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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킴에서 누림으로 (레 2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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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킴에서 누림으로 (레 25:1-12)
  
언론보도에 의하면 지난 해 중국의 무역 총액이 미국을 앞질렀다고 합니다. 중국의 비약적 발전의 일등 공신은 <등소평>입니다. 그는 1981년 중국을 장악한 후 개인에게 이윤을 보장해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과거에는 열심히 일해도 개인의 몫이 인정되지 않았었습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고, 경제는 발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에게 이윤을 보장해 주었을 때,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각자에게 이윤을 보장해주는 것만큼 강력한 동기부여는 없습니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내가 수고하면 내 것이 된다>는 생각으로 흥분했습니다.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가나안 땅도 얻게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면, 그 땅에 무엇을 심을 것인지, 농사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 밤새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희망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은 노예였기에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도 그 열매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얻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들 마음속에 부자가 되고,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불일 듯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 전에 특이한 말씀을 함께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읽은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안식년> 제도의 핵심은 여섯 해 동안은 농사를 짓되, 일곱 번째 해에는 땅을 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2-5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할 수만 있다면 한 해에 두 번, 세 번 이라도 농사를 지어 성공하고 부자가 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욕과 성공에 대한 꿈에 찬물을 끼얹는 말씀이었습니다. 

<희년>은 안식년보다 더 큰 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희년은 일곱 번의 안식년을 지낸 그 다음 해, 즉 오십 년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희년에도 파종하지 말고 땅을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때는 더 심각했습니다. 사십구 년째 해가 안식년이므로 농사를 하지 않았는데, 그 다음 해인 오십 년째에도 파종하지 않으면 연속으로 이 년 동안 농사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이 원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속죄소 위 곧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라고 하셨습니다. 소유지로 돌아가며,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소유지로 돌아간다는 것>은 잃었던 땅을 다시 찾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개인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똑같이 땅을 분배받아도 어떤 사람은 열심히 하고, 어떤 사람은 게으릅니다. 어떤 사람은 농사짓는 솜씨가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재주가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해집니다. 

결국 가난한 사람은 땅을 팔게 되고, 나중에는 땅을 많이 가진 사람과 가졌던 땅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희년이 되면 그 땅이 원래 주인에게로 아무 조건이나 대가없이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해서 땅을 잃었던 사람은 땅을 찾아 재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땅을 사고팔 때는 희년이 되기까지 남은 햇수를 계산해서 값을 매겼습니다. 희년이 지난 바로 다음 해에 사고판다면 사십구 년을 활용할 수 있으므로 땅값이 비쌀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희년이 오 년 밖에 남지 않았다면 땅값은 싸질 것입니다.  

15-16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서 살 것이요 그도 소출을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연수가 많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많이 매기고 연수가 적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적게 매길지니 곧 그가 소출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  이렇게 해서 희년이 되면 모든 땅은 원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또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빚 때문에 자신을 종이나 머슴처럼 팔았더라도 희년이 되면 아무 대가나 조건없이 해방되어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39-41절을 보십시오.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그 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아멘. 희년이 되면 빚 때문에 헤어졌던 가족들이 모두 다 다시 만나 새롭게 출발하게 됩니다. 

이러한 안식년과 희년의 제도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안식년과 희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일까요? 

첫째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확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가나안 땅을 얻으면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일 뿐, 그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토지 매매는 엄격히 말하면 희년까지 남은 햇수를 계산해서 사용권을 사고파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경우처럼 한번 사면 영원히 자신의 것이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레위기 25장 23절을 보면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되어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손에 쥐려는 사람에게 분명히 선을 그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아무리 노력해서 많은 것을 얻어 성공하려고 하지만, 명심해라. 모든 것의 주인은 나 여호와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년과 희년은 일종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 이 땅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동안 사용하게 하셔서 잘 사용했습니다. 올해는 파종하지 않음으로써, 이 땅이 하나님의 것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년과 희년은 백성들의 세상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욕망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됐어. 그것으로 만족해. 더 욕심 내지마.....한 해 파종하지 않아도 충분해...> 이런 고백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기본이었습니다. 

또 이 제도는 사회를 안전하게 지키는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늘면 사회적 불안이 점점 커지고, 나중에는 붕괴될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년에 파종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난 것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도 다 같이 먹을 때, 굶는 사람은 사라질 것입니다. 5-7절을 보세요.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희년이 되어 땅이 원주인에게로 돌아가고, 종으로 팔린 사람이 돌아감으로써 원상회복될 때, 이스라엘 사회는 안정될 것입니다. 안식년과 희년보다 더 멋진 복지정책, 사회보장제도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정말 멋진 제도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 제도를 통하여 참된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음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착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니 사람들의 착각 시리즈가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남자들은 여성이 자신을 쳐다보면 관심 있는 줄로 착각한다. 여성들은 남자가 자기랑 같은 방향으로 가면 관심 있어서 따라오는 줄 안다. 아기들은 울면 다 되는 줄로 안다. 엄마들은 자기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공부 못하는 줄 안다. 고등학생들은 앞 학생에 가려 선생님이 안 보이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선생님도 못 보실 것으로 생각한다.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철이 든 줄로 생각한다. 남편들은 살림하는 여자들은 집에서 노는 줄로 안다. 아가씨들은 자기는 절대 아줌마가 안 되는 줄 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자기는 착각 안하고 사는 줄로 안다.> 읽으면서 웃음이 배어 나오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보다 정말 심각한 착각은 <부유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이 착각은 사람됨을 상실하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착각입니다. 

<사람됨>이란 이 세상 모든 만물 중에서 사람이 가장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만물을 다 만드신 후 맨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가장 존귀함을 나타내시기 위한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새와 물고기와 동물 등을 모두 등단시킨 후, 맨 마지막에 사람을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물질을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그는 단상 아래로 추락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라는 물질에 손을 내밀어 따 먹는 순간,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되었고, 물질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기독교처럼 인간의 소중함, 영혼의 고상함을 강조하는 것은 없습니다. 결코 우리는 유물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유가 행복의 조건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의 자녀로서의 존재 방식을 지키길 원하셔서 안식년과 희년을 말씀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도 안식하셨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 후, 일곱 째날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이유는 창조 때문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분으로서 피곤을 모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교회로 연락합니다. 그건 제가 교회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있다는 것은 목사로서 저의 존재 방식입니다. 또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이 되면 예배당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일에 저를 만나려면 예배당에 오셔야 합니다. 이게 저의 존재 방식입니다. 만약 제가 교회보다 술집에, 예배당이 아닌 다른 곳에 늘 있다면, 그건 저의 목사됨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안식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게 그 분은 당신의 사람들에게도 안식을 주셔서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안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안식을 거부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안식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기에 하나님의 나라 역시 안식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4장 10-11절을 보면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안식에 들어가길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경우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합니다. 그 날이 주일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맞는 주일에 가게 문을 닫고, 책을 덮어놓고, 하나님만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 날의 안식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잃게 됩니다. 이 날을 여느 날과 같이 여기기 시작할 때, 하루라도 더 일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고 생각할 때, 예배하러 나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질 때,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는 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또 안식년과 희년 제도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새해 달력을 받아들고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소위 빨간 날, 공휴일이 몇 날이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처럼 공휴일을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있어야 할 안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휴가와 휴식은 있으나 안식은 없습니다. 

특히 한국인처럼 바쁘다는 최면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차를 마시며 시간을 흘려보내면서도 생각은 바쁘다는 최면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늘 쫓기고, 눌리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안식이라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정확히 옮기면 <여호와께 속한 안식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공동번역성경을 참조해 보면 <너희는 내가 주는 땅으로 들어가서 야훼의 안식년이 되거든 그 땅을 묵혀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훼의 안식년>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압박이 아니라, 당신의 사람으로 여기셔서 안식의 축복으로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안식하라. 쉬라. 내 축복의 식탁에 오라! 스트레스 속에 살지 말고, 나와 함께 자유와 기쁨을 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식년과 희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의 제도를 전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사하지 않으면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안식년 후에 희년이 연결되어 이 년이나 연속으로 농사하지 않으면 다 굶어죽지 않을까>를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25장 18-21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  땅은 그것의 열매를 내리니 너희가 배불리 먹고 거기 안전하게 거주하리라  만일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만일 일곱째 해에 심지도 못하고 소출을 거두지도 못하면 우리가 무엇을 먹으리요 하겠으나  내가 명령하여 여섯째 해에 내 복을 너희에게 주어 그 소출이 삼 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리라>  

이 년을 쉬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삼 년 동안 쓸 것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땅에 파종하지 않는 해를 맞이하면 이스라엘은 다시 광야로 돌아간 것과 같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살 때, 그들은 한 평의 땅도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파종할 수 없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되면 그들은 다시 광야의 백성이 되는 셈이었습니다. 

그러면 광야에서 그들은 굶었습니까? 아닙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물을 주셨습니다. 한 평의 땅도 없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 때도 행복했습니다. 꼭 파종을 해서 추수를 많이 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복되게 하는 것은 땅과 그 소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농사함으로써 행복하게 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행복하게 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년과 희년을 맞이하면 파종하지 않고, 안식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다 같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지못해서 안식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도 안식년을 지키기는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안식년을 정말 기다렸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다음 해에 필요한 것도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마음껏 안식을 즐길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년이나 희년이 되면 <억지로 지키는 사람>과 <기쁨으로 누리는 사람>이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의 날들을 <지키는 것입니까? 아니면 누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안식하라 하실 때, 소유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라고 하실 때, 내려놓으라고 하실 때, 다른 사람도 배려하라고 하실 때, 하나님만 바라보라 하실 때, 우리는 이런 모든 말씀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억지로 그 말씀을 받고, 억지로 지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말씀이 축복인 줄 알고 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지키는 마음에서 누리는 마음으로> 변화되길 원합니다. 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길 기원합니다. 

잠시 후 우리는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라고 찬송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평화, 안식을 누리면서 이 힘든 세상을 웃으며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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