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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고전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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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가치관 (고전 10:3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일컬어 다원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관습이나 전통적인 가치 기준에 얽매이기보다는 개방성과 다양성을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과거에는 옷을 입는 데 법도가 있었으나 요즘은 더 이상 옷 입는 규범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입으면 됩니다. 머리카락을 염색하는 일도 과거에는 주로 흰 머리를 감추기 위해서 했으나 요즘은 멋을 내기 위해 합니다. 언제라도 원하는 대로 다양한 색깔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러한 행동을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다원주의는 사람들의 생활 전반에 걸쳐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자면 획일주의와 권위주의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 권위주의시대에는 국가가 국민의 두발(頭髮)에 간섭한 적이 있었습니다. 헌법이나 법률에 근거가 없음에도 경찰이 가위를 가지고 장발을 단속했습니다. 그리고 다원주의의 부정적인 면으로는 무규범 또는 가치관의 혼란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정상적인 규범조차 무시하는 것을 보면서 이러다가는 규범이 없는 방종한 사회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가치관의 혼란은 이 시대가 그만큼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창세기 6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는데, 이는 노아 시대 사람들의 타락상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사사기 17장 6절에 보면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삶의 규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모세가 죽고, 또한 선민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인 여호수아와 동시대 사람들도 다 죽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뒤에 새로운 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는 지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해도 그만일지 몰라도 성도들이 그런 식으로 살면 타락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에 오염되지 않도록 항상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그 기준을 성경에 기록해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성경적인 가치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고린도전서 10장 31절 말씀이 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오늘은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 번 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되 자기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것들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19편 1절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밤하늘의 뭇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슬을 머금고 피어 있는 장미송이를 보면서 ‘장미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장미는 결코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입니다. 깊은 산 속에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가 지는 들풀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은 그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재능이 별로 없는 사람은 그 적은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 건강, 시간, 물질, 지식,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참으로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인간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영광을 자기들이 차지하기를 좋아합니다. 무슨 업적을 이루면 지혜와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제 능력으로 된 줄로 알고 자기가 영광을 차지합니다. 또한 인간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영광을 우상에게 돌리는 죄를 범합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에 이르기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고 했습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간에 반드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그리고 제 용도에 맞게 쓰임 받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명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식사시간에 그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다면 짐승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끼 밥을 먹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조차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직장에서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또는 집에서 가사를 돌보면서 주부로서 응당 할 일이니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같은 일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식사하고, 직장에 다니고, 사업을 하고, 가사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몸을 위해서 음식을 먹고, 생계를 위하여 일합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예술을 위하여 시간이나 물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겉보기에는 똑같아 보여도 성도들의 생활과 세상 사람들의 생활은 그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께 인정받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은 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것이냐를 결정하기 전에 “내가 이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을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 8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 보다 사람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거나, 하나님 보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행동한다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벧전 4:11)라 하신 말씀에 근거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두 번 째로, 악한 세태를 본받지 말고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당면한 가장 어려운 과제가 무엇이냐 하면, 어떻게 하면 세속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도답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사회를 떠나서 깊은 산속이나 외딴 섬에서 자급자족 하면서 산다면 세상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살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또한 성경이 그러한 은둔 생활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세상을 등지고 살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빛은 어둠을 밝힐 때라야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태양이 밝게 빛나는 대낮에 가로등을 켜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가로등을 켤지라도 낮을 더 밝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중에는 20촉짜리 전등 하나만 켜도 주위가 환하고, 멀리서도 그 불빛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캄캄한 밤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 빛을 발하기만 하면 주위를 밝게 비추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저절로 물러가게 마련이듯이,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죄악의 어두움이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 빛은 어두운 밤에 바른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듯이, 성도들 역시 죄악 가운데 방황하는 자들에게 참된 삶의 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거나, 등불을 등경 위에 높이 놓지 않고 마루 밑에 넣어 둔다면 그처럼 무용한 것이 달리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이 연속극이나 영화나 게임 따위에 몰두하는 것은 삶의 무미함을 모면해 보기 위한 것입니다. 언뜻 보면, 세상 사람들이 재미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재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야 맛을 내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나 사람 사는 맛을 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한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곳마다 타락을 방지할 사명이 있습니다. 소금은 그 자신이 음식 속에서 완전히 녹아짐으로써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듯이, 성도들 역시 말없는 봉사와 헌신을 통해서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은 우리가 믿음을 지켜나가는데 어려운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세속화시키고 타락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이 자기들보다 정직하고 성결한 삶을 살기 때문에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셨고, 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0-12)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이 그들과 같이 어울리면 ‘생각이 진보적이고, 속이 트인 사람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도 별 것 아니구나’ 하고 비웃습니다. 반면에, 성도가 구별된 삶을 살아가면 ‘너무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불평하고 따돌리지만 속으로는 그러한 그리스도인을 존경하고 신용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세속적인 유혹을 단호히 거부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이 시대는 감성적인 문화가 번창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온갖 더럽고 추한 행동이 버젓이 행해지고 권장되는 시대입니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왜곡되고 도착된 표현물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상을 보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국방력이 강할지라도 국민들의 마음이 오염되고 타락하면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로마 제국의 멸망을 교훈삼아야 합니다. 그들이 망한 것은 경제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군대가 약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위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정신이 썩고, 그들의 영혼이 병들었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유황불에 망한 소돔 성을 생각하노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왜 구별된 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하는지, 그 이유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위하여 요구하시는 의인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의인의 수가 점점 줄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속화의 물결이 교회 안에까지 밀고 들어오고 있고, 신자들의 생활을 잠식해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전도자의 사명을 버리고 사도 바울의 곁을 떠나간 데마와 같이 세속화되어 가는 기독교인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언제 어디서나 성도다운 구별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 번 째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가장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한 성경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하신 말씀과 같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어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아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갈등이 생기고 아무 선도 이룰 수 없습니다.

민수기 22장에 보면, 이방 선지 발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모압 왕 발락이 보고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모압 장로들의 손에 많은 예물을 들려서 메소보다미아에 거주하는 주술사 발람에게 보내어 자기에게 와서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말하기를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 발람에게 임하셔서 말씀하시기를 “너와 함께한 이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발람이 고하기를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내게 보낸 자라 이르기를 보라 애굽에서 나온 민족이 있어 지면에 덮였으니 이제 와서 나를 위하여 그들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하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발락의 귀족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여호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모압 장로들이 발락에게 가서 이 사실을 고하자, 발락이 이번에는 전보다 더 높은 귀족을 더 많이 보내면서 새롭게 제안하기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대답하기를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발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신실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인즉 발람은 이미 부귀공명에 마음이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발락이 보낸 귀족들에게 말하기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했습니다. 발람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고 한 것은 불순종의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자 그 밤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발락에게 가기를 허락하셨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발람이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자꾸 제 고집을 내세우니까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 보라고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그것은 발람이 아침에 나귀를 타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가는데 외길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들고 그를 막아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들고 앞을 막아 선 것을 보고는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가자, 발람은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서니,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의 밑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가 나서 제 정신이 아닌 발람은 나귀에게 대꾸하기를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나귀가 말하기를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발람이 말하기를 “없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때에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니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발람이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뜻을 포기할 때 갈등이 사라지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기도하시면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포기하셨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굴복시키기 전까지는 진정한 승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세상을 이기고 욕심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에 여러분의 뜻을 굴복시키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7)고 주님께서 주시는 승리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가치관의 혼란은 앞으로 더 그 도를 더해 갈 것입니다. 다원주의의 사조는 이미 교회 내부에도 들어와서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고, 그리스도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세태를 보고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말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리라고 이미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풍조가 아무리 변하더라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시며, 그 분의 말씀도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가치관 역시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이 악한 세상을 본받지 말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님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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