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36)

첨부 1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36)


“빠삐용”이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한 무기수가“악마의 섬”이라 불리는 감옥에서 탈출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스티브 맥퀸이 탈출에 성공해서 자유를 얻었다고 외칠 때, 그의 친구 더스틴 호프만이 말하기를“네가 아무리 탈출에 성공했어도, 네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너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실제 인물은 프랑스의 앙리 샤리에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빠삐용>의 속편 <빵고>에서 탈출 이유를 밝혔습니다. 1930년 프랑스 파리 시내 술집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실적에 눈먼 검사에게 범인으로 지목된 샤리에르는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홉 번의 탈출을 시도해 14년 만에 성공합니다. 이후 그는 남미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며 복수를 위해 돈을 법니다. 30년 범죄 시효가 만료된 1967년, 그는 검사를 죽이기 위해 파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다녔던 거리, 고향집, 어릴 때 꿈꾸던 미래, 등을 되새기는 가운데 복수심은 무너졌습니다. 체포당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고, 그리고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너는 이겼다. 친구여, 너는 자유롭고 사랑받는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에 있다. 마치 기적처럼, 그리고 너는 확인하고 있다. 이 일에 관계된 사람 중에 네가 가장 행복한 자임을...”복수하려던 장소에서 복수와 증오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제서야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참자유가 어떠한 것임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는 생명과 같습니다. 인간의 가치, 행복은‘얼마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를 네 가지 차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입니다. 자신의 감정이 요구대로 하는 자유입니다. 본능적, 동물적 차원의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방종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온갖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둘째, 제한하는 자유입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은 부부라는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도의와 도리를 지키는 윤리적 자유입니다. 한계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속박일 뿐입니다. 

셋째,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이는 스스로 버리는 자유입니다. 사랑, 정의 등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므로 얻어지는 고차원적 자유입니다. 희생을 통해 얻는 신념적 자유인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그 예입니다. 

넷째, 소망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신앙 안에서 누리는 미래지향적 자유입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확신하기에 오늘의 허무, 절망,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최종 승리의 영광을 바라보며 누리는 최고 수준의 자유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자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삶은 자유를 향한 여행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방종의 자유’를 떠나‘제한의 자유’와‘선택의 자유’를 지나‘영원한 소망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자유로의 여정 가운데 여러분은 지금 지금 어디쯤 머물러 계십니까? 영원한 소망의 자유에 이르는 길은 머나먼 여정입니다.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수많은 장애물이 있는 힘든 여정입니다. 

프랑스 작가인 루소는 말하기를,“인간은 사회 속에서 무수한 쇠사슬에 얽혀져 있다.”그가 말하는 쇠사슬은 이렇습니다.“10대는 케이크에 매이고, 20대는 연인에게 매이고, 30대는 쾌락에 매이고, 40대는 야망에 매이고, 50대는 탐욕에 매이고, 60대는 절망에 매인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 어느 분은 말하기를“10대는 입시 공부에 매이고, 20대는 인터넷에, 30대는 직장에, 40대는 명퇴에, 50대는 아내에게, 60대는 소외감에 매인다.”라고도 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자유입니다. 자유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페트릭 헨리는“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자유와 평등을 찾고자 봉건 군주들을 상대로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켜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치하에서 자유를 얻기 위해 모진 고난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 후 독재자들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민주인사들을 비롯한 국민적인 항거에 의해 유린된 자유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처럼 어느 나라, 어느 종족이든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자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자유를 얻게 되면 또 다른 속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자유입니다. 모두가 그토록 소망하는 자유에 대해 예수님께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 민주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셨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에게는 두 방면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세계 즉 영적인 세계입니다. 이 영적인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육신의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떤 과학적인 장비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볼 수 없는 것이 영적 세계입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유가 곧 이 영적 자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영적 자유가 있어야 비로소 육신의 참 자유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과 생각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셨는데 이“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4:6 말씀에“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주는 자유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유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란 어떠한 자유일까요?

1. 과거로부터 얻는 자유입니다. 

본문에 예수님께서“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에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한복음 8:33)하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한복음 8:34)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찬송가 308장에 이런 내용의 가사가 있습니다.
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오니 
걸음마다 자욱마다 모두 죄뿐입니다.

이 찬송은 어려서부터 예수를 믿고 평생을 복음증거를 위해 살아오신 조용기 목사님이 작사한 것입니다. 그런 그가 말하기를“내 평생 살아온 길 뒤를 돌아보오니 걸음마다 자욱마다 모두 죄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누가 죄를 범하도록 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사탄입니다. 죄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지금까지 유전되어 오고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죄를 범하도록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악의 노예가 되어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로마서 3:10에는“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하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으로 죄가 있는 곳에는 평안도 기쁨도 만족도 자유도 없습니다. 죄는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이 있는 곳에 불안과 공포와 혼란이 있는 것처럼 죄가 있는 곳이 이와 같습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에밀 부르너는 자유에 대하여 말하기를“인간이 원하는 모든 자유의 성취는 체제가 바뀐다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구속하는 죄가 있는 한 구속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질서를 어기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구속하는 죄가 있는 한 진정한 자유는 없다”라고 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그 어디에도 참 자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가정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집안에서 장난을 치다가 그만 화분을 넘어뜨려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그 화분은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화분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알게 되는 날에는 크게 야단을 맞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그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가 지켜보았습니다. 그 가정부는 이 아이에게, 나를 도와 청소를 같이하면 아버지께 이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아이는 가정부가 시키는 대로 매일 매일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 가정의 귀한 아들이 그만 가정부의 일꾼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인은 아버지의 화분을 깨드린 죄가 있고, 그 죄를 가정부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가 생각하기를“언젠가는 아버지께서 알게 되실 터인데 그때 야단을 맞는 것이나 지금 야단을 맞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언제까지 내가 가정부의 종처럼 살아갈 것인가? 차라리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서 야단을 맞는 것이 더 났겠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을 드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예상 밖으로 야단을 치지 않으시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자기의 잘못을 정직하게 말하는 아들을 칭찬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 어린아이는 화분을 깨뜨린 잘못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지만 잘못을 범했을 때 아들의 자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아뢰며 용서를 구했을 때 아들의 자유는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의 어릴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죄가 있는 곳에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사죄함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은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범한 불신앙의 죄, 우상숭배의 죄, 그 밖의 수많은 양심의 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어 원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의 마음속에는 기쁨도, 만족도, 평화도 다 빼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죄를 없게 하시고, 용서해 주시고자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 앞에 뉘우쳐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문 36절에 말씀하시기를“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과거 죄악의 속박으로부터 자유 함을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지난날의 허물과 실수와 죄악의 사함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샘솟는 기쁨과, 강 같은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2. 현재의 삶에서 얻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염려와 근심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편히 쉴만한 곳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힘겨운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가고 있는 나그네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의 짐, 어떤 사람은 질병의 짐, 어떤 사람은 슬픔의 짐, 어떤 이는 외로움의 짐으로 인해 한숨 쉬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은 우리들의 모든 삶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1:28~30에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으로 인해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께로 오라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그렇습니다. 예수께로 오는 것이 우선입니다. 병든 사람은 먼저 병원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샘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은 먹을 것이 있는 곳을 찾아 가야합니다. 배를 타려면 항구로 가야합니다. 비행기를 타려면 공항으로 가야합니다. 차를 타려면 터미널로 가야합니다. 이처럼 모든 염려와 근심에서 자유함을 얻으려면 그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집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진정한 쉼터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모든 짐을 받아주는 집하장(集荷場)장입니다.

이러한 삶의 진리를 일찍 깨달았던 한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가정이 너무 가난하여 아들을 초등학교 밖에 보내지 못하고 일자리를 구해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 어린 아들을 보내면서 이 여성도는 열 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되 참된 신자가 되라는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3. 주일예배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려라.
4.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말아라.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7.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8. 아침에는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10. 예배 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아라.

마음씨 착한 이 어린 아들은 어머니의 10계명을 마음깊이 간직하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이 사람이 훗날 세계 최대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입니다.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쉬게 하리라”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은 참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시편 73:27에 말씀하시기를“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날마다 가까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여기에 참 자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17:5~8말씀에는“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사막의 떨기나무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정성을 다해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같이 잎이 청청하며 가뭄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성경의 정확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17년 레닌은 혁명을 일으키고 1,000년 동안 열렸던 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성전을 공산당 당사와 노동자 숙소, 심지어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 70년 만에 소련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소련이 붕괴된 후 그 원인을 각 분야 100명에게 3년 동안 연구하여 발표토록 했습니다. 내란도 외부의 침략도 없었는데 왜 망했을까요? 그 원인을 첫째, 내부문제. 둘째, 하나님을 믿지 않고 버린 것이라 했습니다. 한 소련 공산당 지도자는“교회 문을 닫으니 모든 문이 닫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바위 위에 곡식을 심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예수님께 배우라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28~29)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배우는 것이 참 자유를 얻는 길입니다. 본문에도“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1-32)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되 이론적으로만 배워 뇌리에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배워 내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 배웠던 삶의 방법은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대게는 인간의 본능에 기초한 세상적 기준입니다. 하늘의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삶의 터를 새로 닦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들의 삶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가 있게 됩니다.

한 미국인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 나섰습니다. 그때 한 테러리스트가 쏜 총알이 아버지의 머리를 관통했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소녀는 범인을 찾아내 복수를 할 생각으로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열심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위싱턴 포스트 기자가 되어 이스라엘 근무를 자청했습니다. 그녀는 법원기록을 뒤져 12년 만에 범인의 소재를 확인했습니다. 테러범의 이름은 오마르 하티브였습니다. 복수의 기회를 맞은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범인과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인 그녀의 마음속에 갑자기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진정한 복수는 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리적 복수는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그녀는 테러범과 가족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범인의 가석방을 위해 청원서를 제출하는 차원 높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로라 블루멘펠트 전 워싱턴 포스트기자의 이름입니다. 세상의 싸움은 때려 눕혀야 승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상대를 용서해야 승리합니다. 용서는 최선의 복수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인해 얻어지는 참된 자유입니다.

미국의 헬렌 켈러(1880-1966)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삼중고의 고통 속에서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여류작가로서 살아간 기적의 사람입니다. 그는 간증하기를“내가 배운 것 중에 최대의 소득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까지 무엇인가의 노예로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17에 말씀하시기를“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하셨습니다. 

3. 미래에 얻게 될 자유가 있습니다.

미래에 얻게 될 자유는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에서 얻게 될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과 목표가 하늘나라입니다. 이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과거의 죄악을 사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아 삶의 자유를 누리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마치는 날 얻게 될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하신 말씀같이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는 죄악이 없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이별이 없습니다. 슬픔이 없습니다. 가난이 없습니다. 질병도 죽음도 없습니다. 성삼위 하나님과 함께하는 곳입니다. 천군 천사가 우리에게 수종드는 곳입니다. 만족과 기쁨이 가득한 곳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참 자유를 주시고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믿고 영접하여 주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곳에 왔습니다. 

자유를 위해 이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 부지런히 나아와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워 삶에 적용할 때 우리들의 무거운 짐은 벗겨지고 풍성한 자유가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 가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십니다. 

이 귀한 은총을 기대하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