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까..

첨부 1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까? (눅 2:40-52)
 
 
5월은 가정의 달이며 오늘은 어린이날이고 어린이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서 "예수님의 실종사건"을 다루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나라 아동 실종사건을 보면 해마다 급격히 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어린이 실종사건은 2009년 20,480건, 2010년 24,137건, 2011년 26,409건으로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월 실종자는 1108명, 3월 1542명, 5월 1998명으로 신학기가 시작된 이후 바깥 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실종신고 건수도 증가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만도 이렇는데 전 세계적으로 보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실종되겠습니까? 정말 아찔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정의 달이기도 하고 어린이 날이 들어 있는 5월이 가장 많은 어린이들이 실종되고 그래서 가정들이 아픔을 겪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성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간단하고 짧지만 완전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이일 때를 40절에서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소년기와 성년기 사이의 18년 동안이 삶에 대해서도 52절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는 4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마저 이것을 기록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어느 것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부모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12살 먹은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잘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는데 그 부모들은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루길을 가다가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그들의 "친족과 아는 자 중에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오던 길을 다시 되돌려서 예루살렘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46절을 보면 사흘후에 성전에서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도 성전에서 당시 유대의 랍비들에게 둘러쌓여 듣기도 하고 묻기고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교육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와 같이 일방적인 강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얼마나 잘 묻고 대답했는지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마이아와 요셉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해서 마리아가 묻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 때 부모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우리는 부모로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놀랐는지 여기서 '근심하여 찾았다'는 말이 마리아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줍니다. 이 단어는 깊은 정신적 고통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저도 자식들을 키워보았습니만 자식 키우다보면 하늘이 노래지는 경험들을 몇번씩합니다. 자식들 그렇게 쉽고 만만하게 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식 가지고 큰소리칠 일도 아닙니다. 다 제 자식은 잘 키워보고 싶고 절대로 잘못된 자식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어디 그게 부모 마음대로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때 예수님이 아주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우리 4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오늘 본문의 핵심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48절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꿈과 사명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이 대화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을 가리켜 "네 아버지"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요셉에서 하나님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요셉도 알고 있고 마리아도 알고 있습니다. 이 날아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비로소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를 매우 꺼려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감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을 '우리 아버지'(요 8:39)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2.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고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된 대답에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것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말씀속에 담겨있는 "내 아버지 집"에 대한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계시면서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를 인류에 있어서 가장 어두운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초림의 때는 바로 그런데 때였습니다. 그러니 성전이라고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습니까? 나중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전에서 채찍을 휘두루신 사건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권에 있는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인정한 것입니다. 

가정이란 제도, 교회라는 제도 나라와 민족이라는 제도 문제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정치를 하려면 정치권이 썩었어도 그 안에 있어야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생활도 그렇습니다. 천사들만 모인 곳도 반역이 있었는데 문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세우신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은혜를 공급하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는 야곱의 모든 거처들보다도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집"이란 "예루살렘성전"이라는 외형적 건물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의 몸으로 세워져 가게 될 새로운 성전을 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집인 교회를 믿었고 교회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기관은 무너질 때가 옵니다.  세상 나라는 멸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이 이기지 못하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마 16:18).  
  
있어야 할 곳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아니할 때 실망스럽게 걱정스럽습니다. 
예수님이 있어야 할 곳은 '아버지 집'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머물러 있어야 할 고은 바로 아버지 집입니다. 그곳에 안식이 있으며, 그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성전은 일주일에 한번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레위기 19장 30절에,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습니다.

3.  또한 "내가 내 아버지가 집에 있어야 될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이 구절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 가운데에 있어야 될줄 알지 못하였셨습니까? 내 아버지의 사업에 관계하여야 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집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성전에 머문 것은 집에 가기가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또 부모와 동행하기가 부끄러워서도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마냥 자기 삶에 대한 기대와 보람에 겨워 삽니다.  예수님은 자기 삶이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고 자기 삶은 전부 아버지의 일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 어릴 때의 확신이 후일 성인이 된 예수님의 입에서 서슴없이 흘러나옵니다.  "아버지여 내가 당신의 일을 행하러 왔나이다"(요 8:1)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것을 12살 때에도 알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12살의 갑절, 24살, 24살의 갑절인 48살이 되어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지혜의 핵심, 곧 예수님이 말씀은 "내가" 누구인지 알면, 그리고 "내 아버지집"을 알게 되면, 그리고 "내가 아버지 집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을 알게 되면 사실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본문 마지막절인 52절에 보면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며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면 그리하기만 하면 예수님처럼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가심"과 같이 그렇게 축복된 생명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