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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을 위해 (요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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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위해 (요 17:1-3)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있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무지개를 따라가는 아이처럼 막연하게 헤매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와 사는 사람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으셨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감격하면서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새롭게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힘들었을 때 하나님이 먼저 찾으셔서 힘을 주고 위로해 주셔서 승리할 수 있었음을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조셉 하이든입니다. 조셉 하이든은 위대한 성가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 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톤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창조’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좌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들을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누상보훈의 모든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요즘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이 주위에 너무 많아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하고 물으면 “그저 숨 쉬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숨만 쉬어도 다행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숨만 쉬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이야 말로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인생 행복론’을 쓴 데일 카네기 사무실에는 풍경화 한 점이 걸려 있습니다. 
물이 빠져나간 황량한 바닷가에 낡은 배 한 척이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는 장면입니다. 그 밑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비록 지금은 절망스런 때이지만 곧 온갖 생명체들이 노래할 밀물이 몰려올 테니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썰물 때입니다. 모든 것이 빠져나가느라 고통스럽고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썰물 때 배를 손질하고 그물을 수선하는 자만이 밀물 때 풍요를 누리게 됨을 잊지 마십시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첫머리에 때가 이르렀으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때란 어떤 때이기에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즉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구원을 얻을만한 자격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명이 이미 죽은 자의 생명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죽은 생명을 다시 살려주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사람이 왜 죽을 수밖에 없습니까? 그건 사람의 죄 값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죄의 삯을 누군가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죗값을 그렇다면 어떻게 치를 수 있을까요?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 대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대신 죽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렀다고 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들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었다 즉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하시면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죽는 그것이 아들이신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라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니 고난당하고 죽는 것이 무슨 영화로운 일입니까? 그런데 그 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믿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니 영화로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수치스럽게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영광을 얻는 길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길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니 곧 아버지 하나님께도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십자가에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사 나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어 새 생명을 얻는 일에 온전히 드려지게 하여달라고 지금 기도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해 달라고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같으면 그 고통을 덜어달라고 기도할 텐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누구의 도움으로 쉽게 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사실 아픈 만큼 아파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픈 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싶은 것이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수술을 해도 무통주사를 맞지 않습니까? 고통을 덜 수 있다면 돈 좀 들더라도 덜 고통스럽게 지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왕이면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있다면 쉬운 길을 택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쉽고 빠르고 편하고 재미있게 하고 싶은 것 이게 현대인의 모습 아닙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하지만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듯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나를 영화롭게 해 주세요. 즉 내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잘 죽게 해 주세요. 나는 그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능히 감당하겠습니다. 내가 기꺼이 죽겠습니다. 기꺼이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겠습니다”라고 지금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고난당하는 것 좋을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할 수만 있으면 고난 없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면 고난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위해서 우리 또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왕지사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면 즐기십시오. 고난도 즐기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고난 뒤에 주시는 영광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는 그에 따른 하나님의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명품으로 만들어 가시는 귀한 훈련장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내가 기쁨으로 이 일을 감당하겠나이다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귀한 삶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오늘의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내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서 어느 젊은 부흥사가 교도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정식 예배가 아니고 여러 종교가 있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토론식의 모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설교를 하기 이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강단에 서서 ‘여기 계신 이 목사님은 아마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갈 거라고 말씀할 것입니다.’ 하면서 비웃더랍니다. 

그러니까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해집니까. 그 재소자들이 저 목사가 나와서 무슨 말을 할까 지켜보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들을 리가 만무하죠. 그런데 이 목사님이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를 좀 도와주세요. 내가 어떻게 하면 여기서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감동을 주셔서 ‘설교하기 전에 네가 먼저 찬양을 불러라.’ 그러더래요. 그래서 그 분이 찬양을 잘 부르기 때문에 직접 피아노로 반주하면서「His eye is on the sparrow - 하나님의 눈이 참새를 바라보신다.」라는 유명한 찬양곡을 불렀습니다. 

그 곡은 sister act에도 잠깐 나오는 곡인데 그 가사도 은혜롭고 그 내용도 은혜롭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안 된다면 참새보다 더 귀한 너희를 하나님이 왜 돌보시지 않으랴’라는 그런 찬송입니다. 그분이 피아노를 치면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열린 창문으로 참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오더래요. 그래서 한 바퀴 빙 돌고 나가더래요. 그래서 그 분이 찬양을 마치고 일어서서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오늘 예수 믿으실 분 일어나세요.’ 그랬더니 거기 있던 재소자들이 다 일어났대요. 그 중의 일부는 눈물까지 흘리더래요. 

이미 알고 있는 메시지, 사람들이 안 받아들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분이 그 메시지를 전하니까 사람들이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영적인 권세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시는 증거가 나타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말씀, 이미 사람들이 식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말씀이라도 그 목사님이 그 말씀을 전하니까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권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왜 주셨는가 하면 영생을 주시려고 권세를 주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어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생명 즉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만민들을 다스리시는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권세를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영생을 주시느냐 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내 구주로 내 마음에 영접한 저와 여러분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 주셨다고 지금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도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고 영접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감동하여 주셔서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간섭하여 주십니다. 이것을 감사하십시오. 주님의 간섭하심을 성가시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간섭하시는 것은 우리를 귀찮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으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손길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아이로 하여금 온전한 자녀로 자랄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로서는 짜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는 부모가 싫다고 앙을 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말대로 따르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온전한 사회인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자가 되도록 돕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예수님을 종 부리듯이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를 풍성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영생이 무엇입니까?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정답게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 덧 해가 지고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하루살이야! 오늘 참 재미있었다.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다시 만나서 놀자!” 
하루살이는 내일이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메뚜기에게 내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메뚜기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하루살이는 이해를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메뚜기가 개구리를 만나서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신나게 놀고 난 뒤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말했습니다. 

“메뚜기야! 날씨가 너무 추워졌구나. 이제 우리 그만 놀고 내년에 다시 만나서 재미있게 놀자” 
이번에는 메뚜기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메뚜기는 내년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개구리가 열심히 내년을 설명했지만 역시 메뚜기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르기에 내일이 무엇이니 하고 묻습니다. 메뚜기는 내년을 모르기에 내년이 무엇이니 하고 묻습니다. 이와 같이 영생을 모르는 사람들은 영생이 무엇이니 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내일이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내년이 있음도 압니다. 마찬가지로 영생이 분명히 있음을 압니다. 따라서 영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생이 무엇이니”라고 물어도 우리는 그 영생을 묻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있는 영생을 가르쳐주고 우리의 열려있는 궁극적인 소망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씀은 참 하나님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의 삶은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냥 한 분 하나님이 아닙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전래의 신에 대한 용어는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한국말도 모른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용어를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니라 단순히 하느님이 아닌 온 세상의 주관자요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거짓 신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부처가 아닙니다. 알라가 아닙니다. 천지신명이 아닙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야훼 하나님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면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이야말로 온 세상의 주관자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참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주로 말미암아서만이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 영생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이 세상에서 누릴 수도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오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시오 우리를 위한 선지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로 말미암아서만 우리를 죄 사함을 받고 주의 복을 받을 수 있으며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기에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이 이에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 대한 훈계의 말씀이 아닙니다.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바라보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께 드린 마지막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말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제자들을 교육하시기 위함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것은,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게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는 원하면서도 다시 말해서 천국에 들어가기는 원하면서도 하나님을 바로 알려고 하지도 않고 또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되는 일이 아님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안다’는 말은 ‘동침한다’, ‘동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부가 한평생 동침동거할지라도 서로 알려고 하지 아니하면 일생 남남으로 살 수 밖에 없거늘,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마음과 노력 없이 어찌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으며, 어찌 그 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초읽기에 들어간 이 마지막 순간에서조차,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간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에 앞서서 다락방의 말씀을 통해 그토록 강조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렇습니다. 우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님 안에 계시고 그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님과 함께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그것이 곧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게 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깊이 깨달은 요한 사도가 그래서 요한복음 첫 머리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감사하며 이 믿음 안에서 주와 함께 영생토록 변함없이 승리하시며 주님의 약속하신 모든 것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존 애덤스는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을 아주 낡고 허름한 집에서 보냈습니다. 한번은 지인들이 애덤스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내신 분이 이렇게 초라한 곳에서 지내시다니요” 
애덤스는 손으로 신체부위를 번갈아 가리키며 설명했습니다.
“집의 지붕과 같은 머리카락은 빠지고 집의 벽과 같은 늑골도 허물어졌어요. 이제 겨우 지팡이에 의지해 살고 있답니다.”

방문객들은 딱한 표정으로 애덤스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요. 저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답니다. 그곳은 정말 좋은 곳이지요.” 
그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영생의 소망. 이것은 나이가 들어가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인생은 한없이 비참할 뿐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영생 즉 천국으로의 첫발입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을 향한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아직 천국에 이른 것은 아니나 이미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의 승리가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더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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