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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방주 (창 6: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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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방주 (창 6:13-14) 
  
성경을 읽다 보면, 구약 성경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구약에 나타난, 몇 가지 원리를 알면, 성경을 이해하기 쉽다. 그 원리 중의 하나가 예표론, 모형론이다. 영화로 생각해 보면, 본편을 개봉하기 전에, 영화업자가 정성을 들여 만든, 예고편을 미리 보여준다. 
  
예고편은 짧지만, 그 영화가 꼭보고 싶을 만큼, 재미있고,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또 예고편은 분명해야 한다. 그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애정영화인지, 공포영화인지, 액션영화인지, 공상영화인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예고편은 정확해야 한다. 예고편이 아무리 재미있고, 멋이 있어도, 본 영화의 내용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면, 정말 난처한 일이다. 예고편은 뭐니 뭐니 해도, 본영화의 주제를 정확하게 예고해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예고편을 보면서, 본편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그 영화를 기다린다. 

드디어 영화가 상영되는 날, 영화를 보면서 ‘아! 예고편의 그 장면이, 바로 이것이네!’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신학에서는 예고편을 예표(모형)이라 하고, 본편을 원형이고 한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예수님에 관하여, 예표가 자주 등장한다. 

사물, 사건, 인물 등이, 예표로 사용되어서, 예수님에 관해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러한 예표들 중의 하나가, 본문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다. 즉 노아의 방주는 예고편이고, 예수님이 원형(본편)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방주에 관하여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한다. 

1. 방주를 만들게 한 이유는, 죄가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창6:1-7). 

(1) 성적타락이 극대화되었다(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노아가 살고 있던 그 시대는, 일부일처가 아니다. 

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아내로 삼았다. 그 기준은 외모였다. 현대의 젊은이들도, 이렇게 말한다. “과거 있는 사람은 용서해도, 뚱뚱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서 다이어트와 성형수술 열풍이 불고 있다. 육신이 기준이 되었다. 

(2) 죄악이 땅에 넘쳤다(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세상 어디를 보아도, 죄악이 넘쳤는데, 생각과 모든 계획이 악했기 때문이다.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살았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며, 간섭받기를 싫어했다. 

(3) 온 땅이 부패하여, 포악함이 가득했다(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온 땅의 사람들이, 포악함으로 가득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죽일수록, 영웅이 되는 시대였기에, 법과 질서보다는, 힘과 주먹이 우선이 되는 사회였다. 

하나님이 노아 시대를 보실 때, 속도(5), 겉도(12) 너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고 (6-7)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한숨 쉬다.), 마음에 근심하시고(고통스러워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아니라, 죄를 택하고 행했기에, 하나님의 기쁨이 대상이요, 교제의 대상인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의 근심의 대상이요,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세대는 어떤가? 성적으로 너무 타락되어 있다. 인간의 생각과 계획이, 너무나 악해서, 죄악이 넘쳐흘러, 세상 어디를 봐도, 성한 곳이 없다. 

죄는 인간에 침투하여, 본질을 변질시켜, 수많은 죄악을 생산해 낸다. 사실상 인간의 모든 문제는, 죄로 말미암아 파생된다. 죽음의 문제, 질병의 문제, 고통의 문제, 살육의 문제, 다툼의 문제, 갈등의 문제 등이, 모두 이 죄로부터 나온다. 죄는 인간을 죽인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6:23). 

그래서 하나님은 (3中)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이, 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했다. 이 말은 회개할 수 있는 기간을, 120년 주셨다는 말이다. 120년이라면 돌아오는데 충분한 기간이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는데, 거의 평생을 보냈다. 

그러나 120년이라는 유예기간을 주었지만, 지상에 있는 생물들은, 모두 몰살당했다. 따라서 노아의 시대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다. 회개하지 않았기에, 홍수로 멸망했다. 노아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노아(󰖙󰗿)는 “위로하다, 안식하다, 연합하다.”는 뜻이다. 노아는 세상을 구원하고, 인류에게 진정한 쉼과 안식을 가져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이다. 노아는 물로 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중에서도, 방주로 그 가족들을 구원하여 안식을 주었다. 

예수님은 멸망하는 이 세상에, 참 안식을 선포하는 위로자이다(요14:27). 장차 재림할 때, 불로서 심판하실 때, 성도들을 구원하여, 진정한 안식의 세계인 천국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주님이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인생이 되자. 

노아는 대업으로 생각하고 방주를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노아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정상인으로 보지 않았다. 미련한 바보천치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심판에 날에, 누가 어리석은 자인지 알 수 있다. 


2. 이렇게 타락한 세상에서, 노아는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다(8-9).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이 말은 노아가 전혀,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타락한 세태에, 물들지 않았다는 말이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사람이지만,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과 동행했다. 동행했다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켜 걸었다, 하나님만을 따라 걸어서, 악한 환경에 물들지 않았다. 그 시대 사람들의 풍습을 따르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은, 하나님이 ‘은혜를 입혀 주셨기’때문이다. 스스로 의로울 수 없는 인간을, 죄에서 건져주고 의롭다 여겨주는, 여호와의 은혜가 있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더라.”(노아 마짜 헨 브엔네 아도나이 הוהי י󰗻י󰘠󰔶 ן󰖑 א󰘼󰗪 󰖙󰗿) 

이를 직역하면 “노아는 여호와의 눈들 안에, 은혜를 발견했다.”는 말이다. 여호와의 눈에 인간을 향한 사랑이 들어있음을 노아는 발견하고, 그 은혜를 사모했다. 주님의 눈을 의식한 사람은, 인간의 시선을 따라 사는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다. 

여호와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선을 행하다가 핍박받아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은혜를 히브리어로 헨(ן󰖑)이라고 한다. 이 말은 ‘은혜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 ‘간구하다’는 하난(ן󰗻󰖎)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은혜를 찾았다는 말은, ‘긍휼을 간구 했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긍휼을 간구 했기에, 그 시대 사람들 모두, 물로 심판 받을 때, 구원을 경험했다. 오늘날 악이 범람하는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구원이 요청된다. 구원은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하는데 있다. 긍휼하심을 간구 하는 노아에게, 하나님은 비밀을 말씀하신다. 

(13)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진찰하신 결과, 죄악이 가득하다고 판단하시고, 살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은 먼저 죄를 지적하고, 죄로 충만한 땅을 멸하겠다고 말씀했다. 사람들은 죄를 지적하면, 굉장히 싫어한다. 그래서 잘하는 것만을 긍정적으로 말하며, 죄악을 지적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귀는 죄를 지적하지 말고, 잘하는 것만 말하라고 한다. 

그렇지만 수술하면, 살 수 있는 사람을, 의사가 보고 수술하지 않고, 성형수술만 하면, 그 의사는 직무유기이다. 이처럼 목사가,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으면, 그 목사는 직무유기이다. 하나님은 죄로 충만한 이 세상을 멸하시겠다, 썩은 부분을 수술하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진찰 결과,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 했다. (14) “너는 고페르(유숙하다)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방주는 역청을 칠하라고 했기에, 역청을 칠해야만 했다. 

역청(코페르 ר󰘭󰗔)은, (카파르 ר󰘪󰗏) ‘덮다, 속죄하다, 용서하다, 화해하다, 지워버리다’는 말에서 왔다. 그래서 코페르(ר󰘭󰗔)는 ‘대속물, 속량물, 몸값, 총애를 얻기 위해 드리는 선물’이다. 따라서 고페르나무 즉 기름을 함유한 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역청으로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그 안팎을 칠해야 한다. 

역청이 칠하도록 한 이유는 ‘대속물을 드림으로, 속죄함을 받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죄나 더러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속죄 제물을 드려야만 했다. 이는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한다. 또한 방주는 (벧전3장)에서 “그리스도와 교회”라고 했다. 

따라서 역청을 칠하라(ר󰘪󰗏)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있어야,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하실 때, 사망의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살기 원하는 자는, 방주에 들어가야만 했다(18). 방주는 홍수 심판이 오기 전에, 이미 만들어졌다. 

방주에 들어가기 원한다면,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있다. 살기 원하는 자만,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많은 사람은, ‘설마’하면서 들어가지 않았다. 그 후 하나님의 심판이 왔을 때에는, 들어가고 싶어도 이미 늦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생각되지 않은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셨다(마24:37).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향해, 수술을 해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방주 안에서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정 기다리시지 않는다. 그 기다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세상에서 방주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의 심령에 칠해야만 한다. 이는 모형이며, 다른 방법은 없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믿음으로 살기 힘들다고, 어렵다고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자. 왜냐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나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어렵고 힘든 이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신다. 그러므로 낙망하지 말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3. 2가지 방주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ה󰔧󰚞)라고 하는데, 구약성경에 2번 나온다. 하나는 노아의 방주요(창6:14), 또 하나는 모세의 방주(출2:5, 한글성경은 상자로 번역)다. 

노아의 방주와, 모세의 상자는, 원문은 똑같이 테바(ה󰔧󰚞)로 나온다. 노아의 방주나 모세의 방주가 같으나, 하나는 대형이요, 하나는 소형이다. 공통점은 둘 다 배가 아니다. 단순히 물 위에 떠있어서, 구원하면 된다. 배나 보트가 아니기에, 키나 돛이 필요하지 않다. 

역청이 반드시 칠해 있어야 한다. 보혈이 있어야 한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교회의 모형이다. 현대 히브리어로, 테바는 귀중품을 넣는 안전한 금고다. 방주는 하나님이 아끼시는 보물, 노아와 모세를 넣기 위한 하나님의 금고다. 인류와 선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 시대 노아만이 하나님에 의해, 귀중품처럼 보호를 받았다. 하나님의 국고 제1호가, 노아와 그에 속한 것들이다. 하나님이 홍수로 지면을 쓸어버릴 때, 노아만 귀중품을 다루듯이, 하나님의 금고에 집어 넣으셨다. 이 금고의 문은, 하나님만 열고 닫으실 수 있다. 

(7:16中)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마침내 하나님이 금고문을 열자, 노아가 들어갔고, 하나님이 문을 닫았다. 노아가 문을 닫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노아는 방주 문을, 열 수 없었다. 

노아의 방주는 멸망하는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야 하는 교회다. 따라서 노아의 방주는, 썩어 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온 자들을, 구원하는 교회(엑클레시아)다. 교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온 자를 구원하는, 노아의 방주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먼저 썩어 가는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노아의 방주 교회가 되어야 한다. 모여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순서다. 하나님의 일은 은혜 받기 전에, 나서서 해서는 안 된다. 모세의 방주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으로 나가는 방주다. 여기도 반드시 역청이 있어야 된다(출2:3). 

그러므로 노아의 교회를 모이는 교회라고 한다면, 모세의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나가는 교회다. 교회는 모여서 은혜를 받고, 죄악 된 세상으로 나가, 죽어 가는 저들을 구원해야 한다. 먼저 은혜 받고, 선교하는 모습을 나타나야 한다. 

노아의 방주는 세상을 멸하기 위해서 필요했고, 모세의 방주는 선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모세의 방주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건져내는 방주다. 우리는 먼저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은 후에,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상에 들어가 모세는 실수했지만, 끝내 그들을 건져냈다. 

이 세상에서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 실수가 없으면 좋지만, 실수를 안 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실수할까봐 나가지 못하면 비겁한 행동이다. 우리는 세상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자이다. 세상으로 나감을 두려워 말라. 

노아의 방주는, 이 세상 범죄역사를 말하고, 모세의 방주는 구속사를 말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노아의 방주만으로 이 세상을 바르게 세울 수 없다. 모세의 방주도 있어야 구속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다. 은혜를 받은 후,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 모세의 방주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려면,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주님의 능력은 현장에서 드러난다.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나가지 않고는, 승리를 맛볼 수 없다. 몸이 갈 때, 돈도 기도도 가게 된다. 

선교사에서 선교비를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직접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증거할 때, 진짜 선교가 이루어진다. 

노아의 방주만으로는, 이 세상을 바르게 세울 수 없다. 모세의 방주도 필요하다. 예수님 안에는 이 2가지 방주가 다 나타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고, 또한 예수님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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