을 심판하면, 그대는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심판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 교만이라는 병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말복이 지나면서 아침 저녁 바람의 결이 바뀌었습니다. 처서處暑가 멀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절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도 하늘의 기미는 알아채지 못하는 우리의 둔감함이 떠올랐습니다. 신앙생활은 ‘탈향脫向’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탈’은 옛 삶으로부터의 벗어남이고 ‘향'은 새로운 삶을 향한 견고한 지향입니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고, 제국의 논리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라는 소명 앞에 서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을 가늠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부사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는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의 원인이나 근거가 될 때 쓰여 앞 뒤 문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라"는 권고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다"(6)는 말씀에 근거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악마를 물리치는 것은 사실 하나의 과정입니다. 악마는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도록/못하도록 만드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야고보는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의 사전적 정의는 ‘잘난 체하여 뽐내고 버릇이 없음’이지만 교만의 뿌리는 훨씬 깊습니다. 7세기 시나이의 수도자인 요한 클리마쿠스는 교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악마의 발명품이며 인간에 대한 경멸이다. 그것은 비난의 어머니이고 칭찬의 자식이고 불모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고 광기의 선구자이며 몰락의 창조자이다. 마귀에 들리는 원인이고 분노의 원천이며 위선으로 가는 통로이다. 그것은 악마의 요새, 죄의 후견인, 냉혹함의 근원이다. 연민의 부정이요, 지독한 위선자요, 무자비한 심판관이다. 교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신성을 모독하는 뿌리이다."(캐틀린 노리스, <수도원산책>, 129-130쪽에서 재인용)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교만은 ‘비난의 어머니’, ‘칭찬의 자식’, ‘불모의 상징’,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부터의 달아남’, ‘분노의 원천’, ‘위선으로 가는 통로’, ‘연민의 부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을 무겁게 만드는 많은 것이 여기에 걸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만은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 정작 자신은 알지 못하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교만한 영혼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곳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의 가슴에 지우기 힘든 상처를 입힙니다.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교만의 병에 걸린 경우를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옳음을 확신하기에 다른 이들에 대해 늘 심판자의 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가련한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진짜 신앙에 깊이 들어간 이들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억압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판단과 정죄의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을 뿐더러, 행동도 자연스럽습니다. 아씨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기념 예배당에는 지오토(Giotto di Bondone, 1266-1337)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그중에서 인상 깊은 것은 새들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의 모습입니다. 새들이 그에게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서 어떤 경계심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자기를 온전히 여읜 사람이야말로 겸손한 사람, 평화의 사람입니다.

•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말라

교만의 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은 자신이 교만이라는 병에 걸려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기가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치유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밖으로 향하고 있는 시선을 거두어 들여 자기 자신을 자꾸 성찰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빛을 비춰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참상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런 참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훈련 말입니다. 하나님은 ‘힘, 독점의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를 ‘섬김, 돌봄, 나눔, 존중, 상생’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그것은 저절로 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거스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려는 의도적인 노력과 훈련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순례자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주님의 DNA가 우리와 다르다는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해 온전히 당신의 뜻을 내려놓으셨다는 말입니다. 가끔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그 분의 뜻을 따르는 게 믿음입니다. 그것이 설사 십자가의 고난이라 해도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4:27) 하고 권고했습니다. 악마는 틈을 벌리는 자입니다.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악마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악마는 언제나 그럴 듯한 명분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너만 손해 볼 게 뭐냐?’, ‘그런다고 세상이 알아주냐?’, ‘그가 너를 무시하고 있잖아?’ 악마는 언제나 내편인 것처럼 가장하고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 우리와 이웃 사이에 자그마한 틈을 만들고, 그 틈에 쐐기를 박아 넣어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악마는 마치 먼지가 쌓이듯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삶에 틈입합니다. 살면서 제일 괴로운 일은 가깝던 이들이 점점 멀게 느껴질 때입니다. 사소한 일 때문에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고, 마주하기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악마는 우리가 해가 질 때까지 형제자매에 대해 노여움을 품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그의 꾐에 넘어가 마음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릴 때마다 악마는 저 모퉁이 어디에선가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바라봅니다.

악마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면 자꾸만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자꾸만 하나님의 마음에 비끌어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순례자라는 사실을 시시때때로 상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차례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를 올립니다. 어디든 그들이 기도 매트를 깔아놓으면 그곳은 신전이 됩니다. 

여러 해 전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오릅니다. 때는 2월 중순 경이었고 진눈깨비가 내리고 바람도 세차게 불어 매우 추운 날이었습니다. 차가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저는 낯선 광경을 보았습니다. 커다란 모스크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미처 실내로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마당에까지 엎드려 진눈깨비쯤은 아랑곳하지도 않으며 기도를 바치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다른 종교였지만 저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일상의 흐름을 끊고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을 새롭게 바꿔주시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신앙은 그리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워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그리워하십니다. 아니, 어쩌면 그 순서가 거꾸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이들을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그 영을 질투하실 정도로 그리워하신다’라는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헛된 것으로 생각합니까?"(4:5)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당신의 영을 그리워하신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외롭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은 시간을 들여 자주 만나는 존재를 닮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순결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흡수통일 되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러면 악마는 우리에게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 야곱의 씨름

그런데 우리는 9절에 이르러 잠시 당황하게 됩니다. 야고보의 권고가 낯설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괴로워하십시오. 슬퍼하십시오.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9)

정확히 우리가 지향하는 바의 반대입니다. 괴로움, 슬픔, 울음, 근심은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삶에서 지우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것을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우울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늘 이마를 으등그린 채, 눈가가 짓무른 채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삶을 축제로 바꾸어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이 말을 조금 달리 이해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괴로움, 슬픔, 울음, 근심은 부정적인 것이라 간주하여 재빨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기쁨과 웃음의 세계로 귀의하고 싶어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 찾아오는 불청객과도 같은 그런 낯선 경험들은 우리를 성숙의 길로 인도하는 길 안내자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내면에 숨겨진 어둠과 죄성, 그리고 살면서 마주치는 고통과 정직하게 대면할 때 우리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영혼의 ‘어둔 밤’을 거치지 않고는 영적인 성장은 불가능한 법입니다. 우리는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을 벌였던 야곱 이야기를 잘 압니다. 어둔 밤에 등장한 그 낯선 존재는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원치 않는 상황 혹은 예기치 않은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야곱은 그 문제와 맞붙어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탈골되는 부상을 입습니다. 우리도 느닷없이 우리를 덮친 문제와 씨름하다가 내상을 입곤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자기를 놓아달라고 하는 그 낯선 존재에게 자기를 축복하지 않으면 놓아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그런 시련을 오히려 영적 도약의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그 밤에 야곱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남의 발뒤꿈치나 잡던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비로소 자기가 겪어왔던 삶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해가 떠오를 때 야곱은 다리를 절며 걸어야 했지만, 그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독과 고통, 그리고 슬픔과 번민이 준 선물이었습니다.

• 서로 헐뜯지 말라

11절과 12절은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명심해야 할 것을 가르쳐줍니다.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이 말은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교회 공동체가 처한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를 가리켜 ‘거룩한 창녀’라 했습니다. 거룩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의 모임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구절절 옳은 말을 하지만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성적으로는 납득하면서도 감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목회자로 살다 보니 정말 다양한 삶의 상황을 마주하게 됩니다. 같은 교회 내에 있는 이들의 삶도 참 천양지차입니다. 교회처럼 말이 많은 곳이 없습니다. 문제는 수군거림과 비방이 공동체의 일치를 해친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온유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어떤 이들의 말이나 처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래?’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가 그렇게 처신하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자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의 자리에 서 보지 않은 채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밀양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이계삼 선생이 어느 잡지에 쓴 글을 참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교사는 세 종류가 있다 합니다. 첫째는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가 학생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단순합니다. 공부를 한다/하지 않는다, 단정하다/너저분하다, 교사의 지도에 긍정적이다/부정적이다. 그들은 교단에서 받은 인상으로 학생들을 평가합니다. 둘째는 아이들이 앉은 자리로 찾아가는 교사입니다. 

그 자리에 가면 사나울 것 같았던 아이의 천진한 모습도 보게 되고, 모범생처럼 보였던 아이의 자폐적인 내면을 보게도 된답니다. 셋째는 교실 바깥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는 교사입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속한 시공간 속에 들어가 그들과 어울립니다. 그때 비로소 교사는 학생들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이고 정확한 인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 글을 보면서 참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우리는 교단 위에서 학생들을 바라보는 교사처럼 타인을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야고보의 질책이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평화롭게 사는 법을 읽히라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서로 함께’ 북돋는 관계를 통해 우리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소한 차이 때문에 불화를 겪는 것처럼 낭비가 없습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서로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서로 발을 씻겨줄 때 공동체는 든든히 서 갈 것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이 싹트는 모습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셨습니다. 큰일에만 눈길을 주느라 자기 내면을 살피지 않으면 우리 가슴은 묵정밭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악마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깨어 있으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께 이르는 통로로 삼으십시오.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하나님 나라의 동행으로 여겨 귀히 여기십시오. 내가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집니다. 이 소망을 품고 새로운 삶을 향해 힘차게 길 떠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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